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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 길 위에서 삶을 노래하다 

 

글 염지현 포브스코리아 기자 사진 오상민 기자
장편 대하소설 『객주』로 널리 알려진 김주영. 요즘 그는 가슴 속 한켠을 가득 채웠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지난해 5월엔 숨기고 싶었던 어머니의 삶을 담은 『잘가요 엄마』를 내놓더니 8월엔 30년간 덮어둔 『객주』 마지막권을 완결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산책로에서 촬영에 응한 김주영 작가. ‘길 위의 작가’ 로 불리는 그는 일흔이 넘으면서 걸어온 길을 되짚는 시간이 많아졌다. 마음 속에 켜켜이 쌓아뒀던 응어리마저 소설로 풀어냈다.



181㎝의 훤칠한 키에 체격이 좋다. 8월 14일 서울 논현동 사무실에 만난 김주영(74) 작가의 첫 인상이다. 큰 키의 놀라움도 잠시 깨끗한 방 안에 눈길이 갔다. 책상과 책장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 세계 여행을 다니며 찍은 사진들은 나라별로 스크랩북으로 보관해뒀다. 신문조차 언론사별로 분류돼 있다.

그는 1972년 등단해 대하소설 『객주』를 시작으로 『화척』 『홍어』 『활빈도』 『천둥소리』 등을 꾸준히 발표해온 국내 문단의 원로 작가다. 유주현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이산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그는 최근 ‘이스탄불-경주세계문화엑스포’ 기획위원으로 참여했다. 8월 31일부터 9월 22일까지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리는 엑스포는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행사다. 한국 전통 문화를 정보기술(IT)과 결합한 한국문학관을 여는 것을 비롯해 한국 대표 작가 사진전, 전통 패션쇼, 한국 문화재 특별전이 열린다.

김주영 작가는 ‘코리아 실크로드 탐험대’ 자문을 맡았다. 그는 “실크로드는 장사꾼들이 상품만을 교역하던 길이 아니라 예술과 문화가 교류하던 소통의 길”이었다며 “이번 프로젝트가 한류 문화를 알리고 개척하는 길이 되길 바란다”고 얘기했다.


▎취재하고 자료를 수집한 후에야 비로소 글을 쓰는 김주영 작가는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꼼꼼하게 정리하는 습관이 몸에 뱄다.
그가 실크로드 프로젝트 자문을 맡은 데는 소설 『객주』가 한몫했다. 조선 후기 전국을 누비는 보부상의 삶과 애환을 담은 소설이다. “보부상은 서쪽 물건을 가져다 동쪽에 팔고, 남쪽 물건을 북쪽으로 유통했어요. 예컨대 경북 울진의 소금을 내륙에 팔고, 내륙에서 나는 곡식이랑 옷감을 울진에 파는 거에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를 잇는 중간 상인이죠. 그들은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아 다녔어요. 보부상들이 개척한 상로(商路)가 작은 의미의 실크로드라고 할 수 있어요.”

30년만에 마침표 찍은 객주

자연스럽게 얘기는 『객주』로 흘렀다. 8월 말엔 마지막권인 10권이 출판됐다. 1979년 한 일간지에 연재를 시작해 4년 9개월 동안 단행본 9권을 냈다. 30여 년이 지난 올해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당시 그는 “진이 빠져 소설을 끝낼 자신이 없었다”고 들려줬다.

“연재를 시작할 때는 의욕과 열정만 있었지요. 한국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었어요. 특히 보부상 자료가 없어 애를 먹었습니다. 과거 보부상은 천민에 속했어요. 선조들은 자료가 있어도 모조리 없앴을 겁니다. 후손이 상놈의 자식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전국 장터를 발로 뛰어다니며 소설을 쓰니 힘들더라고요. 혼자서 서너번 울었어요. 결국 중단하다시피 그만뒀어요. 보통 소설이 끝나면 주인공이 죽게 마련인데요. 9권에서 주인공 천봉삼이 사라졌다고 끝을 맺었어요.”

이후 그는 다양한 소설을 집필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쓰다만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때마다 언제가는 『객주』를 끝내겠다고 다짐했다. 4년 전 경북 울진 흥부장에서 봉화의 춘양장으로 넘어가는 보부상 길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울진 죽변항에서 내륙 봉화까지 소금을 실어나르는 십이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객주를 끝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부터 새로 발견된 보부상 길을 수십 차례 걷고 나서 책을 완간했다.

이 책으로 그는 ‘길 위의 작가’라는 별명이 생겼다. 5년간의 자료 수집, 3년의 장터 순례, 200여 명의 취재로 쓴 게 『객주』다. “한 달에 20일 이상 노트를 들고 장터를 쫓아다녔습니다. 시골에 있는 여인숙이나 여관에 머물며 글을 쓰기도 했어요. 공부에 도통 관심없던 제가 조선 후기 상업사에 대한 100여 편 논문도 찾아 읽었습니다.”

김 작가는 전남 청송 진보에서 태어났다. 조그만 마을에 살다보면 심심하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5일장이 들어서면 마을에 활력이 생긴다.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술 먹고 멱살잡이하는 사람, 여인네와 담소를 나누는 사람,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로 난장판이 된다. 장이 서는 날이면 학교에 가지 않고 하루종일 구경했다.

어린시절을 보낸 장터가 소설 『객주』에 밑그림이 됐다. 자료를 수집하던 중 ‘보부상’을 알게 됐다. 조선시대에 그들은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다니면서 물건을 사고 팔았던 상인이다. 처음엔 중편 소설을 쓸 요량으로 준비하다가 보부상 자료를 모으면서 장편 소설로 바뀌었다.

이 책의 특징은 옛말과 토속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빼곡하게 적힌 각주를 읽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시대상을 살리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다. “다들 어렵다고 해요. 우스갯 소리로 감옥 간 사람들이 많이 보는 책이라고 합니다. 일일이 단어를 찾아가며 읽다보니 시간 보내기 딱 좋다고요. (웃음)

장돌뱅이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살았던 가옥·옷·음식은 물론이고 그들만의 맛깔진 언어를 그대로 옮겨왔어요. 예를 들어 ‘몹시 쌀쌀맞게 쏘아붙이다’는 말 대신 ‘냉갈령 쏘아붙이다’라고 얘기해요. 요즘 사람은 잘 모르는 말이죠.‘퇴짜 맞다’도 옛말이에요. 물건값으로 어음을 건네주면 돈을 줍니다. 돈을 지급하지 못할 때 종이에 퇴(退)자를 적어준다고 해서 생긴 말이 ‘퇴짜 맞다’에요. 저야 쉽게 쓰고 싶죠. 책도 많이 팔리고요.” (웃음)

전락원 파라다이스 회장의 선물

김 작가는 모든 글은 자서전이고 자신에게 반성문이라고 했다. 『천둥소리』 『홍어』 『멸치』『빈집』을 통해 어머니 언저리를 짚던 그가 지난해 5월 『잘가요 엄마』를 내놨다. 그의 어머니 이야기다. 그간 빙빙 돌려 했던 얘기를 툭 털어놨다. 작가는 2010년 봄에 어머니가 작고한 이후부터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힘든 가슴 아픈 얘기다.

어머니는 친정 오빠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유력자의 아들에게 시집갔다 버림을 받았다. 다시 먹고 살기 위해 돈푼깨나 있다는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 알고보니 그는 허세 좋은 빈털터리였다. 가난에 찌든 어머니는 평생을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일을 했다.

작가는 굶주림보다 두 번 결혼한 어머니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싫었다고 했다. 이후 어머니와 작가 사이는 멀어졌다. 어머니가 유산으로 남긴 것은 가짜 악어가죽 핸드백과 립스틱 뿐이었다. 아버지가 선물한건데 아까워서 한번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또 한 가지는 그가 이 소설 ‘작가의 말’에서 표현한 ‘어머니가 내게 주었던 자유의 시간’이다. 일흔이 넘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비로소 깨달았다. 그가 그토록 어머니에게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이 지금의 그를 만들어줬다.

그는 “이 책은 마음 속에 있는 얘기를 다 토해내는 기도 같았다”고 들려줬다. “종교에서 기도를 오래하면 마음 속이 후련하고 구원받은 기분이 들잖아요. 고백적인 소설을 쓰면 스스로가 정화되는 거 같아요.” 김 작가가 인생 멘토로 삼는 이는 고 전락원 파라다이스 회장이다. 전 회장의 누나 전숙희 작가를 통해 인연을 쌓았다. 전락원 회장은 유독 그를 아꼈다. 보따리 싸들고 장터를 돌던 그에게 선뜻 집무실을 마련해줬다. 여전히 그의 사무실은 파라다이스빌딩 안에 있다.

“저를 왜 좋아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웃음) 거짓말을 안 해서인가. 아무튼 대단한 양반이었어요. 예술하는 사람들을 남몰래 지원했어요. 예술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줬어요. 그렇게 매너 좋은 사람은 앞으로 찾기 힘들 것 같아요. 다른사람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 있어요.

그에게 건의해 1989년에 예술가를 후원하는 파라다이스문화재단이 설립됐지요. 이때부터 상임이사로 참여했어요. 2005년 11월 전 회장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이사장을 맡았고요. 특히 해외 작가와의 교류에 적극 나섰지요. 일본·중국 등 해외 작가와 국내 작가가 만나서 작품 얘기를 나누고 해외에 국내 작품을 알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여행을 좋아한다. 글을 쓸 때는 철저히 계획을 짜서 하는 반면 여행은 마음 내키는대로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여윳돈이 있고 떠나고 싶으면 사무실에서 바로 떠난다. 집무실에는 언제든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여벌의 옷을 준비해 뒀다. 여행 기간도 정하지 않는다. “삶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여행과 소설이냐”고 묻자 큰소리로 웃으며 “여행과 소설 그리고 술”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예전만큼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했다. 이제 건강을 챙겨야 할 나이라고 덧붙였다.

“글 쓰는 작업이 건강에 무리를 줘요. 쫓겨서 쓸 때가 많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하고요. 앞으로 두 권 정도 더 쓰고 쉬려고요. 편안하게 산문을 써볼 생각이에요. 제 이야기도 하고, 주변의 이야기도 해보고요. 그리고는 푹 쉬렵니다. 책도 읽고 연애도 하고요.”

마지막으로 그는 독일의 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보여준 만년의 사랑 얘기를 들려줬다. “괴테는 74살에 19살 처녀에게 청혼했습니다. 물론 거절당했지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구애를 했어요. 하루는 노부인이 찾아와 얘기를 해요. 자신이 선생님이 청혼한 아이의 어머니라고요. 그리고 차라리 자신과 결혼하자고요. 물론 둘 다하고 안했어요. 흥미로운 점은 괴테가 죽고 나서도 그 아가씨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저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웃음)

201309호 (201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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