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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가 만난 사람(2) 박종규 KSS해운 고문 

“전경련이 사는 길? 바른경제동인회를 보라” 

나권일 기자 na.kwonil@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대통령 탄핵정국으로 해묵은 정경유착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르면서 전경련 해체론까지 일고 있다. 하지만 한국 재계가 늘 흙탕물 투성이였던 것만은 아니다. 일찍부터 비자금 한푼 만들지 않고 투명경영을 실천해온 기업인들도 적지 않다. 박종규 사단법인 바른경제동인회장(82)이 대표적 인물이다.

▎박종규 회장은 나이답지 않게 목소리도 굵직했고 말투도 시원시원했다. 알고보니 11년 전에 위암진단을 받고 제주도에서 요양해 완치된 의지의 오뚝이 인생이었다.
벌써 23년 전 얘기다. 1994년, 당시 시민운동을 주도하던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한 행사장에서 박종규(朴鐘圭) 회장을 처음 알게 됐다. 경실련이 ‘군보다 힘이 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위세를 떨칠 때다. 현재 정·관계와 재계를 주도하고 있는 인물들이 당시 앞다투어 경실련에 참여하거나 후원했다. KSS해운 창업자인 박종규 회장도 드러나지 않게 경실련을 후원하던 ‘큰 손’들 중 한 명이었다.

박 회장은 단순한 후원에 그치지 않았다. 1993년에 30명의 회원을 모아 재경부 산하 사단법인 바른경제동인회 창립을 주도했다. 당시 박 회장이 초대 이사장을,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김정문 알로에 회장, 윤창의 광림기계 회장, 이맹기 대한해운 회장, 최태섭 한국유리 회장 등 기업인들이 다수 참여했다. 창립 이후 24년째 바른경제동인회가 안팎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제 몫을 하고 있는 데는 창시자인 박 회장의 역할이 절대적이었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회장은 비자금 안 만드는 기업인으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박 회장의 강단 있는 발언 수위를 낮추게 하려고 국세청이 이 잡듯이 세무조사를 벌였지만 매번 이렇다할 트집거리 하나 잡지 못하고 두 손을 들었다. 창업 과정에서부터 리베이트 없고 비자금 없는 투명·정도경영 정신을 강조해온 그는 자녀에게 기업을 물려주지 않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약속해 실천해오고 있다.

바른경제의 창시자이자 윤리경영의 선구자격인 그에게 위기에 빠진 한국 재계가 사는 길을 묻고자 했던 이유다. 박 회장과의 만남은 1월13일 서울 서초동 바른경제동인회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길을 잃은 한국 재계의 리더들에게 방향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가능한 한 박 회장의 육성을 그대로 살렸다.

전경련을 해체하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전경련이 크게 달라져야 한다고, 내가 그렇게 오래전부터 주창해오지 않았나! 해체하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스스로 개혁을 했어야 하는데… 전경련이 할 일은 간단하다. 이제라도 비자금 안 만들겠다고, 로비단체 안하겠다고 국민 앞에 선언하라. 국가경제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경제를 생각하는 전경련이 되겠다고 공개 결의하라. 정경유착은 불공정 거래다. 불공정 거래해서 돈 벌면 존경받지 못한다.

전경련, 당장 투명경영에 앞장서라

전경련 개혁이 왜 중요한가.

정치권과의 유착을 만들어낸 근원이 전경련이다. 전경련이 정경유착을 끊어야 나라에 희망이 있다. 이제는 정말 제대로 된 보수가 자리잡아야 한다. 정치권의 압력이 아니라 전경련 스스로 바뀌어야 나라 경제가 바뀐다.

박 회장은 전경련을 질책했지만 애정까지 거둔 것은 아니었다. “힘들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허창수 전경련 회장이 발을 빼면 안된다. 전경련을 개혁하라는 시대적 요구를 외면하고 그냥 물러나서는 안된다.”는 주문도 했다.

전경련은 왜 그동안 내부 개혁에 소홀했을까.

기업가정신이 사라졌다. 2세, 3세로 이어지면서 편하게 기업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요즘 보면, 카지노 사업에 뛰어들고 면세점 진출하려고 서로 경쟁하지 않나. 나라 경제를 이끄는 기업인은 그냥 사인(私人)이 아니다. 도덕관념, 공공성이 있어야 한다. 기업을 투명하게 경영하고 심신이 깨끗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못해서 비자금을 만들고 그러다 코가 꿰인다. 기업들이 왜 전문경영인에 못 맡길까? 투명하지 않으니 남에게 맡길 수 없는 것이다. 기업들 속사정이 그렇다. 구린 데가 있으면 경영자가 노조에 끌려 다니게 돼있다. 투명경영, 정도경영해야 기업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정부 간섭도 막을 수 있다. 이것이 바른경제동인회가 지난 24년 동안 목 아프게 주창해온 운동이다. 그러니 전경련은 우리 바른경제동인회만큼만 하라.

바른경제동인회가 투명경영을 위해 공헌한 사례를 들려달라.

가장 큰 일이 신용카드 활성화를 위해 공제제도를 도입하도록 한 것이다. 투명사회를 이루려면 사회 전체에 투명한 기운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탈세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신용카드 사용자에게 세금 인센티브를 주자고 정부에 제안했다. 6년을 한결같이 신용카드 사용을 활성화하자고 정부를 설득했다. 1999년 1월에 우리가 공청회를 열었고, 그해 8월에 법이 통과됐다. 세금 공제제도를 만들어놓으니 신용카드가 활성화됐고, 그 덕택에 소비가 늘고 세수가 늘었다. 투명사회로 가는 진일보가 이뤄졌다.

정부가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생각 버려야

김대중 정부 때 도입한 신용카드 공제 제도는 바른경제동인회의 물밑 노력이 빛을 발한 사례다. 나중에 마구잡이 신용카드 남발로 ‘카드대란’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것은 “신용카드사들의 과열 영업이 초래한 것이지 정부 탓만은 아니다”라는 게 박 회장의 주장이다. 박 회장은 김영삼정부때 노사관계개선위원회 위원, 김대중정부때 행정개혁시민연합 공동대표, 이명박정부때 규제개혁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은 경제원로다. 사회개혁에 관심이 많은 그는 현실참여에도 남달랐다. 그런 점에서 박 회장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기업과 사회에 변화와 개혁을 주문하는 것만큼 정부 역시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정부와 기업의 관계도 달라져야 한다고 보는데.

정부가 특정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것은 ‘구시대적 사고’다. 그동안 IT산업 육성이니 서비스 산업 육성이니, 창조경제니 말이 많았는데, 국민세금으로 특정산업을 육성하겠다고 하면 반드시 부패가 따르게 돼있다. 돈 준다는데 싫어할 사업가가 있겠는가? 정부의 육성정책은 아까운 국민 세금을 낭비하고 지원 혜택을 못 받은 기업인들의 의욕과 창의력만 떨어뜨릴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정부는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규제만 없애주고 간섭하지 말라. 지켜보다가 업계에서 의견을 모아오면 그때 가서 지원하면 된다.

백발의 박 회장은 굵직한 목소리에 말투도 시원시원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의지의 오뚝이 인생이다. 71살 때 위암 말기 진단을 받자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제주도 산간지역으로 내려갔다. 마음을 비우고 맑은 공기 마시며 자연과 더불어 즐겁게 살다보니 시나브로 완치됐다고 했다. 강한 신념을 가진 기업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박 회장이 펴낸 저서가 『손해를 보더라도 원칙은 지킨다』이다. 자서전은 그 사람의 얼굴이라는 점에서 그 캐릭터와 인품을 능히 짐작할만하다. 한국CEO그랑프리 아름다운 CEO상 수상(2006), 인간상록수 선정(2011), 한국의 기업가정신 대상 수상(2015)에서 보듯 기업인으로서도 단연 귀감이다.

일찍부터 투명경영을 실천해 오셨다고 들었다.

내가 물러난 뒤 KSS해운은 전문경영인이 3대째 CEO를 맡고 있다. 나는 대주주일 뿐 회사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새로운 사장에게 인사권과 자금 집행권을 넘겨주고는 아예 제주도로 이사를 해버렸다. 대주주가 회사에 나오면 직원들이 자꾸 내 눈치를 보게 된다. 직원들에게 내 얼굴이 안보여야 전문경영인이 소신껏 일을 할 수 있다. 자식이 셋 있지만 모두 해운사업과는 관계가 없다.

박종규 회장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공기업이었던 대한해운공사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이후 1970년 1월 한국특수선(KSS해운의 전신)을 설립했다. 코스피 상장사인 KSS해운은 가스화물과 케미칼화물 운송에 집중해 해운업 불황에도 흑자경영을 하고 있는 알짜 기업이다. KSS해운은 여느 기업과 다른 제도가 많다. 사장 입후보나 선거운동이 없다. 그리고 노사분규가 없다. 또 하나, 성과급제를 도입했지만 인사고과에 반영할 뿐 임금의 차이는 없다고 했다. 그 이유가 뭘까.

KSS해운만의 특별한 시스템이 있다고 들었다.

경영에서 물러나면서 사장 선출을 시스템화했다. 사외이사 4명과 직전 사장, 창업자가 추천하는 1인, 사주조합 추천인 1인 등으로 사장 추천위원회를 구성했다. 사장 선거 입후보나 선거운동은 금지시켰다. 입후보제도를 만들면 사내에 파벌이 생긴다. 파벌이 생기면 조직 내부가 융합이 안되고, 반대세력이 비토하거나 회사를 나가게 된다. 노조가 사장을 추천하는 것도 금지했다. 노조가 사장을 추천하면 인기에 좌우되기 십상이다.

비자금 안 만들고 노사분규 없는 KSS해운


▎창립 이후 지금까지 바른경제동인회를 이끌어온 박종규 회장은 일찍부터 투명경영을 실천해온 윤리경영의 선구자격이다.
노사분규가 없는 이유는.

KSS해운 노조도 임금협상을 한다. 그런데 매년 노조가 회사 측에 임금 문제를 다 일임한다. 그게 연례 행사가 됐다. 그러니 회사에서는 오히려 노조에 더 잘해주려고 애쓴다. KSS해운 회계는 매년 총무부장이 결산해서 공인회계사의 감사를 받아 이사회에 보고한다. 회계가 투명하니 굳이 분식회계 할 필요가 없다. 투명하게 경영하고, 해먹는 사람이 없으니 대내외적으로 약점 잡힐 일이 없다. 자연히 노사화합이 된다. KSS해운은 성과급제를 하지만 급여가 아니라 인사고과에만 영향을 준다. 사람은 마음으로 붙잡아야지, 돈으로 붙잡으려 해서는 안된다. 돈으로는 오래 가지 못한다.

박 회장은 지난해 제5대 바른경제동인회장에 취임했다. 경영일선에서는 은퇴했지만 경제정의를 위한 전선에서는 ‘영원한 현역’이다. 그가 노후를 불태우며 하고 싶은 일은 뭘까?

바른경제동인회가 앞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은?

투명경영을 입으로만 말하지 않고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 회사에서 먼저 실천하고 있는 제도가 ‘이익연동제’다. 이익이 많이 났으면 임직원에게 상여금을 더 주고, 적게 나면 적게 주는 것이다. KSS해운이 이익연동제를 실시한 첫해는 200억 흑자가 나서 20억원이 지급됐다. 두 번째 해는 더 잘 되어서 26억원의 이익을 냈다. 요즘 노동계가 성과급제 반대로 교착상태에 빠져있는데, 이익연동제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기업들이 이익연동제에 동의할까.

이익연동제를 하면 기업이 비자금을 만들 수 없게 된다. 비자금 만들면 직원들 이익이 줄어드는데 그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자연히 투명경영할 수 밖에 없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과거 정부의 카드 활성화 대책처럼 세제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이익연동제를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직원들 입장에서도 세금이 절약되니 찬성하는 방향으로 갈 것으로 본다. 문제는 기업이다. 일부 경영자들의 의식구조 속에는 아직도 리베이트 없으면 사업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이런 사고가 기업 임직원들을 비자금 만드는 공범으로 만들어낸다.

한국 증시가 세계적으로 저평가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범은 바로 한국 특유의 정경유착의 산물인 재벌 구조라는 게 외국 투자자들의 시각이다. 어찌보면 지금 한국의 대기업들은 진정한 글로벌 스탠다드를 확립할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물론 그 선택은 당연히 기업들의 몫이다.

- 나권일 기자 na.kwonil@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201702호 (2017.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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