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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베이징·상하이가 보여준 컬처 파워 

서에서 동으로 간 ‘예술품’ 

박지현 기자
전 세계에서 미술품을 사려는 인구는 크게 늘었다. 1950년대 50만 명에 불과하던 문화 소비자는 2017년 9000만 명으로 180배나 늘었다. 중국도 가세했다. 그 덕분에 중국 미술시장 규모는 20조원대로 급성장했다. 예술품은 공산품과 전혀 달라 일종의 ‘나눠 먹기’다. 그 때문에 유럽 미술시장은 더 쪼그라들었다.

▎중국 현대미술에 한 획을 그은 작가들 작품들. - 웨민쥔, 2003, [가비지힐(Garbage Hill)],199x278.5㎝ / 사진:ARTNeT,
#1. 1532억원. 지난해 12월 중국에서 치바이스(齊白石)가 1925년에 그린 [산수12조병(山水十二條屛)]이란 작품의 경매 낙찰가다. ‘중국의 피카소’라 불리는 그의 작품은 중국 미술품 경매 역사상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경매 시작가는 4억5000만 위안(약 765억원)이었고, 이내 호가는 두 배 이상 치솟았다. 이보다 앞선 2011년 치바이스의 [송백고립도·전서사언련]이라는 작품도 700억원 넘는 가격에 낙찰됐다. 당시 낙찰가는 같은 해 팔린 피카소·클림트 작품의 가격을 넘어선 수치였다.

#2. 1조원. 지난 3월 말 사흘 동안 아시아 최대 아트페어인 홍콩 아트바젤에서 거래된 미술품 거래 액수다. 32개국 247개 갤러리가 참가했고, 관람객만 8만여 명이 몰렸다. 스위스 아트바젤이 인수하며 아시아 최대 아트페어로 떠오른 홍콩 아트바젤은 6년 만에 국제 미술계에 거물로 떠올랐다. 관련 업계에선 “스위스 바젤을 비롯한 유럽의 예술품 거래시장은 ‘진짜’ 거래되는 시장이라기보다 이벤트성 행사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며 “실제 거래 규모도 줄었고, 매출도 정체된 상황이다”고 했다.


▎팡리쥔, 2007, [무제(Untitled)], 56x76㎝ / 사진:ARTNeDITION
최근 미술시장의 흐름이다. 지난 10년간 미술시장 판도는 서구에서 아시아로 옮겨갔다. 특히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은 미술시장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 베이징, 상하이 중심이었던 중화권 미술 경매시장은 홍콩이 가세하면서 전 세계 미술 경매시장에서 34%(2016년 기준)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세계 최대 시장으로 성장한 중화권 시장은 2006년만 해도 점유율 5%에 불과한 변두리 시장이었다. 갑자기 커진 중국 시장은 한국과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2016년 중국 근대화가 장다첸(張大千)의 작품이 기록한 한해 낙찰총액만 3973억원, 반면 한국은 한해 전체 미술품 경매금액이 1720억원에 그쳤다. 중국 작가 한 사람이 거둔 경매 낙찰가가 한국 시장 전체보다 2.5배나 큰 셈이다.

심지어 장다첸 같은 이가 한둘이 아니다. 세계미술시장정보업체 아트프라이스(Artprice)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상위 100대 예술가 중 중국 작가는 장다첸을 비롯해 18명이나 됐다. 세계 3대 디자인 상 중 하나인 ‘2017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중국 기업은 대상을 비롯해 각종 디자인상 142개를 휩쓸기도 했다.


▎쩡판즈, 2001, [최후의만찬(The Last Supper)], 220x395㎝ / 사진:HUFFINGTONpOST.cOM
중국 미술시장은 미국을 넘어섰다. 2017년 세계 1위였던 미국 미술시장은 중국에 1위 자리를 내줬고, 매출도 51억 달러를 기록해 미국(50억달러)을 앞질렀다. 미국이 42%나 급성장했지만, 규모 면에서 중국을 물리치긴 어려웠다.

중국 덕분에 아시아 시장은 큰 축이 됐다. 구매력도 상당하다. 지난해 미국 소비자들이 예술품 구매를 전년보다 22% 늘린 반면 예술품을 구매한 아시아 소비자는 39%나 늘었다. 해외에 나가서도 통 큰 소비를 보여줬다. 미국 크리스티 경매에 따르면 2017년 100만 달러 이상 지출한 전 세계 예술품 구매자 중 40%가 아시아 지역에서 나왔다.

아시아 작가들도 잘나간다. 연간 경매 매출로 따져본 세계 상위 500대 예술가 순위에서도 아시아(33%)가 유럽 뒤를 바짝 쫓으며 2위에 올랐다. 16.4%를 기록한 미국은 3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평가절하 당했다. 아트프라이스 측은 “지난해 크리스티 경매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살바토르 문디:구세주]가 5000억원에 낙찰돼 미국 전체 매출에 기여한 바가 크다”며 “예술계에서 중국 시장 성장에 더 주목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경매 회사 역시 거래량 면에서 중국이 앞선다. 중국 폴리옥션이 밝힌 2017년 공개 경매 매출액(베이징, 상하이, 홍콩)은 전년 대비(22%) 23% 증가하며 세계 3대 경매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또 다른 중국계 경매사인 차이나가디언도 39%나 성장하며 11억 달러에 가까운 매출을 거뒀다.

중국의 억만장자 수 미국 앞서


반면 유럽 시장은 쪼그라들었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주도한 유럽 미술시장은 2007년 세계 미술 거래시장의 67%를 차지할 정도로 막강했다. 하지만 금융위기 여파로 당시 개관한 갤러리 중 90%가 문을 닫으며 매출도 반토막이 나버렸다.

중국 파워는 이미 예견된 바 있다. 예술품 시장에서도 중국발 ‘인해전술’은 통할 거라 봤기 때문이다. 지난해 중국 국가위생계획생육위원회가 발표한 ‘중국인구조사결과’에 따르면 중국인 중 초고액 순자산 보유자(부동산을 제외한 순자산 가치가 3000만 달러이거나 그 이상인 사람)는 1만4310명이다. 즉 중국 전체 인구 기준 10만 명당 1명이 슈퍼리치로, 미국 뉴욕보다 중국 베이징에 더 많은 억만장자가 산다. 중국 부자연구소로 알려진 후룬연구소도 중국 억만장자는 568명으로 미국(535명)을 앞섰다고 봤다. 중국 ‘큰손’이 늘어난 만큼 미술시장 데이터도 이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단순히 경제 규모가 커져서만은 아니다. 중국인의 예술적 본능을 일깨운 계기가 있었다. 중국 미술시장이 꽃을 피운 때는 문화혁명 이후다. 1976년 마오쩌둥이 죽고 나서 억압받던 화가들의 예술적 의지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1985년 중국의 첫 독립 예술잡지 ‘중국 미술보’가 출간되면서 청년 예술가들은 자신의 경험과 감정, 실패를 표현하려는 욕구를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억압으로부터의 탈피는 마치 서양의 현실비판주의와 같은 기류와 맞물려 ‘상흔 미술’이라는 양식으로 발전한다. 중국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꼽히는 팡리준, 쟝샤오강, 쩡판즈, 웨민쥔 등도 이런 혁명 미술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해외 컬렉터들도 중국 시장에 맞추려고 나섰다. 유럽과 미국의 컬렉터들은 중국인 취향을 의식해 ‘혁명 미술’과 유사한 인상파, 현실비판주의의 대표 작품들을 모아 중국 시장에 내놓고 있다. 중국 작가와 20년 전부터 교류한 프랑스 실뱅과 도미니크 레비 부부는 중국 현지인들이 관련 계통의 유럽 쪽 작품을 볼 수 있게 90여 개 컬렉션과 제휴한 사이트를 열었다.

중국 시장이 성장할 여지는 아직도 크다. 미술품 거래시장을 분석하는 UBS 자산운용에 따르면 중국에서 순수미술 계통 작품의 거래 성장세는 3%에 불과했다. 반면 도자기나 기타 장식미술은 36%나 증가했다. 서진수 강남대 경제학과 교수 겸 미술시장연구소장은 “중국을 단독 로컬 시장으로 보기보단 EU처럼 지역적 시장으로 봐야 한다”며 “미술품뿐만 아니라 공예, 우표, 동물의 뼛조각까지 예술품으로 거래되는 곳이 바로 중국”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정부도 급성장하는 수요에 따라 규제 완화 정책에 나섰다. 중국 문화재청은 2016년 문화재 판매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미술품 경매 허가 신청 절차를 간소화한 문화재 경매 관리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후발주자 홍콩, 아시아 ‘천하통일’


▎홍콩 페더 빌딩에는 유수의 갤러리들이 입주해 있다. 가고시안 갤러리.
눈에 띄는 건 후발주자 홍콩의 가세다. 홍콩에서는 유럽에서 상륙한 갤러리와 경매사 주도로 미술시장이 형성됐다. 유럽 갤러리들은 홍콩의 잠재력에 주목했다. 홍콩의 금융지구도 탈바꿈했다. 기업 사무실로 쓰이던 페더 빌딩은 2009년 영국 벤브라운을 시작으로 사이먼리, 리먼모핀, 한아트TZ, 펄램 가고시안 등 유명 갤러리들이 둥지를 틀었다. 이곳은 3.3m²(1평)당 수백만 원을 웃돌아 금융회사들도 버티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 기반 경매사들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홍콩에 진출한 영국 경매사 필립스의 2017년 홍콩 내 매출만 전년 대비 13% 증가했다. 홍콩 수요자 43%가 필립스 경매를 이용하며 아시아 고객이 늘어서다. 2015년 이후 필립스 경매에 참여한 아시아인은 전 세계적으로 133% 정도 늘었다.

1997년 7월 홍콩은 중국에 반환된 뒤 베이징, 상하이와 경쟁해왔다. 그리고 예술은 새로운 자본 유입의 기폭제가 된다. 1999년 주룽(九龍)반도에 미술관, 공연장 등 17개 문화시설을 갖춘 문화지구(WKCD)를 지었다. 2047년까지 중국의 특별 행정구로 자유를 보장받아 중국 본토와 달리 미술품 거래에서 면세정책을 유지했다. 홍콩은 중국 본토로 진출하려는 외국 갤러리들의 교두보로 중국은 본토는 물론 인도·호주·일본·한국 고객까지 끌어들였다. 서 교수는 “홍콩은 영국 식민지였던 영향으로 영어권 문화에 친숙하고, 미술품 거래에 비과세 정책(비거주자는 0.5%)을 취한다는 장점이 있다”며 “유명 경매사, 아트페어, 갤러리들이 대거 홍콩에 진입한 건 글로벌 거래시장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물론 중국 시장을 보는 눈이 곱지만은 않다. 지나치게 경매 시장 중심으로 쏠려 있기 때문이다. 미술시장은 기본적으로 갤러리, 아트페어, 작가 스튜디오, 아트딜러 등이 판매하는 1차 시장과 경매·아트펀드의 2차 시장으로 구분된다. UBS에 따르면 중국 경매 미술 시장은 2017년 전체 미술품거래 중 70%를 차지했다. 경매 거래액만 132억 달러다. 한 갤러리 관계자는 “1차 시장이 활성화돼야 더 건강한 거래 시장인데 중국은 경매에 편중돼 있다”며 “중국이 경매를 선호하는 이유는 1차 시장을 믿지 않는 데다 경매 기록을 매우 중시하는 경향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중국 미술시장의 또 다른 복병은 경매에 낙찰된 입찰자의 지불 지연·불능이다. 실제 관련 규정들이 있음에도, 지난 3년간 경매에서의 미납 비용 비율은 증가했다.

중국 시장 확대, 그리고 엇갈린 시선


▎지난해 말 1500억여원에 낙찰돼 중국 경매 시장에서 최고가를 기록한 치바이스 작품 [산수12조병]. / 사진:신랑망
그래도 지금 시류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한한령(限韓令)으로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한중 작가들의 전시가 재개될 전망이다. 정우범, 전광영, 이이남 등 국내 작가들의 중국 진출도 잇따르고 있다. 국내외 갤러리의 중국 작가 유치전도 치열하다. 미국의 페이스갤러리 서울점은 중국 전속작가 송둥을 통해 한국 미술계에 알린다는 전략이다. 한국 아라리오갤러리도 쑨쉰과 가오레이 개인전을 열었다.

박은주 아트 컨설턴트는 “미술시장은 작가·갤러리·박물관·재단·아트 센터·컬렉터 등의 역할이 촘촘히 얽혀 있다”며 “이 요소가 충족되는 곳이 홍콩, 베이징, 상하이다”라고 말했다. 또 “인류의 발전이 예술에 기초한 철학에 기반한 것처럼 중국시장의 성장도 미국,유럽처럼 예술을 향유하고자 하는 인구가 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서진수 강남대 경제학과 교수 겸 미술시장연구소장도 공감하며 중국 미술시장의 확대는 이제 시작이라고 했다.

“경기 변동은 10년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작품 실거래가의 변동은 있을 수 있죠. 하지만 큰 추이로 보면 미술시장의 수요는 아시아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자본이 최우선인 중국 미술시장은 거래 3주체(공급자, 시장, 수요자)를 한 방향으로 모으며 빠르게 성장할 수밖에 없거든요.”

- 박지현 기자 centerpark@joongang.co.kr

201805호 (201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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