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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스티리아 와인 

요새가 지켜낸 ‘소믈리에들의 비밀병기’ 

글·사진 정수지 와인21닷컴 기자
오스트리아 남부 슈타이어마르크(Steiermark, 영어로는 Styria)는 근래 세계 최고 수준의 화이트 와인으로 국제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바로 이맘 때 푸르름으로 가득한 스티리아 지역을 돌아보며, 풍부한 먹거리와 싱싱함이 가득한 화이트 와인을 맛보는 건 인생 최고의 오감 만족 여행이 될 것이다.

▎카펜슈타인 성에 쌍무지개가 떴다. 산 꼭대기에 위치해 사방으로 트인 전망을 즐길 수 있다.
국내에서 오스트리아 와인은 아직 낯설다. 전세계 와인 생산량의 1%를 차지하는 오스트리아 와인은 물량으로는 다른 와인 생산국을 절대 이길 수 없다. 이에 와인생산자들은 대형 마트가 아닌 틈새 시장, 즉 하이엔드 레스토랑을 공략했다. 화이트 와인이 주를 이루며, 와인은 산미가 좋고 깔끔해 어떤 음식과도 무난하게 즐길 수 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 와인은 ‘소믈리에들의 비밀병기’라 불리며 해외 유명 레스토랑 와인 리스트엔 어김없이 그 이름을 올렸다. 스티리아 와인들은 그 중에서도 특히 외부세계에 알려지지 않다가 해외 진출 즉시 매우 큰 성공을 거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이 지역 와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데엔 스티리아의 굴곡진 역사가 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의 배경무대


▎스티리아의 레스토랑. 오스트리아 전통복장이 눈에 띈다.
스티리아의 주도는 ‘요새’라는 의미의 그라츠(Graz)다. 수도 비엔나에서 남서쪽으로 150km떨어진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이자 이문열의 소설과 동명의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의 배경이 된 곳이다. 그라츠는 요새로 불릴 만큼 오랜 동안 이어진 잦은 침략과 전쟁을 겪었다. 그 때문에 이 지역 와인생산자들은 특급 포도원들을 낮은 돌담으로 둘러 쌓아 보호했다.

스티리아 와인의 부흥을 가져온 건 합스부르크 대공 요한(Archduke Johann)이다. 그는 레오폴트 황제의 13번째 아들로 상속받을 영지가 부족해 직업 군인의 길을 걸었다. 1800년부터 전쟁에 참여한 그는 나폴레옹 전쟁 후 스티리아에 정착했다. 평민들과 같은 스티리아 고유 복장을 입었고, 평소 관심 있던 과학기술과 농업을 공부했다. 지역 현대화와 와인을 포함한 특산물 마케팅으로 지역 산업을 크게 발전시켜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스티리아 와인은 대공 요한이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암흑기를 맞는다. 이번엔 전쟁이 아닌 포도 재배에 치명적인 병충해인 오이디움(Oidium)과 필록세라(Phylloxera)가 스티리아 포도원을 파괴했고, 사람들은 이후 고품질 와인이 되는 품종만 골라 새로 심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와인이 나는 프랑스 부르고뉴 코트도르(Cote d’Or)와 같은 위도에 자리해 완벽한 와인 생산 조건을 지닌 스티리아 와인이 부각되게 된 배경이다.

스티리아 포도원 기행은 비엔나에서 그라츠로 이동한 후 스티리아 서부, 남부, 남동부 순으로 둘러보는 여정이 유용하다. 그라츠는 걸어서 다닐 수 있는 범위 안에 볼거리와 먹거리가 많다. 그라츠 구시가지는 합스부르크 시대 건축 양식을 두루 보유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됐다. 뿐만아니라 무어(Mur)강을 따라 걷다 보면, 서울 시청과 새빛 둥둥섬의 모티브가 된 쿤스트하우스와 인공섬을 볼 수 있다. 먹거리로는 현재 그라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레스토랑인 타게스카페 프라이블릭(Tagescafe Freiblick)이 필수 코스다. 이곳은 오스트리아 미식과 와인 권위지인 팔스타프(Falstaff)에서 최고 등급인 잔 3개를 받았다. 건물 6층에 위치하며, 열린 옥상 정원을 가지고 있어 그라츠 시내를 내다보는 전망을 즐길 수 있다. 미니멀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공간에서 유기농 재료로 만든 최상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여름은 저녁 9시가 되어도 해가 지지 않으니 열린 옥상 정원에서 낭만적인 여름 밤을 즐길 수 있다.

와인가도(Wine Road)를 따라 펼쳐지는 스티리아는 매우 아름다우며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풍광과 닮았다. 조용하고 목가적이며, 눈이 닿는 모든 곳엔 높낮이가 다른 언덕들이 구불구불 펼쳐져 있다. 사방이 진초록이라 영화 <반지의 제왕>이나 <호빗>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숲의 일부분이 된 듯한 물아일체의 마음도 든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어딜 봐도 작품이 된다. 동쪽으로 펼쳐진 빽빽한 음수림에선 유럽 숲이 주는 특별한 기운이 느껴진다. 포도를 쪼아먹는 새를 쫓으려고 세운 거대한 바람개비 클라포테츠(Klapotetz)는 유난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방문자들의 시선을 모은다. 스티리아 포도원은 대부분 60도 이상 경사진 언덕에 있다. 스티리아 서부는 쉴허(Schilcher)라 불리는 로제 와인, 남부는 세계 최고 수준의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남동부는 향기로운 트라미너(Traminer) 품종이 주를 이룬다.


▎서울 시청과 새빛 둥둥섬의 모티브가 된 쿤스트하우스와 인공섬
와인생산자 중 왕은 만프레드 테멘트


▎쾨글 와이너리 셀러도어. 지은지 300년이 넘은 통나무 농가는 멋진 지붕에 조망도 좋다.
세상에서 오직 스티리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서부 대표 와인인 쉴허는 블라우어 빌트바허(Blauer Wildbacher) 품종으로 만든 로제 와인이다. 이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오르는 고대 품종으로 ‘잘 익은 열매를 먹으면, 약에 취한 듯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 의미를 지닌다. 1841년 대공 요한이 자신의 성 주변에 심은 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쉴허는 꼭 붉은 빛을 내는 소비뇽 블랑 같다. 와인은 선명한 핫핑크 색에 산딸기와 허브 향이 느껴지며, 잠이 확 깰 정도로 강한 산미를 지닌다. 약간 떫으며 산미가 좋아 식전주로 좋고, 주로 짠 맛, 기름진 맛, 훈연된 음식에 잘 어울린다.

해외 진출 즉시 큰 성공을 거둔 건 바로 스티리아 남부 소비뇽 블랑이다. 이곳 소비뇽 블랑은 잘 익은 파인애플과 복숭아 같은 노란 과실, 화사한 흰 꽃(엘더플라워), 금방 자른 풀과 피망 향을 낸다. 스티리아 소비뇽 블랑의 국제적 성공을 두고 오스트리아 와인 전문가들은 ‘이 지역 와인생산자 중 왕을 꼽는다면, 단언컨대 만프레드 테멘트(Manfred Tement)’라고 입을 모은다. 만프레드 테멘트의 성공에는 그의 아버지 요제프 테멘트의 기구한 운명이 큰 역할을 했다. 성직자가 되고 싶었던 요제프 테멘트는 경제 사정이 어려워 칼멜수도회를 위해 와인을 만들었다. 이후 전쟁 포로로 프랑스에서 지낸 그는 석방 후 새로운 와인 양조 아이디어와 비전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국제적인 안목을 지닌 아들 만프레드 테멘트는 가업을 물려받아 지역 특색과 국제성을 두루 갖춘 테멘트 소비뇽 블랑 리저브 치어렉(Tement Sauvignon Blanc Reserve Zieregg)을 세상에 내놨다. 이 와인은 권위 있는 와인평론가들의 연이은 호평을 받았고, 책 『죽기 전에 꼭 마셔봐야 할 와인 1001』에 올랐다. 국내 특급호텔 소믈리에들도 입을 모아 칭찬하는 테멘트 치어렉은 힘과 우아함, 과실과 미네랄 풍미가 완벽에 가깝게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장기 숙성 잠재력을 지닌다. 세계 최고 소비뇽 블랑으로 여겨지는 프랑스 르와르 밸리의 디디에 다그노(Didier Dagueneau)의 실렉스(Silex)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품 와인이다.

‘소비뇽 블랑의 왕’ 만프레드 테멘트는 와인 경험을 극대화해 줄 다이닝 공간인 디 바인방크(Die Weinbank)를 작년 초 열었다. 한적한 시골 마을 작은 레스토랑이지만 오스트리아 최고 셰프 중 하나인 게하르트 푹스(Gerhard Fuchs)와 오랜 경력의 소믈리에 크리스티안 자흐(Christian Zach)가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다. 스티리아산 최고 와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숙성된 와인도 맛볼 수 있다. 음식은 모두 지역에서 나는 제철 식재료로 모던하게 조리되는데, 여름이 제철인 아스파라거스, 민물농어 혹은 잉어 구이, 산딸기와 튀긴 엘더플라워를 곁들인 디저트 등을 맛볼 수 있다. 음식은 접시를 싹싹 비울 정도로 맛있다.


▎특급호텔 소믈리에들도 입을 모아 칭찬하는 테멘트 치어렉.
테멘트를 비롯 스티리아 남부 중요 포도원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명소는 바로 쾨글(Kögl) 와이너리 셀러도어다. 지은지 300년이 넘은 통나무 농가는 멋진 지붕에 조망도 좋지만 오스트리아 최고 소믈리에와 레스토랑 관계자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부쉔쉥크(Buschenschank) 맛집이기도 하다. 부쉔쉥크는 오스트리아 전통 음식으로 차게 즐기는 염장 혹은 훈연 돼지고기 음식과 우리의 장아찌와 비슷한 피클이다. 스티리아 사람들은 주말이면 부쉔쉥크 맛집을 찾아 다니는데, 쾨글은 ‘스티리아다움’을 가장 잘 전달하는 최고 맛집이라고 한다. 돼지 고기 훈연 과정에서 나오는 기름으로 만든 고소한 스프레드, 호박씨 오일을 듬뿍 뿌린 돼지고기, 나무 껍질 색과 모양을 닮은 커다란 바크빈, 신선한 홀스래디쉬, 너무 시지 않게 짜지 않게 절인 사각사각한 오이와 고추 절임을 즐길 수 있다. 부쉔쉥크는 소비뇽 블랑 와인과 정말 잘 어울린다.

여행을 하면서 만난 입에 맞는 식재료와 와인을 사고 싶다면, 지역특산품 전시 판매 공간인 그누스레갈(Genuss Regal)을 추천한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와인과 식재료를 저렴하게 살 수 있고 음식은 시식이 가능하다. 대표 상품으로 돼지고기 가공품, 호박씨 오일과 스낵, 각종 견과류, 다양한 식초들을 만날 수 있다. 호박씨 오일은 눈과 남성들의 건강에 특히 좋다고 알려져 인기가 많다.

붉은 노을 뒤 찾아오는 푸른 늑대의 시간


▎소비뇽 블랑 와인과 잘 어울리는 부쉔쉥크. 돼지고기에 호박씨 오일을 듬뿍 뿌렸다.(좌) / 스티리아 남동부를 대표하는 뉴마이스터 와이너리의 저장고. 화산 토양의 이점을 살린 트라미너 와인이 많다.
스티리아 음식을 먹어보니, 토종닭과 달걀이 유난히 맛있다. ‘박헨들’이라는 닭튀김과 남동부 대표 와인인 트라미너의 궁합이 아주 잘 맞는다. 한국에 치맥(치킨과 맥주)이 있다면, 이곳엔 치트(치킨과 트라미너)가 있다. 남동부 대표 와이너리 뉴마이스터(Neumeister)는 화산 토양의 이점을 최대한 살린 트라미너 와인을 잘 만든다. 트라미너 품종은 장미향과 스파이시함이 특징이며 자칫하면 높은 알코올 도수에 낮은 산미를 지니므로 그 균형을 잡는 게 중요한 품종이다. 뉴마이스터 트라미너는 몸집이 상대적으로 가벼우면서 풍미는 진하고, 무엇보다 예리한 산미를 지녀 한국인의 입맛에 딱 맞다. 와인도 좋지만 뉴마이스터로 가는 숲 속 길이 무척 아름다우며, 와이너리 테라스에서 펼쳐지는 풍경도 좋다.

와인여행의 마무리는 뉴마이스터 와이너리 근처 카펜슈타인 성(Schloss Kapfenstein)에서 하길 추천한다. 이 성은 ‘망루대’라는 이름처럼 산 꼭대기에 위치해 사방으로 트인 전망을 즐길 수 있다. 1605년 언급된 기록을 찾을 수 있는 고성은 현재 객실 15개를 갖춘 호텔로 운영 중이다. 해질 무렵 카펜슈타인 성에 도착해 와인 한 잔 기울이며 노을을 즐기고, 붉은 노을 뒤 찾아오는 푸른 늑대의 시간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이다.

- 글·사진 정수지 와인21닷컴 기자

201607호 (2016.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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