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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근영 팝콘 심리학] ‘학폭 미투’ 이슈가 우리에게 주는 시그널 

 

학교 존재하는 한 학교폭력 여전… 학폭 발생 후 정당하게 처벌하는 게 어른들의 역할

▎중학교 시절 학교 폭력 의혹으로 ‘무기한 출전정지’ 징계를 받은 흥국생명 쌍둥이 자매 이재영과 이다영(왼쪽) 선수가 지난해 10월 경기에 출전한 모습. / 사진:연합뉴스
최근 체육계에서 학교폭력에 관한 미투가 이슈다. 여자 농구계에서 시작된 파문은 이제 다른 종목을 거쳐 온갖 분야로 번지는 중이다. 반향은 크다. 국가대표 자격을 무기한 정지당한 선수도 있고, 은퇴를 선언한 선수도 나왔다. ‘청소년기에 무심코 저지른 학교폭력을 가지고 체육계 복귀까지 막는 건 가혹하다’는 체육협회 관계자의 항변이 더 논란을 키우는 것 같다.

지금 문제가 되는 학교폭력 사건 대부분은 그들이 중고등학생 시절 일이다. 짧게는 수년 전 심지어 십여 년 전 일이다. 어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사법 시스템을 통해 그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았다면 더 이상 그 사람을 죄인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형법 범죄도 그럴진대, 말마따나 아직 판단력도 미숙한 청소년기에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지금 처벌을 받는 것은 타당한가?

학교폭력 근절 불가능, 해결 과정에서 어른 역할 필수


▎지난 2월 12일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온 ‘여자배구 선수 학교폭력 사태 진상규명 및 엄정대응 촉구합니다’ 청원글. /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캡쳐
누군가는 청소년기의 행실을 보면 그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인성이 확인된다는 거다. 사실이 아니다. 청소년기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가소성이 큰 시기다. 청소년기에 괴물 같았던 아이도 건강한 성인이 될 수 있다. 청소년기의 웬만한 트라우마도 충분히 극복될 수 있다.

실제로 크고 작은 학교폭력에 노출되었던 청소년들 대부분은 그 기억을 그냥 잊고 성장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이슈가 터지는 걸까? 한 가지 이유는 가해자들이 유명인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과거 기억을 쉽게 잊을 수 있는 건 현재 내 주변에 그 기억을 떠올릴 단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유명인은 존재 자체가 기억의 단서가 된다. 유명해질수록 피해자들의 눈에 보일 기회도 늘어나고, 과거의 기억을 되살릴 가능성도 커진다.

최근 몇 년간 요즘 벌어지는 학교폭력 사례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그 사례들을 통해 배운 사실은 ‘전형적인 학교폭력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건들은 정말 다양했다. 누구든 가해자와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

주변의 대응도 천차만별이었다. 친구들 사이의 작은 다툼이 부모 간 자존심 싸움으로 커져 수습이 안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가 저러니 아이가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사례들도 자주 있었다. 요즘 이슈가 되는 학교폭력 사건들에 비하자면 이 사건들은 최소한 발생 직후에 발견되어 어떻게든 처분이 내려졌다는 점에서 다행이라 하겠다.

학교폭력이 이슈가 될 때마다 ‘학교폭력 근절’을 말한다. 그러나 학교 폭력은 ‘근절’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떤 학교, 어떤 청소년들 사이에서든 학교폭력 사건이 벌어질 수 있다. 학교폭력은 이 지구상에 학교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벌어진다.

폭력성은 인간이 가진 본성 중 하나이고, 이 본성은 사회생활 속에서 가장 잘 발현된다.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서 더욱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청소년들을 ‘미성년자’라 부르고 권리를 제한하는 이유는 그들이 성인만큼의 자제력이나 판단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전제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이 학교에 모여 비교하고 경쟁하는 한, 어떤 형태로든 폭력은 발생한다.

현장의 사례들을 보면 학교폭력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이를 제때 발견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자기 학교에서 학교폭력 사건이 발생할 리 없다는 교사와 학교장의 태도가 사건의 적극적인 처리를 주저하게 만든다.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해결에 나서야 하는데, 뒤에 숨어 규정만 내세우면 결국 상처받고 삐뚤어지는 건 아이들뿐이다.

가해 자식 감싸는 부모, 학교폭력 해결에 악영향

학부모들도 마찬가지다. 학교폭력 가해자라고 해서 그 아이가 괴물이란 뜻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학부모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아이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감싸거나 숨기려 든다. 자기 아이는 그런 나쁜 짓을 할 괴물일 리가 없다는 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다 보면 아이는 진짜 괴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부모 밑에서 아이가 제대로 클 수 없지 않겠나.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그것 아닌가.

학교폭력의 발생 자체는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하지만 이를 빨리 발견하고 중단시키고 정당하게 처벌하는 일은 어른들, 교사와 학부모의 책임이다.

사실 학교 폭력 사건은 아주 중요한 교육의 기회다. 사건의 처리 과정은 청소년들에게 사회생활의 올바른 원칙과 규범의 생생한 예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책임감은 그냥 생겨나지 않는다. 자기 행동의 책임을 지는 경험을 통해서 키워지는 것이다. 이는 교사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부모의 참여가 필요하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많은 경우 피해자들은 학교 폭력 자체로 인한 고통보다 그 사건을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와 행동 때문에 더 깊은 상처를 입는다. 사건의 발견 단계에서부터 그렇다. 학교를 관리하고 감독할 책임 있는 어른들이 학교와 교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눈치채지 못했을 때, 아이들은 먼저 어른들의 능력에 대해 실망한다.

가해자들도 마찬가지다. 자기들이 저지른 이 생생한 악행을 발견하지도 처벌하지도 못하는 세상이 얼마나 가소롭겠나. 그 순간 아이들은 무능한 어른들을 본다. 가해자의 행동은 더 잔인해진다. 어디 들킬 때까지 가보자는 거다. 혹여 용기를 내어 이를 알렸는데도 어른들이 한심하게 굴면 이제 아이들은 어른의 존재 의미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과연 우리들의 복지나 안녕에 관심이 있을까? 간신히 학교폭력심의위원회까지 갔는데 아이들이 기대하는 정의로운 결론이 내려지지 않으면 아이들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뀐다. 세상에 정의는 없다는 확신,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괴롭히는 것이 이 세상의 당연한 원리라는 신념, 앞으로 나도 기회만 되면 나보다 약한 자를 쥐어짜야 하겠다는 욕심이 생기는 거다. 이번 일들은 단순히 오래전 일로 멀쩡한 성인들의 발목을 잡는 문제가 아니다. 진작 어른들이 제 역할을 했더라면 모두에게 교훈을 남기고 넘어갔을 일들이다. 어떤 연예인이 자기 아들들이 또래 친구를 폭행하는 걸 발견하자 아들들을 데리고 피해자에게 직접 찾아가 아이와 그 부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런 부모의 아이들에게는 저런 미투 사건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필자는 심리학 박사이자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다. 연세대에서 발달심리학으로 석사를, 온라인게임 유저 한·일 비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험인간], [심리학오디세이], [팝콘심리학], [무심한 고양이와 소심한 심리학자] 등을 썼고 [심리원리], [시간의 심리학],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등을 번역했다.

1575호 (2021.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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