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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호적수(16) 이자겸과 한안인] 혼돈의 고려, 단칼에 이자겸 못 내친 한안인의 악수 

 

가문의 후광 입은 권세가 이자겸 vs 청렴결백 행정가 한안인

▎고려시대 관료들의 모습을 담은 ‘아집도 대련’의 일부. 호암미술관 소장.
12세기 고려는 혼돈이었다. 30차례 넘는 정변과 반란, 민란이 발발했다. 11세기 5배 수준이다. 큰 사건만 꼽아도 1112년 문종의 아들이자 출가한 도생승통 왕탱의 역모가 적발됐고, 1122년에는 권신 이자겸이 정적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벌였다. 1126년에는 이자겸이 반란을 일으켰다. 1135년 묘청의 난도 벌어졌다.

그야말로 대혼란. 고려 건국 200년이 지나며 각종 제도가 시의성을 잃고, 사회적 모순은 깊어진 탓이다. 또 생산력 발전이 창출한 새로운 부와 부가 이끈 사회·경제적 변동이 기존의 틀과 부딪혔다. 1162년 고려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란과 1170년 무신정변이 흔들리는 체제와 주도권 다툼이 대표적 예다. 이 밖에도 1174년 조위총의 난, 1176년 망이·망소이의 난, 1190년 경주민란, 1198년 만적의 난이 이어졌다.

리더십은 배제됐다. 혼란의 시기일수록 비전과 능력을 가진 지도자가 나와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통제하기는커녕 휩쓸릴 수밖에 없다. 예종 이후의 왕들은 하나같이 무력했고, ‘왕 대 문벌귀족’, ‘문벌귀족 대 신흥관료’, ‘외척 대 관료’ 등 여러 집단이 충돌했다. 심지어 같은 집단 안에서도 대립과 갈등이 만연했다.

고려 대혼란의 시작에 섰던 외척 이자겸

특히 주목할 것은 외척, 그중에서도 이자겸(李資謙)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왕권과 부딪히고, 다른 문벌귀족과 대립했으며, 신흥관료 세력과 충돌하여 12세기 초반 고려의 정치 질서를 휘저어 놓았다. 막판에는 왕위를 넘보고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이자겸은 경원 이씨(인주 이씨)다. 경원 이씨는 이자겸의 할아버지 이자연이 세 딸을 문종에게 시집보낸 이래, 왕비 11명을 배출한 당대 최고의 문벌귀족이자 외척 가문이었다. 경원 이씨의 외손자가 왕이 된 사례만 해도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인종 5명이나 된다. 외할머니가 경원 이씨인 덕종, 정종, 문종까지 합친다면 8명이다. 고려 중기의 왕들 대다수가 경원 이씨와 혈연관계인 것이다.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은 이자겸은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도 관직에 올랐다. 하지만 능력은 뛰어났던 것 같다. 문신의 영수 최사추(崔思諏)가 그를 사위로 삼았을 정도니 말이다. 게다가 예종이 이자겸의 둘째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면서(순덕왕후) 이자겸의 정치적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왕권 중심의 유교적 관료체제를 꿈꿨던 예종은 이자겸을 활용하여 왕권에 도전하는 왕족들을 숙청하고, 문벌귀족을 견제했다.

그런데 이자겸은 예종의 구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왕-유학자 관료로 이루어진 공적(公的) 체제보다는 특정 가문이 사사로이 권력을 독점하는 사적(私的) 체제를 선호했다. 이는 예종 사후, 그가 국가의 공적 시스템을 무너트리고 무소불위의 전횡을 휘두른 데서 확인이 가능하다.

따라서 예종은 이자겸을 대체할 인물을 모색하게 된다. 예종은 측근 세력을 대표하는 한안인(韓安仁)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이자겸을 견제케 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한안인은 “지혜롭고 사리에 밝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또 길흉을 잘 점쳐서 많은 일들을 적중시켰다”라고 한다. 그는 예종이 동궁 시절 시학(侍學, 세자를 모시면서 함께 글공부하는 사람)이었던 인연으로, 예종의 즉위와 함께 탄탄대로를 달렸다.

또한 “청렴하고 강직하며 능력도 뛰어나지만 권력자에게 청탁하지 않아 벼슬길이 막혀있던” 김상제와 이유인을 천거하는 등 많은 인재를 발탁했다. 그의 동료인 문공인, 이영, 정극영, 한충, 최기우 등은 모두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고 청렴결백하며, 배움이 깊고 강직하다는 평을 들은 인물들로 학문 실력뿐만 아니라 행정능력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한안인은 이들의 대표격으로 국가의 공적질서 회복, 국왕 중심의 유교적 관료체제 구축을 위해 헌신했다.

이러한 한안인에게 이자겸은 못마땅한 존재였을 것이다. 굳이 예종의 지시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본인들의 이상 실현을 가로막는 방해물이었을 테니까. 한안인은 이자겸의 명목상 지위를 높이되 실권을 빼앗음으로써 그를 무력화하고자 했다. 이자겸을 위시한 외척과 문벌귀족이 백성들에게 자행하고 있는 사적인 수탈을 강하게 비판했고, 이자겸 일파에 대한 파상공세를 감행했다.

더욱이 한안인은 조선 중종 때의 조광조처럼 올곧게 정석대로 움직이지만은 않았다. 앞서 한안인이 길흉을 잘 점쳤다고 소개했는데, 전통사회에서 이 표현은 책략이 뛰어나다는 의미기도 하다. 상대방의 전략을 미리 알아차리고 선제적 대응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붙여주는 말이다. 한안인은 뛰어난 머리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 권모술수까지 부릴 줄 알았으니, 이자겸은 코너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혼란 유보한 한안인, 더 큰 혼란 낳아

그러나 딱 여기까지였다. 한안인은 생각했다. ‘어찌 됐든 이자겸은 예종의 장인이자 세자의 외할아버지다. 납작 엎드려 있으니 제거하기에도 명분이 없지 않은가?’ 그렇게 우물쭈물하던 사이에 상황이 역전한다. 예종이 승하하고 14세의 인종이 즉위하면서 이자겸의 세상이 왔다. 서슬이 퍼런 동생들이 어린 아들의 왕위를 위협할까 두려웠던 예종이 죽기 전 이자겸에게 뒷일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왕의 외조부라는 혈연적인 힘, 거기에 고명대신이라는 합법적인 권력까지 휘두를 수 있게 된 이자겸은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한안인 일파를 숙청하는 것이었다. 한안인은 귀양지에서 바닷물에 빠트려 죽였고, 문공인, 이영, 정극영 등은 모두 유배를 보냈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이자겸이 간신이자 역적으로 기록되고 한안인은 명신(名臣)으로 남긴 했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한안인이 패배한 것이다.

무릇 강력한 적과 싸울 때는 숨 쉴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된다. 죽이지는 않더라도 재기가 불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다시 상황이 뒤바뀔지 모른다. 만약 한안인이 이자겸을 완전히 눌러버렸다면, 그가 예종과 함께 꿈꾸었던 공공성에 기반을 둔 새로운 국가체제가 성립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이자겸의 반란, 무신정변으로 뒤엉킨 인종 당시의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75호 (2021.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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