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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대기자의 ‘역설의 리더십’(5)] 소신을 잠시 감추는 후퇴 전략 

 

한 발 물러섰다고 해서 소신을 버리는 건 아니다. 잘나가는 리더일수록 ‘후퇴 전략’이 필요하다. 잘나가는 사람은 주변의 질시를 받을 뿐 아니라 그의 상급자는 위협을 느낄 수 있다. 큰 뜻을 위해서라면 소신을 잠시 접는 것도 전략이다.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입사 면접을 하다 보면 지원자가 똑부러져서 오히려 안타까운 사례가 참 많습니다.”

오래전 한 대기업 인사 책임자가 혀를 끌끌 차며 한 말이다. 사연인즉 이렇다. 학업성적도 우수하고 영어를 비롯해 업무 수행 능력도 뛰어난 데다 성실해 보이기까지 하는 지원자에게 물었단다.

“우리 회사에 입사하게 되면 노조에서 가입하라고 할 텐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비판 대상이 될 시대착오적인 질문이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통용되던 물음이었다. 그 인사 책임자도 노조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듣기를 기대했다기보다는 지원자의 임기응변 능력을 시험하려는 의도가 더 컸다. 그런데 지원자가 정색을 하며 대답하더란다.

“노조는 노동자들의 당연한 권리이며, 입사하면 당연히 노조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겠습니다.”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아니 너무나도 교과서적인 옳은 대답이었지만) 인사 책임자의 마음에 드는 대답도 아니었다.

“노조에 가입하지 않겠다고 해도 믿지 않았을 겁니다. 정말 가입하지 않는다면 노조에 가입한 동료들로부터 ‘왕따’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조금 에둘러서 표현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입사하기 전부터 노조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선언하는데 기뻐서 얼른 뽑을 인사 담당자가 누가 있겠어요.”

그 능력 있고 소신 있는 지원자는 결국 떨어졌다고 한다. 인사 책임자가 기대했던 대답은 이런 정도가 아니었을까.

“노조 가입은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인 만큼 가입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 귀사의 노조가 어떤 성향인지 알지 못하니 입사하게 되면 잘 살핀 뒤 가입 여부를 결정하겠습니다.”

기회주의적인 답변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현명한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입사하는 이유가 노조 가입을 위한 것도 아니고, 노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려고 해도 우선 입사를 하고 볼 일인 까닭이다. 그 지원자의 말은 소신 발언도 아니고,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는 ‘직진주의자’의 ‘골통 발언’에 불과했던 것이다.

현실에서 이 같은 ‘시험’에 드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그 ‘운 나쁜’ 지원자의 경우뿐 아니라 기업이나 조직 리더들도 마찬가지다. 입사 지원자의 경우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 회사를 찾으면 그만이지만, 리더들의 경우는 그러한 시험에서 소신만 고집한다면 자칫 조직의 존립 기반을 흔들 수 있는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역사 속에서 예를 살펴보자.

중국 후한 말에 적방진(翟方進)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성제 때 승상까지 오른 학자이자 관료였다. 당시엔 호상(胡常)이라는 유학의 대가도 있었다. 호상은 연배는 적방진보다 위였지만 명성은 적방진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호상은 적방진을 질시해 그를 비난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 하지만 적방진은 달랐다. 호상이 경학을 강의할 때 제자들을 보내 강의를 듣게 하고, 모르는 것을 질문해 자세히 듣도록 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호상은 적방진이 자신을 존경한다고 믿고 득의양양했다. 이후 호상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입만 벌리면 적방진을 칭찬했다.

호상처럼 어리석은 인물을 다루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다. 그저 조금만 고개를 숙이(는 척하)면 절로 해결된다. 하지만 늘 이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북송 때의 일이다.

진관(秦觀)은 대문호 소식(蘇軾)의 제자로서 황정견, 장뇌, 조보지와 함께 ‘소문4학사(蘇門四學士)’로 불리던 문인이다. 소식의 천거로 태학박사가 돼 국사원 편수관을 겸임했다. 당시는 왕안석이 시행한 신법을 두고, 이를 지지하는 신법당과 반대하는 구법당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구법당에 속했던 진관이 학사들을 선발하는 시험을 관장하는 주선관이 되자, 신법당의 채변(재상이던 채경의 동생)이 입에 거품을 물었다.

“이제 진관이 주선관이 됐으니 경학(經學)에 정통한 학사들은 떨어뜨리고 사학(史學)에 능한 학사들만 뽑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지금의 조정을 뒤집어엎고 왕안석의 혁신정치를 배격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진관은 그렇지 않았다. 장원부터 5등까지는 모두 경학을 공부한 인물과 왕안석의 신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뽑았고, 나머지는 사학에 능통한 학사들을 선발했다. 진관을 비난하던 채변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진관이 선발한 학사 명단을 올리면, 이를 비판해 진관에게 죄를 씌우고 사학을 금지해버리려던 그의 음모도 수포로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나중에 진관은 이렇게 고백했다.

“그때 내가 고집대로 했으면 신법당과 한판 붙을 수밖에 없었고, 그랬다면 아마도 사학은 폐지되고 말았을 것이오.”

진관이 자기 당파의 인물로 학사를 모두 채웠다면, 당장은 통쾌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반대파의 반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건 너무도 명약관화한 일이다. 한순간의 통쾌함을 위해 치러야 할 비용과 위험이 너무도 큰 것이다.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명예와 소신도 잠시 접는 후퇴 전략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큰 뜻 위해 소신 감출 수도

범인들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고도의 후퇴 전략도 있다. 양명학 창시자인 유학자 왕수인(王守仁)의 경우가 그렇다. 왕양명으로 더 잘 알려진 바로 그다. 당시 왕기(王畿)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뛰어난 유학자였지만 성격이 호탕해 책상 앞에만 앉아 있지 못하고 매일 술집과 도박장을 전전했다. 왕수인은 왕기의 명성을 듣고 그와 교류하고 싶었지만 왕기가 술집과 도박장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지라 좀처럼 만날 기회를 찾지 못했다.

이에 왕수인은 제자들에게 각종 도박을 배우고 술과 가무도 익히게 했다. 몇 달이 지난 뒤 제자 하나를 시켜 왕기를 찾아가게 했다. 제자는 주루에서 술잔을 비우고 있던 왕기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말했다.

“존경하는 왕 선생과 패를 겨루고 싶습니다.”

왕기는 제자를 비웃으며 말했다.

“허허, 죽은 글이나 읽는 서생이 도박을 하겠다고? 그대는 도박이 뭔지나 알고 그런 말을 하는가?”

제자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선생께서는 모르고 계시는군요. 저의 스승님은 제자들과 자주 도박을 하십니다.”

왕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게 정말이오?”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스승님을 만나보시지요. 스승님은 글만 아시는 분이 아닙니다.”

왕기는 왕수인을 찾아가 만났다. 두 사람이 깊은 대화를 나눈 뒤, 왕기는 왕수인의 제자가 됐으며, 왕수인의 학문을 선학(禪學)으로 발전시켰다. 사람들이 술과 도박에 빠진 낙오자로만 여기던 왕기를 알아본 안목도 대단하지만, 그런 인재를 문하에 두기 위해 술과 도박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왕수인의 후퇴 전략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자칫 학자가 술과 도박에 빠졌다는 세간의 비판을 받아 평판이 치명적으로 훼손될 위험도 있었던 일이었다. 그야말로 큰 뜻을 펼치기 위해 작은 명예를 버린 위대한 지혜가 아닐 수 없다.

국가의 존망을 가르는 대의를 위해서는 더 큰 후퇴도 필요하다. 명나라 무종 때의 문신 이동양(李東陽)의 처신을 보자. 1505년 효종이 죽자 여섯 살 무종이 황제로 즉위했다. 이때 환관 유근을 비롯한 무리가 어린 황제를 놀이에 빠지게 만들고는 전권을 휘두르며 정사를 주물렀다. 이 꼴을 보다 못한 유건과 사천 등 충신들이 자리에서 물러나 낙향해버렸다. 하지만 이동양은 변함없는 마음가짐과 행동으로 황제와 조정을 보필했다.

오늘날까지 이동양의 이런 태도를 비판하는 사람이 많다. 자리에 연연해 간신들의 발호를 묵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꼭 그럴까. 선제인 효종은 임종 시에 이동양과 유건, 사천 세 신하에게 어린 아들을 부탁하고 눈을 감았다. 이 세 사람은 효종의 고명지신(顧命之臣)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건과 사천은 효종의 고명을 듣고서도 자신의 명예만 생각해 조정을 박차고 나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동양마저 떠나버린다면 효종의 유지는 누가 받들 것이며, 흔들리는 나라를 누가 바로잡는다는 말인가. 이런 마음에서 이동양은 자신의 명예에 흠집이 나더라도 황제와 나라를 지키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잘나갈수록 절실한 후퇴 전략

후퇴 전략은 잘나가는 리더일수록 더욱 절실하고 필요한 것이다. 잘나갈수록 주변의 질시를 얻게 될 뿐만 아니라, 상급자나 권력자에게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경쟁자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진나라의 명장 왕전(王翦)은 그 같은 후퇴 전략의 너무도 유명한 사례다.

왕전은 진시황이 황제가 되기 전부터 수많은 공적을 세웠다. 기원전 224년 진시황이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이때 왕전은 황제에게 초나라를 공격하려면 60만 병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젊은 장수인 이신이 나서 자신은 20만 병력만 있으면 초나라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시황제는 왕전을 늙었다고 비웃고, 이신과 몽염에게 20만 병력을 줘 원정에 나서게 했다. 이에 왕전은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이신과 몽염은 초기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신이 이끄는 부대가 초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면서 진나라가 도리어 위기에 몰리게 됐다. 그러자 진시황은 왕전의 고향으로 직접 발걸음해 그를 다시 장군으로 모셔 왔다. 왕전이 60만 병력을 이끌고 싸움터로 나아갈 때 진시황은 직접 먼 길까지 나가 그를 환송했다.

출병 직전 왕전은 출병의 대가로 비옥한 논밭과 커다란 저택을 달라고 황제에게 청했다. 그러자 시황제가 웃으며 물었다.

“대군을 거느리고 출정하는 장군이 어찌 살림을 걱정한단 말이오?”

왕전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신은 폐하를 위해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는데 공후에 책봉되지 못했습니다. 논밭이라도 많아야 신이 전장에 나가 죽더라도 자손들이 먹고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왕전은 전쟁터에 도착해서도 다섯 번이나 황제에게 사람을 보내 대가를 재촉했다. 보다 못한 부장(副將)이 왕전을 말리자 왕전은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말 하지 말게. 폐하께서는 의심이 많은 분인데, 지금 진나라의 모든 병력을 나한테 맡겨두고 마음을 놓을 수 있겠나. 폐하께서 황궁에 앉아 우리를 의심하고 있다면 어찌 되겠나 생각해보게. 내가 누차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내가 나라가 아니라 재산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함이라네.”

왕전은 이 같은 후퇴의 지혜로써 황제의 의심을 풀어 마음 놓고 전투에만 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초를 멸망시키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무성후에 봉해졌다.

실제로 몇 해 전 국내 기업의 간부들에게 가장 싫은 후배가 어떤 후배냐고 묻는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답변은 ‘리더십이 있는 후배’였다. 꼭 필요할 때까지 발톱을 숨겨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후당 때의 충신 곽숭도 후퇴 전략을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청렴하기로 유명한 관리였는데, 재상으로 발탁되고 나서는 온갖 경로로 들어오는 돈과 선물을 모두 받아 챙겼다. 그러자 오랜 친구들과 수하들이 수군거리며 그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곽숭도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장상이 돼 매년 받는 봉록도 다 쓰지 못할 판인데 선물과 돈이 탐나서 그러겠나. 그것은 각 번진(藩鎭)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네. 지금 각 지방을 지키는 번진 대부분은 모두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일세. 그런데 그들의 선물을 받지 않으면 어찌 되겠는가? 그들이 나를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않겠나 말일세.”

이처럼 필요에 따라 소신을 잠시 감추거나 접어두는 것은 소신을 버리는 행동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위험이나 역효과를 뻔히 알면서도 소신을 고집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너무 중국 얘기만 한 것 같으니 우리의 사례를 하나 보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그런 후퇴 전략의 고수였다. 진린은 변변히 싸우지도 않고 공적을 얻게 된 것이다. 이에 감동한 진린은 이후 전투에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 때도 진린이 왜군의 뇌물을 받고 철수하는 왜군을 순순히 보내주고자 했지만 결국 이순신의 강경한 반대를 거부하지 못했던 것도 이순신이 평소 그에게 준 ‘뇌물(?)’ 덕분이었다.


※ 이훈범은…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되었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이고 있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1989년 중앙일보에 얽매여 기자로 산 지 30년째, 그중 10년 이상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 경영에 답하다』(2009),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한다』(2010, 공저),『세상에 없는 세상수업』(2014), 『품격』(2019)이 있다. 파리10대학 문학박사 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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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호 (2019.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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