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이석우의 와인 이야기(4) 

블라인드 테이스팅, 참 어렵다 

이석우 중앙일보 조인스 공동대표 겸 디지털제작 전략담당
와인의 정체를 감추고 시음하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의 목적은, 모든 선입견을 배제한 체 그 와인의 객관적인 품질을 평가하는 데 목적이 있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선입견 때문에 품종과 지역을 알아맞추기란 쉽지 않다.
"형님, 이거 한번 드셔보시죠.”

와인업계에 종사하는 후배 녀석이 레드 와인을 한잔 들이민다. “드셔보라”고 했지만, “무슨 와인인지 맞춰 보라”는 이야기다. 엉겁결에 당하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매번 불편하다. 공짜 와인을 한잔 얻어먹게 되어서 생기는 고마운 마음보다도, 엉뚱한 대답을 해서 당할 창피와 수모가 더 걱정스럽다.

먼저 와인의 빛깔을 살핀다. 레드 와인의 경우, 막 병입된 어린 와인은 보라색에 가까운 적색을 띄다가, 점차 바래져서 종국에는 옅은 적갈색이 된다. 포도 껍질이 두꺼운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말벡 등의 품종은 포도 껍질이 얇은 피노 누아 등의 품종에 비해 색이 진하다. 이 와인은 보랏빛이 도는 진한 적색이라, 빈티지가 오래되지 않은 보르도 품종의 와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잔에 코를 박고 향을 들이마신다. 블랙베리와 자두 등의 과일향과 더불어, 고급스러운 오크 바닐라향이 강하게 치고 올라온다.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으니, 향에서 기대했던 복합적인 맛보다는 다소 단순한 느낌을 선사한다. 부드러운 질감을 가졌으나 다소 묽게 느껴지고, 와인을 삼킨 후 입안에 남는 여운 또한 짧다.

때려 맞추듯 답을 찾아야 하나?


▎에드문드 드 로스칠드 남작이 1973년에 매입한 샤토 클락(Chateau Clarke). 필자는 보르도 우안의 가라지 와인으로 ‘착각’했다.
“형님, 어떻습니까?” 후배가 장난기 서린 얼굴로 물어본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먼저 레드 와인 품종들을 떠올려본다. 색에서 힌트를 얻어, 껍질이 두꺼운 품종들을 차례로 연상해본다.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시라, 말벡, 피노타지… 검은 베리와 과일의 느낌을 주면서도 질감이 부드러워 메를로 품종으로 만든 와인인 듯 하다. 품종 다음으로는 생산지역을 생각해본다. 미국, 호주, 남미,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신세계 와인들은 기후가 유럽에 비해 온화해서 당도와 알코올이 다소 높은 편인데, 그런 느낌은 없다. 유럽,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보르도 지역인가? 메를로를 주요 품종으로 사용했다면 보르도 우안(右岸; 보르도를 가로지르는 지롱드 강의 북쪽)인데, 미디엄 바디에 피니쉬가 짧은 것으로 봐서는 우안의 좋은 마을이나 샤토는 아닌듯 하다. 그렇지만 최고급 와인에서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바닐라 오크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혼란스럽다.

생각의 흐름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자, 이 후배가 과거에 시음을 권했던 와인들을 떠올리게 된다. 주로 프랑스의 이름난 최고의 와인들을 권했었다. 보르도 좌안(左岸; 지롱드 강의 남쪽)의 1등급 그랑크뤼인 샤토 라투르(Chateau Latour)도 있었고, 우안의 가라지(garage)와인인 르 돔(Le Dome)이나 샤토 라플레르(Chateau Lafleur)도 있었다. 이번에도 최고급 와인으로 나를 놀라게 해주는 것이겠지? 아니야, 또 다른 우안의 가라지 와인이 아닐까? 거친 타닌과 짧은 피니쉬는 아마도 이 병의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서 생기는 예외적인 현상(bottle variation)이 아닐까. 와인 시음으로 내린 평가와는 무관하게, 때려 맞추듯 답을 찾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거 보르도 우안의 가라지 와인인거 같은데? 그런데 상태가 별로 좋지 않네. 묽고 피니쉬가 짧은 게 말이야.” 후배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그래요? 그럼 이 와인은 얼마면 사시겠어요?”

노리던 먹잇감을 낚아챈 눈빛으로 후배가 되묻자, 뭔가 꼬였다는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물러서기에는 이미 늦었다. “한 20만원?”

‘착각’ 이라는 말에 얼굴이 화끈해져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후배가 와인 병을 의기양양하게 꺼내 보였다. 처음 보는 와인이었다. “형님, 이 와인은 샤토 라피트 로스칠드(Chateau Lafite Rothschild)를 소유하고 있는 에드문드 드 로스칠드 남작이 1973년에 매입한 샤토 클락(Chateau Clarke)이예요. 보르도 우안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좌안의 리스트락- 메독(Listrac-Medoc) 마을에서 생산된 와인이고요.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품종을 블랜딩했는데, 메를로 비율이 일반적인 보르도 좌안 와인들보다 높아서, 우안 와인으로 착각할 수 있어요. 가격은 소비자가격이 대략 8만원 정도이구요.”

‘착각’이라는 말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래? 그런데 고급스러운 이 바닐라 오크의 느낌은 뭐지?”살짝 상한 자존심에, 항변이라도 하듯 한마디 물었다. “그건 로스칠드 남작이 샤토 클락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고급 오크를 썼기 때문이예요. 심지어 샤토 라피트 로스칠드 와인을 만들 때 사용했던 오크 배럴을 가져다가 샤토 클락의 와인을 만들 때 썼다는 얘기도 있어요.”

아뿔싸. 그랬구나. 어느 한 부분에 집착을 하다 보니, 전체적인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와인의 정체를 감추고 시음하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의 목적은, 모든 선입견을 배제한 체 그 와인의 객관적인 품질을 평가하는 데 목적이 있다. 특정 생산자나 지역, 또는 연도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와인을 시음하게 되면 아무래도 평가를 하는데 선입견이 작용하게 된다. 와인에 대해 갖는 편견과 선입견을 실험하기 위해, 어느 연구소에서 와인전문가들을 모아놓고 화이트 와인을 한잔씩 시음하게 했다. 와인의 맛과 향을 표현해보라는 주문에, 와인전문가들은 “레몬, 아카시아, 복숭아” 등 화이트 와인의 특징들을 거론했다. 그리고는 몰래 같은 화이트 와인에 무색무취의 붉은 색소를 타서, 실험대상인 전문가들에게 다시 시음하게 했다. 그랬더니 이 전문가들은 “딸기, 체리, 자두” 등 레드 와인의 특징들을 열거하며 와인을 표현했다. 시각을 통해 레드 와인이라고 인지함에 따라 선입견이 생겨서, 객관적으로 와인을 파악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는 어떤 와인인지 맞추고 못 맞추고는 중요한 게 아니야. 객관적으로 품질을 평가하는 것이 목적이야.” 이렇게 스스로를 위안해 보지만, 나를 속여 즐거워하던 후배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블라인드 테이스팅, 참 어렵다.

이석우 - 카카오 공동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중앙일보 조인스 공동대표 겸 디지털제작 전략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번역서 『와인력』을 출간한 와인 마니아다.

201608호 (2016.07.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