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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조직에 디지털 문화 불어넣기 

 

이진원 기자 lee.zinone@joongang.co.kr
기업문화는 바람과 같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향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조직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기업문화가 구축된 때는 강력한 추진력을 받을 수 있지만, 맞서 나가야 한다면 모든 일이 복잡하고 어려워진다.

▎장루이민 하이얼 회장의 ‘인단합일’ 실험은 획기적 디지털 경영혁신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6월 11일 칭다오에서 열린 보아오포럼에서 기조연설하고 있는 장루이민 회장.
스웨덴의 전자제품사 일렉트로룩스의 조나스 사무엘 손 대표가 취임했을 때 디지털 조직문화를 구축하여 혁신과 성장을 도모하고자 했다. 하지만 100년 역사의 이 기업에 실리콘밸리식의 업무방식을 도입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5만5000명 임직원에게 70시간 근무를 요구할 수 없을뿐더러 대량의 스톡옵션을 제공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기존에는 핵심기술이었지만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해서 숙련기술자들을 해고하는 등의 유연성을 갖추기도 어려웠다. 일렉트로룩스는 소프트웨어가 아닌 전자제품을 제조하고 소비자들은 제품이 지속적으로 생산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에 사무엘손 대표가 기존 프로세스와 제품을 다시 디자인하는 데는 장애물이 많았다. 사무엘손 대표는 일렉트로룩스가 쌓아온 경쟁력을 유지하면서도 비즈니스 모델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디지털 전환이란 시대적 압박 속에서 전통 기업의 경영진이 가진 고민은 일렉트로룩스의 상황과 비슷할 것이다. 국내 기업들의 경우 디지털 전환에 대한 필요성을 갖고 있으나 아직 실행에 나서지 못하고 있거나 비용효율성과 생산성 개선 수준에 그치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디지털 전환 영향력 및 준비도 보고서(CA테크놀로지, 2018)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은 업무, 조직, 산업 등에 미칠 디지털 전환의 영향을 중국, 일본 등 아태지역 다른 국가들보다 더 높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산성 향상이나 수익 증대 차원에서 도입하고 있는 비중이 52%에 달해 주로 운영전략 차원에서 추진 중이었다. 운영 프로세스 재설계부터 신규 비즈니스 모델 개발까지 조직 전반에 걸쳐 완전한 디지털 전환 사업을 고려 중인 기업은 12%에 불과했다.

“갖은 시행착오 통한 학습이 성공의 토대”


디지털 전환 여정을 시작하려면 기업 문화가 디지털 이니셔티브를 지원할 수 있을 정도로 강건해야 한다. 그리고 디지털 혁신 문화를 강화화기 위해 인내심, 전략, 견고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일렉트로룩스 사무엘손 대표가 가진 고민의 해법을 중국 백색가전 제조사 하이얼에서 찾을 수 있다. 장루이민 하이얼 회장은 전통적 제조 및 물류 프로세스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민첩성과 혁신을 추구하기 위해 기업문화를 바꾸는는 데 수년간 공을 들었다. 장 대표가 도입한 인단합일(⼈单合⼀)은 기존의 경영 기법에서 찾을 수 없는 획기적인 경영혁신 사례로 평가되며 전 세계 경영학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하이얼의 디지털 전환은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성공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인단합일은 직원과 고객 간 거리를 제로화한다는 의미다. 하이얼은 인단합일을 실현하기 위해 조직을 초소형 기업(Micro Enterprises)의 집합으로 구축했다. 즉, 중국 내 5만 명 직원을 10~15명 단위의 스타트업 4000여 개로 쪼갰다. 장 회장은 서구의 선진 경영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 했으나 실리콘 밸리 IT 기업들의 최신 경영 기법이나 전통적 대기업의 경영 기법 모두 하이얼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신의 경영 철학에 영감을 준 노자, 피터 드러커 사상을 기업 문화에 녹이는 실험을 했고, 디지털 기술과 융합해 인단합일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 결과 디지털 기술을 사용해 제품군을 다양화하고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최적화해 소비자와의 거리를 줄이고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 나갈 수 있었다. 하이얼은 ‘이용자 중심 대량 맞춤화’(user-centric-mass customization) 플랫폼과 클라우드 기반 예측 유지보수 프로그램 등 모든 주문에서 제조까지 전 비즈니스 영역에 인공지능을 활용하고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하이얼의 디지털 문화로의 전환은 크게 두 가지 축으로 나뉜다. 첫째 ‘HOPE(Haier Open Innovation Ecosystem)’라는 공동체관리 시스템이다. 이는 혁신 생태계 구성을 위한 것으로 내부 임직원, 고객, 공급업체로 구성된 67만 명이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함께 모색한다. 직원들은 부서와 상관없이 제품 디자인 토론에 참여하여 고객, 공급업체로부터 수집한 피드백을 기반으로 발명과 제조과정에 영향력을 끼친다. 이러한 집단지성을 통해 새 비즈니스가 제안되고 테스트 과정을 시작한다. 둘째, 임직원의 자율성과 보상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실적에 따른 보상을 확대했고, 성공적이라고 평가된 아이디어를 제공한 직원에게는 프로젝트 주도권을 제공하며 선임 직책으로 승진시킨다. 반면 성과가 없는 리더를 교체할 수 있는 권한도 직원들에게 부여했다.

하이얼이 기업문화를 정비하고 디지털 기술 도입을 완료한 시점인 2014년경의 실적 성적표는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온라인 거래 매출 전년 대비 2391% 증가. 글로벌 매출 11% 증가, 영업이익 39% 증가를 기록했다. 실제 하이얼이 구축한 디지털 문화는 디지털 전환 성공을 이끈 열쇠였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이 40여 건의 디지털 전환을 평가한 결과, 디지털 문화를 강조한 기업(90%)이 이를 무시한 기업(17%)보다 5배 많이 획기적 재무성과를 거두며 디지털 전환에 성공했다.

전략·조직 분야 전문가인 마이클 터시먼 하버드대학 교수는 “불확실성을 감내하며 갖은 종류의 시행착오를 통해 고생스럽게 학습하는 것이 오히려 성공의 토대가 된다”고 주장한다. 요약하자면 강력한 디지털 기술 도입에 앞서 기업은 필수적으로 속도, 유연성, 혁신 지향성 등 디지털 백신을 기존 문화에 접종해 면역력을 갖춰야 충격과 혼돈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문화를 조직 내에 퍼뜨리는 방법론은 여러 가지다. 예를 들어 로레알은 최고디지털책임자(Chief Digital Officer)를 영입하여 각 사업 부서에 디지털 전문 기술을 제공하는 팀을 이끌면서 전사적 디지털 우선 문화를 확산했다. 어도비시스템즈는 연례 성과관리 평가제를 폐지하고 소단위 목표에 중점을 둔 실시간 ‘피드 포워드’(Feed Forward, 실행 전에 결함을 예측하고 행하는 피드백 과정의 제어 방식) 세션으로 대체했다. 브리티시가스는 스마트워킹을 위해 협업 플랫폼 ‘야머’를 도입해 직원들이 칭찬과 모범 사례를 공유하며 공동 작업의 기반을 확대하게 했다.

한동안 기업에서도 강조됐던 감정지능(EQ)에 이어 최근 디지털지능(DQ)이 강조되고 있다. D Q 진단에서 높은 점수를 얻은 회사들은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주로 활용되는 실험-학습(Test-and-Learn) 접근을 통해 혁신적 디지털 문화를 창출했다. 강한 디지털 리더십 아래 실험-학습 방식은 자동화, 모니터링, 공유 및 협업을 통해 기존에 분리돼 있었던 기능과 프로세스를 민첩하게 작동하는 혁신 지향 문화로 성장시킨다. 디지털 문화는 의사결정 구조, 프로세스, 파트너 관계, 자원할당, 보상 등에서 조직구조 자체를 변화시키고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한다.

MIT 슬로언 경영대는 전통적 기업 조직에 디지털 문화를 불어넣기 위한 프레임 워크를 연구하고 있다. 디지털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네 가지 가치를 충격, 속도, 개방성, 자율성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 가치들을 임직원이 이해하는 단계부터 디지털 문화 도입을 시작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MIT 슬로언은 500개 전통 및 디지털 기업 연구를 통해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 디지털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 디지털 문화의 가장 큰 장점은 혁신을 창안하고 테스트하는 속도다. 기존 조직이 가진 신중하고 긴 시간이 소요되는 의사결정 구조에서는 이 방식이 낯설 수 있다. 그럼에도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의사결정 틀 안에서 조직적이며 신속한 실험 습관이 길러져야 한다.

둘째, 기존 조직의 완성도와 안정성 방식을 유지해야 한다. 기존 시스템에 특별한 결함이 없고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성과가 보고되고 있을 것이다. 디지털 태생 기업들은 오히려 이런 장점들을 가지지 못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거나 디지털 비즈니스가 성숙할수록 조직 완성도와 안정성을 추구해나간다.

셋째, 기존 시스템에 최적이었던 업무방식을 재구성해야 한다. 디지털 세계의 속도와 상호연결성이란 특징을 고객관리, 성과, 규칙에 적용하기 위해 새로운 방향 설정이 요구된다. 기존에 불투명했던 성과 측정지표를 명확한 목표를 재설정하고 결과를 수치화해야 한다. 그리고 광범위하면서도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모니터링하며 통제해야 한다.

경영자들이 애타게 갈구하는 디지털 혁신은 콘크리트에 떨어진 씨앗과 같다. 디지털 프레임워크와 문화가 갖춰지지 않으면 뿌리를 내릴 수 없다. 기존 조직을 부드러운 흙처럼 유연하게 만들고 디지털 기술이란 물과 영양분이 주어질 때, 비로소 하나의 혁신 비즈니스 모델로 싹을 틔울 수 있다.

201907호 (2019.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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