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양심은 멀고 당근은 가깝다 

<치팅 컬처>
남윤호의 ‘책 속에 삶이…’ 


데이비드 캘러헌 지음·강미경 옮김
서돌·420쪽·1만8000원

배운 사람, 힘 있는 사람, 돈 있는 사람, 다들 남 속이고 사기 친 덕에 지금의 자리에 있는 거 아니냐. 이 두툼한 책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책 머리는 저자의 두 친구를 소개하는 데서 출발한다.

가게에서 40달러짜리 와인을 슬쩍 한 피터와 뉴욕에 살면서 코네티컷에 위장전입 해 세금 3000달러를 절약한 맥스. 정당하게 지불해야 할 비용을 떼먹은 것은 둘 다 똑같다.

금액은 피터보다 맥스가 더 크다. 그런데도 피터는 절도죄를 저지른 범죄자이고, 맥스는 절세 방법을 아는 영리한 생활인이다. 이건 아주 단순한 사례다. 자신이 ‘쓰레기’로 평가한 주식을 고객에게 매수 추천한 애널리스트는 어떤가.

물론 그 대가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 저자는 메릴린치의 헨리 블로짓을 실명으로 공격했다. 또 일한 시간을 뻥 튀겨 수임료를 왕창 뜯어내는 변호사, 분식결산으로 기업 실적을 부풀려 주가를 띄우는 경영자, 논문을 조작하고 표절하는 교수, 제약사와 짜고 비싼 약을 처방하는 의사, 사실을 조작해 그럴싸한 작문을 해대는 기자….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렵다. 미국 대기업 중역의 82%가 골프장에서 부정 행위를 한 경험이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는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저자는 미국 사회가 이처럼 타락한 원인을 사회 시스템에서 찾는다.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구조 말이다. 경쟁에서 일단 이기고 봐야 하므로 모두 편법과 속임수를 쓰게 된다는 것이다.

“남들도 다 한다”는 생각에서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또 하나는 갈수록 커지는 소득 격차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한 울타리 안에서 같은 규칙으로 묶여 있다는 개념이 점차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시장주의를 강조하는 바람에 공정한 심판 기능을 해야 할 정부의 역할이 지나치게 왜소화됐다는 점도 빼놓지 않는다.

그 결과 미국에서 룰을 지키는 것은 매우 고단한 삶을 뜻하게 됐다고 한다. 양심은 멀고 눈앞의 당근은 가까우니 그럴 수밖에. 저자는 이런 현상이 강력한 전염성을 지니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유행병을 퍼뜨리는 본질을 찾아내 바꿔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저자가 내놓은 것이 새로운 사회계약과 행동규범이다.

쉽게 풀자면 ‘다들 개과천선해 착하게 살자’는 뜻이다. 또 성장의 결실이 근로계층과 중산층에도 골고루 돌아가도록 하자고도 했다. 이게 한계다. 대안치고는 너무 무력해 보이지 않나. 이런 말을 누가 몰라서 못하나. 그런데도 이 정도로 끝내려는 것은 저자 스스로 높은 현실의 벽을 의식했기 때문인 듯하다.

또 다른 의문도 생긴다. 이 책에는 미국인들이 정의와 공익을 아랑곳 하지 않고 눈앞의 사익만 추구하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무척 비효율적인 사회일 텐데 아직도 대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1997년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저서 <신뢰>(Trust)에서 사회 구성원 사이의 신뢰 수준이 번영에 큰 영향을 준다고 했다.

미국은 과연 속임수와 편법이 판 치는 ‘저신뢰 사회’인지, 그래서 번영에 한계가 있는 건지, 이 책만 봐서는 답이 잘 안 나온다. 더 큰 문제점은 독자의 오독(誤讀) 가능성이다. 미국에서도 속임수와 편법이 판을 치네, 그것도 잘났다는 사람들이 더 하네, 우리나라도 똑같겠지, 남들도 그럴 테니 나 혼자 깨끗해 봤자 바보가 되겠구먼, 그렇다면야….

이런 식의 비약을 근거로 생활신조를 바꾸겠다면 큰 오산이다. 사기도 치던 놈이 치고, 거짓말도 하던 놈이 하는 법이다. 갑자기 악바리나 뺀질이가 된다고 해서 추가로 얻을 이익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저자 데이비드 캘러헌은 공공정책 연구기관 데모스의 공동 설립자 겸 수석 연구원이다. 미국 프린스턴대 정치학 박사 출신이다.

(필자는 중앙일보 경제부문 금융팀장이다)

200902호 (200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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