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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호적수(17) 충렬왕과 충선왕] 권력은 피보다 진하다… 부자 간 권력 다툼 

 

아버지 측근을 숙정한 충선왕 VS 아들의 이혼을 공작한 충렬왕

▎충선왕의 외할아버지인 원나라 초대 황제 쿠빌라이 칸의 사냥행차도. / 사진:푸른역사
누군가와 싸울 때는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상대방의 터부를 건드리고, 상대방의 존재자체를 말살하려 들면 싸움은 진흙탕으로 변한다. 중조(重祚) 혹은 재조(再祚). 아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용어일 것이다. 단어가 낯선 만큼 단어의 뜻도 낯선데, 퇴위하거나 폐위된 임금이 다시 왕이 된 경우를 가리킨다. 우리나라는 고려의 원종,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다섯 명이 여기에 해당한다. 고려의 24~28대 군주들로, 연이어 중조가 벌어졌다는 것은 이 시기가 상당히 혼란했다는 의미다. 특히 충렬왕과 충선왕 사이에는 치열한 권력투쟁이 얽혀있었다.

흔히 권력은 나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왕과 세자가 부자간이라지만 ‘현재 권력’인 왕의 입장에서 ‘미래 권력’인 세자는 왕권을 위협하는 경쟁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세자를 의심하고 견제하며 심지어 제거하려 들기도 한다. 예컨대 조선의 인조는 청나라를 등에 업은 소현세자가 자신의 왕위를 노린다고 의심한 끝에 그를 죽게 만들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반대로 아들이 아버지를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부친을 살해했다고 알려진 수나라의 양제가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진 사례도 있을까? 보기 드물지만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왕좌를 놓고 혈투를 벌인, 바로 충렬왕과 충선왕이다.

원나라 등에 업은 충렬왕, 황실 핏줄 아들에 밀려

충렬왕은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했다. 원나라 황실과 혼인한 첫 군주로, 권세가들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충렬왕이 먼저 요청한 것이다. 원나라에의 예속이 심화되는 폐단을 낳긴 했지만 세계를 제패한 몽골제국의 사위로서 막강한 힘과 권위를 얻게 된다. 충렬왕은 스스로 몽골 사람처럼 변발하고 몽골의 복장인 호복을 착용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친조(親朝, 제후국 왕이 상국에 직접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는 것)에 나섬으로써 원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다. 충렬왕의 이 행위가 부정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충렬왕은 친조를 통해 외교 역량을 발휘, 고려에 부담을 주었던 여러 현안들을 해결했다. 원에 바치는 공물을 대폭 경감시켰고, 고려에 주둔한 원나라 군대와 감독관인 다루가치를 철수토록 했다. 또 원나라에 아부해 고려 국정을 어지럽힌 부원(附元) 세력을 제압했다. 모두 황제를 직접 면담해서 얻어낸 성과다.

한데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이 혼인할 당시 충렬왕에게는 정실부인인 정화궁주와 슬하에 맏아들 자(滋)가 있었다. 제국대장공주가 왕후가 되면서 정화궁주는 후궁으로 격하됐는데, 충렬왕이 정화궁주를 잊지 못하면서 공주의 분노를 샀다. 여기에 왕의 장인인 쿠빌라이마저 붕어했다. 뒤를 이어 원나라 황제가 된 테무르(성종)는 비록 제국대장공주의 조카지만 사이가 좋지 않았다. 충렬왕의 입지가 크게 위협받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국 1298년, 충렬왕은 왕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연로하다는 이유를 내걸긴 했지만 실상 원나라의 압력 때문이었다. 이때 보위를 승계한 사람이 그가 제국대장공주 사이에서 낳은 아들 충선왕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충선왕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굳세며 결단력이 있었다. 아첨을 일삼는다며 부왕의 측근인 신하를 면전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좋은 군주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충분했던 것이다.

이러한 충선왕이 아버지 충렬왕과 마찰을 빚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정치 성향이 맞지 않고, 아버지가 저지르는 과오가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다. 16살 어린 나이에 의지할 사람 하나도 없이 만리타향 고려로 시집을 온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무관심했다. 그러던 와중에 1297년, 마흔이 채 안 된 제국대장공주가 젊은 나이에 눈을 감자 충선왕의 화가 폭발했다.

그는 모친이 죽게 된 원인이 충렬왕의 측근들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충렬왕의 애첩 무비와 충렬왕의 총애를 믿고 전횡을 휘두른 환관 도성기, 최세연을 죽였다. 일당 40여 명을 귀양 보내고, 조정 인사를 대대적으로 물갈이 하는 등 정국을 뒤집어 엎었다. 아직 세자에 불과했던 그가 쿠데타에 준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배경 덕분이다. 그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자로서 성종의 조카인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으니 황실과의 혈연이라는 측면에서는 아버지 충렬왕보다 우위에 있었다. 또한 원 황제로부터 고려의 임시 수상격인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에 임명되어 사실상 국정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다.

막강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부왕의 후궁을 죽인 것은 불효이자 참람한 행동이었다. 더욱이 충선왕은 즉위하자마자 부왕의 정치를 부정하고, 강력한 개혁교서를 발표했다. 부정과 비리를 발본색원하겠다며 충렬왕의 측근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작업을 벌였다. 그러던 중 충선왕에게는 불운이, 충렬왕에게는 행운이 일어난다.

충선왕은 계국대장공주와 부부 금슬이 좋지 않았는데, 이것이 충선왕의 다른 부인인 조비가 계국대장공주를 저주했기 때문이라며 공주가 직접 원나라 조정에 무고함으로써 사단이 벌어졌다. 물론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충선왕은 즉위한지 8개월 만에 원나라에 의해 폐위 당했다.

즉위 8개월 만에 폐위 당한 충선왕 이어 복위 성공

그러자 충렬왕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 복위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충선왕 세력을 제거하고, 친위세력을 강화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의 이혼을 공작했다. 계국대장공주를 조카인 왕전과 재혼시켜 그를 다음 왕으로 삼는다는 복안이었다. 충선왕이 다시는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힘의 근원을 잘라내겠다는 것이었다. 충렬왕은 신하들을 이끌고 직접 원으로 건너가 공주의 이혼 및 재가를 청원했다.

충선왕으로서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의 정치생명을 끝장내는데 앞장서고 있으니 말이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던 그는 대대적인 역공에 나섰고, 고려 조정은 충렬왕과 충선왕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어 일대 혼란에 빠진다.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원나라 무종과 인종의 킹메이커가 되면서 다시 복위하긴 했지만 부자간의 정쟁은 고려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무릇 누군가와 싸울 때는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상대방의 터부를 건드리고, 상대방의 존재자체를 말살하려 들면 싸움은 진흙탕으로 변한다. 감정이 이성을 억누르게 되면서 극단적인 대결로 치닫는다. 만약 충선왕이 무비를 죽이지 않았다면, 충렬왕이 계국대장공주의 이혼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두 사람 모두 능력 있는 군주들이었으니 서로가 못마땅했을지언정 고려에 해가 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77호 (2021.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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