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진호의 ‘음악과 삶 

통제 불가한 음악적 천재성 

천재성은 신비한 현상으로, 그것을 갖춘 이는 복 받은 사람 혹은 신에게 선택된 사람이다. 천재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그것을 타고났다는 의미다.
“기분이 좋을 때, 마차를 탈 때나 맛있는 식사 후 산책할 때, 혹은 잠 못 이루는 밤중에, 무수한 악상이 내 마음속으로 몰려온다.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 걸까? 나는 모른다. 내 의도와도 상관없다. 이것들 중 마음에 드는 것을 남겨 콧노래로 불러본다.”


▎프랑스 화가 앵그르가 그린 이탈리아 작곡가 케루비니의 초상. 뮤즈가 뒤에서 손을 들어 케루비니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있다. / 사진:wikipedia
악상을 떠올리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는 작곡가를 주눅 들게 만드는 말이다. 프랑스 수학자 자크 아다마르와 영국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 등은 이 말을 한 이로 모차르트를 지목하여 자신들의 책에 인용했다. 모차르트는 이 말을 하지 않았다. 누가 했건, 자기 경험을 알리려고 이 말을 한 이는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하고 있다. 가상적 천재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누군가가 창작한 문장일 수도 있다. 천재성에 대한 창작자의 생각을 잘 드러내는 글이다.

음악을 비롯한 예술은 천재성이나 재능을 타고난 이들이 해야 한다는 통념이 있다. 어떤 신중한 음악가들, 특히 성공한 이들은 그들의 선천적 재능을 사람들이 부러워하거나 경이롭다고 여길 때 잔인하게도 가혹한 결정타를 날린다. “노력의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안다. 이런 유의 신중한 발언이 겸손함의 표현일 뿐이며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비슷한 발언을 우리는 매년 초겨울에 방송과 언론을 통해 듣는다. “과외는 한 적 없고요, 그저 학교 공부만 열심히 했을 뿐이에요. 잠도 충분히 잤고요.” 수능시험에서 전국 1등을 한 친구들의 발언이다. 이런 말 역시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진실이라고 해도 말이다.

선천적 예술 천재는 분명 있다. 선천적으로 지능이 높은 이들이 있는 것처럼, 선천적으로 성실한 성향을 장착한 이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 선천적으로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리더십을 보이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선천적으로 강인한 체력을 갖추어 훌륭한 운동선수로 성공한 이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후천적 노력으로 이런 능력들을 갖춘 이들도 당연히 있다.

그런데 후천적 노력을 하게 만드는 의지는 누구나 늘 가지고 있을까? 19세기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에게 의지(will)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의지가 무엇에 의존하는지를 묻는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지만 무언가를 원하는 의지 자체를 원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게 무엇이든 원인이 없는 의지가 있을까? 잘 살고 잘 벌고자 하는 의지, 음악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의지, 공부를 잘하고자 하는 의지는 ‘원인 없는 현상(Causa Sui, 라틴어)’이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자기 자신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과학이 알려주는 바, 철학이 가정하는 바가 인과론(causality)이다. 이것은 원인이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가정이다. 인과론이라는 형이상학적 가정이 없다면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세계를 이해해야만 하고 설명해야만 한다. 인과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자의식’은 ‘예술의 적'


▎근대 유럽 문명이 터 잡고 있는 가장 중요한 철학의 창시자 데카르트. 데카르트를 비판하는 현대철학자들은 나와 내 주변을 구분하기 어려우며, 온전한 책임과 능력을 가진 내가 아니라 환경 속의 내가 모종의 사유와 행동을 한다고 말한다. 나의 생각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는 서양음악의 기초를 구성하고 있다. / 사진:wikipedia
의지, 노력, 열정, 끼, 재능, 천재성, 집중력, 끈질김 등 성공을 불러오는 이 성향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가 많다. 이런 것들을 만드는 원인은 무엇일까. 일단 이 성향들이 고유한 뇌 상태에 기반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모든 정신적인 것은 세포로 구성된 뇌에서 발원한다. 특정한 뇌 상태를 만들어내는 몸의 생물학적 상태와 그 상태를 점화시키는 사회적 조건을 빼먹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는 과학적 연구가 필요하며, 개인의 경험은 들어봐야 큰 도움이 안 된다. 뇌, 성향, 몸, 사회적 배경 등이 다른 이들 간 경험의 공유는 도움을 주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나는 모른다. 내 의도와도 상관없다”는 말은 그 발화자가 무의식적이며 비자발적인 마음 상태에서 작곡했음을 알려준다. 이런 마음 상태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느끼는 작곡가와 예술가가 많다. 그런 이들은 자신의 창작활동 과정과 내용이 의식될 수 없고, 더 나아가 언어적으로 묘사되고 설명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통제할 수 없다고도 생각한다. 1853년에 오페라 [라인의 황금] 중 ‘전주곡’을 작곡했던 바그너도 자신의 창작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바그너는 어느 날 최면 상태에 빠져 유속이 빠른 물속으로 자신이 점차 가라앉는 느낌을 가졌다고 말했다. 몰아치는 소리가 음악이 되어 내림마장조 화성으로 울렸고 반복되는 울림이 무한한 의미를 부여하는 듯했다. 그렇게 오케스트라 전주가 바그너에게 불현듯 떠올랐다. 온전하게 완성된 형태로.

이런 이들이 대학 교수라면 학생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잠이나 자라고 할까? 이런 이들은 작곡을 하려고 안달복달하는 학생들을 경멸하고, 악상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과정을 중시한다. 그런 작곡가들에게 음악을 창작하는 과정은 논리적이라기보다 직관적이고 신비하다. 종교적 관점을 가진 이들은 신의 목소리가 작곡가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니, 작곡가가 자발적으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신들 중에는 뮤즈가 있다. 뮤즈가 찾아와주길 기대할 뿐인 작곡가에게 배울 것은 없다. 잘 가르치지 못하는 많은 작곡가가 음악의 창작 과정을 신비하게 포장하고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떠벌리며, 아예 말을 하지 않는다.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 그들이 가끔 말을 하면, 선문답이 튀어나온다. 이것들은 작곡가들이 자신에 대해, 자신의 영감과 그것을 받쳐주는 능력에 대해 잘 몰라 하는 말들이다.

작곡가만이 아니다. 올해 1월에 타계한 영국 소설가이자 당대 최고의 편집인이었던 다이애나 애실(Diana Athill, 1917~2019)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60년대 초에 9개 이야기가 내 안에서 우연히 등장했다(happened).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내가 그것들을 쓰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어떤 창작 충동을 느꼈고, (내가 아닌) 그것이 이야기를 쓰게 했다.” 내 안의 낯선 충동이라니. 그게 자주 강림할수록 소설가인 나는 성공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언제 강림할 것인가. 내가 아닌 나의 낯선 충동은 통제 불가다. 이럴 때 영화나 드라마 속 예술가들은 “그것들에게 그냥 맡겨!”라고 말한다. 그렇게 맡겼는데도 끝내 강림하지 않는다면? 이런 문제가 있는 데도 막무가내인 이들이 있다. 미국 소설가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 1920~2012)는 자신이 창작하고 있는 예술 작품의 실체와 의미를 인지하는 일, 즉 ‘자의식’을 ‘예술의 적’이라고 했다. 모르는 것이 최선이라는 이야기다.

예술가들이 알 듯 모를 듯한 영감(inspiration)만 강조하는 역사는 꽤 오래됐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비극 작가들도 그랬다. 하지만 세상 어떤 것도 모르지 않았던 현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달랐다. 『시학』(詩學, poetics)은 이 철학자의 지적 예술관을 잘 보여주는데, 그는 시 창작을 위한 구체적 방법들에 대한 지식을 정리함으로써 영감에 넘치는 예술가들을 비웃었다. 브래드버리 같은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들과 같은 이들을 오래전에 비난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과학자들도 자신에 대해, 자신의 과학적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순간에 대해, 그것을 받쳐주는 능력에 대해 잘 모른다. 프랑스 수학자 푸앵카레는 풀리지 않는 어떤 수학적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지친 나머지 그 문제를 잠시 잊기 위해 지질학 탐사를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발을 버스에 올리는 순간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니 수년 묵은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 아이디어는 마치 섬광처럼 갑작스레 그의 마음속에서 번쩍였는데, 놀라운 것은 그전까지의 고민이 그 순간의 아이디어와 관련해서는 어떤 기여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열 길 우물 속은 알아도 사람 마음은 모른다’는 옛말이 있다. 타인의 마음도 모르지만 자신의 마음도 모르는 게 인간이다. 자기 마음을 안다고 착각할 때 생기는 것이 의식(consciousness)이다. 의식은 예로부터 철학의 주제였고 지금은 철학뿐 아니라 신경과학의 난제다. 독일 물리학자 게오르크 리히텐베르크(Georg Lichtenberg, 1742~1799)는 인간이 자기 생각과 행위의 주인이라는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에 대해 말했다. 그는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성찰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 우리의 사유 과정에 대해 비인칭 주어인 ‘it’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번개가 쳤다(it’s lightning)’거나 ‘비가 온다(it’s raining)’는 표현을 쓰는 것처럼,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어떤 생각이 든다(thinking itself is going on)’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철학에 반기를 드는 발칙한 주장이다. 사물과 현상을 판단하는 강력한 자의식과 자아를 가진 근대인은 자신의 사유와 행위의 주인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기에, 그가 벌인 일은 그가 책임을 져야 한다. 천재성은 예술가의 것이든 과학자의 것이든, 혹은 사업가의 것이든 그가 부단히 노력한 결과고, 범죄는 그의 잘못된 의지와 생각, 행동에서 나온 것이니 그를 비난해야 한다.

맞는 말일까? 현대의 신경과학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조심스레 말한다. 우리의 뇌 작동이 의식을 비롯한 마음을 만들어내는데, 뇌의 작동은 우리의 의지에서 벗어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재능을 통제한다는 생각은 틀렸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이야기가 불편하다면, 당신은 당신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런데 그 자유의지를 낳은 원인은 무엇일까.


※ 김진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201912호 (2019.11.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