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정형모가 들려주는 예술가의 안목과 통찰(10)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 김수자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오방색 보따리는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던가. 이름이 브랜드인 시대,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프랑스 중부의 고풍스런 도시 푸아티에(Poitiers)가 대한민국 현대미술가 김수자(62)의 이름을 불렀다. 도시 전체에서 열리는 예술 축제를 처음 개최하면서 축제 명칭에 그의 이름을 넣은 것이다. 이름하여 ‘트라베르세/김수자(Traversées / Kimsooja)’(10월 12일~2020년 1월 19일)다. 수십 년간 세상 곳곳을 다니며 모으고 펼쳐온 작가의 내공은 이곳에서 오방색 보따리에 꾹꾹 눌러 담겨 ‘꽃’으로 피어났다.

▎프랑스 푸아티에 생루이 예배당에 설치된 ‘이주하는 보따리 트럭’ 앞에 선 김수자 작가 / 사진:문소영 기자, 김수자 스튜디오
프랑스 옛 도시 곳곳을 작품으로 장식


▎푸아티에 고딕 대성당 앞에 자리 잡은 김수자 작가의 오방색 설치작 ‘보따리 1999~2019’(2019). / 사진:문소영 기자, 김수자 스튜디오
여전히 말총머리에 검정 로만칼라 스타일을 고수한 채 서울에 나타난 작가의 얼굴엔 소녀의 홍조가 가득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도시 전체를 큐레이션한다는 흥분은 사실 그리 쉽게 가라앉을 만한 것이 아닐 터다. 1998년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시작으로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였고, 올해만 해도 미국·영국·스페인 등지에서 수많은 축제와 개인전을 섭렵한 ‘비엔날레가 사랑한 작가’일지라도 말이다.

이 행사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루브르미술관의 전임 관장이었던 앙리 루아렛의 고향이 푸아티에인데, 이곳 시장인 알랭 클레이와 ‘예술로 도시를 부흥해보자’고 의기투합했대요. 퐁피두 메츠 센터 관장을 역임하고 현재 팔레드 도쿄를 이끌고 있는 엠마 라비뉴와 독립 큐레이터 엠마뉴엘 드 몽가종이 공동 예술감독으로 참가했고요. 비엔날레를 시작하는데 기존 방식은 식상하다며, 한 작가에게 자유롭게 권한을 주는 독특한 행사를 만들게 되었다고 해요. 선정된 작가는 자신과 작품 세계가 맞는 작가들의 작품을 더해 도시를 함께 꾸미는 방식입니다.

언제 연락을 받았나요.

2018년 6월에 첫 회의를 했습니다. 어느 건물이든 다 들어갈 수 있고 무대로 삼을 수 있다고 했어요. 클레이 시장이 ‘당신에게 도시의 열쇠를 넘겨주겠다’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는 난민 문제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인데, 이것을 예술적으로 풀어보고자 하는 프로젝트가 이 행사였죠. ‘트라베르세’는 ‘가로지르기’, ‘경계 넘기’라는 뜻인데, 이는 제가 1992년 이후 노마드로 지내며 오랜 세월 작업해온 개념과 같은 맥락이 인정돼 첫 작가로 선정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작가는 퍼포먼스·비디오·사진·조각·설치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경계와 그 넘나듦을 추구해왔다. 물건을 넣고 묶었다 풀었다 할 수 있는 보자기로 형형색색 보따리를 만들어 차에 싣고 유랑민처럼 돌아다니는 모습을 찍어 별명이 ‘보따리 작가’다. 천 안팎을 넘나드는 바느질, 창문 안팎을 통과하는 빛, 음양사상이나 물질과 비물질 같은 관념도 그에게는 넘나드는 대상이다.


▎자신의 설치 작품 앞에서 인도 길거리 음식을 요리하고 있는 수보드 굽타. / 사진:문소영 기자, 김수자 스튜디오
푸아티에는 어떤 곳이던가요.

중세 아키텐 공국의 중심지로 대표적인 정치도시였죠. 아랍권과의 싸움인 ‘푸아티에 전쟁’으로 유명한 곳인데, 경계가 이어졌다 허물어졌다 한 곳입니다. 이 전쟁 이후 유럽이라는 콘셉트가 생겼다고 해요. 20세기 철학 거성 미셸 푸코의 고향이며 교육도시로도 유명하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필름 페스티벌이 열리고, 현대미술관은 없지만 ps1 같은 아주 실험적인 공간은 있고요.


▎생트 라드공드 교회에서 우리 전통 성악 '정가'를 부르고 있는 가객 정마리. / 사진:문소영 기자, 김수자 스튜디오
도시를 어떤 식으로 꾸며볼 생각을 했습니까.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조용한 도시의 문을 세상을 향해 다시 열어보고 싶다고 예술감독들과 논의를 많이 했죠. 저는 설치미술을 주로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회화 작가라 생각해요. 캔버스에 그림 그리듯 공간과 도시를 화폭으로 삼는…. 도시의 상징물인 아키텐 공작 궁전은 법원으로 쓰이고 있었는데, 마침 법원이 이전하면서 이 공간을 활용할 수 있게 됐어요. 이곳을 십자가의 중심으로 삼아 막힌 문을 열기도 하고, 길도 만들면서 곳곳에 바느질하듯 작품을 접목했습니다.

예배당 한가운데 들어선 보따리 트럭이 상징하는 것


▎아키텐 공국 궁전 실내에 마련된 김수자의 관객 참여형 작품 ‘마음의 기하학’. 관객들이 참여하기 직전이다. / 사진:문소영 기자, 김수자 스튜디오
작가가 꺼내 보여준 스마트폰 속 인스타그램은 황홀한 파노라마의 연속이었다. 푸아티에 곳곳에 마련된 작품들은 고색창연한 도시가 발랄한 생기를 머금게 했다.

가장 눈에 띈 작품은 생루이 예배당의 아치형 제단 앞에 엄숙하게 자리 잡은 보따리 트럭이었다. 작가가 보따리 트럭을 타고 파리의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장소를 돌아다니며 찍은 ‘이주하는 보따리 트럭’(2007)에 나오는 그 트럭이다. 이 작품은 11일간 보따리를 실은 트럭을 타고 한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찍은 퍼포먼스 영상 ‘떠도는 도시들-보따리 트럭 2727km’(1997)의 프랑스 버전이다. 공동 예술감독인 라빈과 드 몽가종은 이를 두고 “안식처에서 쫓겨난 영원한 떠돌이의 알레고리”라고 설명한다. 작가는 “건축과 바느질은 하나의 스트럭처를 만든다는 면에서 같은 맥락”이라며 “그렇게 많이 생각한 건 아닌데 이렇게 설치해놓고 보니 바로크 성당과 보따리 트럭의 구조적 연계성이 확연해졌다”며 흡족해했다.

장엄한 고딕양식의 푸아티에 대성당 앞에 들어선 컨테이너는 선명한 오방색 줄무늬가 주위 건물과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보따리 1999-2019’다. 작가가 1999년부터 20년간 살아온 뉴욕 아파트를 최근 떠나며 꺼내 온 물건들이 담겨 있다. 그런가 하면 예배당 실내 석관 부조 앞에는 검정 보따리가 마치 명상이라도 하듯 고요하게 앉아 있다.

오귀스탱 예배당의 회랑과 생트 라드공드 교회 지하묘지에 설치된 작품은 ‘호흡’이다. 아치형 유리 창문들에 반투명 회절격자필름을 씌웠다. 무수한 수직수평의 스크래치 덕분에 창을 통과한 햇빛은 바닥에서 무지갯빛으로 변신한다. 이를 “숨쉬는 색동 보따리”라고 표현한 작가는 “이것은 빛으로 하는 페인팅, 자연의 페인팅, 페인트 하지 않은 페인팅”이라고 설명했다.

아키텐 공국 궁전 실내에 설치된 관객 참여형 작품 ‘마음의 기하학’도 화제를 모았다. 관람객 각자가 찰흙으로 공을 만들어 널찍한 타원형 테이블에 올려놓는 작업이다. 자연스럽게 소원을 비는 행위가 하나의 결실이 되어 테이블을 가득 채운 모습은 또 하나의 우주였다.


▎김수자의 ‘호흡’이 설치된 생트 라드공드 교회와 오귀스탱 예배당 회랑. ©Yann Gachet, City of Poitiers
이번 비엔날레의 또 다른 특징은 작가의 예술 세계와 걸맞은 다른 작가의 작품을 작가가 예술감독과 함께 고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작가 20명의 작품이 도시 곳곳을 수놓은 가운데, 우리 전통 성악인 정가(正歌)를 부르는 가객 정마리도 있었다. “생트라드공드 교회에서 무반주로 1시간 동안 끊어질 듯 말 듯 소리를 가는 실처럼 이어가는데, 정말 멋졌어요. 마리씨도 에코도 훌륭하고 디테일이 진짜 잘 살아나서 이곳에서 꼭 녹음하고 싶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냄비·프라이팬 같은 금속 식기로 작품을 만드는 인도 출신의 수보드 굽타는 작품 설치는 물론 개막식에서 인도의 길거리 음식을 직접 요리해 관람객에게 대접, 큰 인기를 얻었다. 미국의 스티브 비텔로는 4세기에 지어진 성 요한 세례당에 사운드 아트를 설치해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했다. 일본의 가와마타 타다시는 아키텐 공국 궁전 지붕과 기둥 사이에 거대한 까치집을 선보였고, 콩고 출신의 새미 발로지는 탄피를 녹여 십자가를 만들었는가 하면, 대만 출신의 리 밍웨이는 옷을 꿰매거나 수선해주는 ‘멘딩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관람객과 대화에 나서기도 했다.

“조직위원회는 제게 최대한의 프리덤과 전례 없는 서포트를 해주었어요. 두 번 다시 이런 걸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저는 시장성이 전혀 없는 작품만 만드는데.(웃음) 사실 최근 미술계가 마켓에서 팔리는 작품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은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그러니까 팔리는 작품만 나오고 팔리는 작가만 계속 등장하게 되는 것이거든요. 비엔날레도 거기에서 아주 자유롭지는 못하고요. 그래서 서포트를 받지 못하는 작가는 작품을 선보일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죠. 정부나 파운데이션의 더욱 세심한 지원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

201912호 (2019.11.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