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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윤의 ART TALK(20)] 조각 거장 안토니 곰리, 로열아카데미에 서다 

 

런던 로열아카데미에서 개인전을 연다는 것은 명성 있는 국제적인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영국 작가들에게 로열아카데미가 주는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올해는 70세가 된 거장 안토니 곰리가 이 영광을 안았다.

▎안토니 곰리는 1994년 터너상을 수상했고, 1999년 사우스뱅크 프라이즈, 2007년 베른하르트 힐리거 조각상을 수상했다. 1997년에는 대영제국 장교(Officer British Empire)가 되었고, 2014년 신년 명예훈장 기사 작위를 받았다. 또 영국 왕립건축가협회 명예교수, 케임브리지대 명예박사를 받았으며 2003년부터 로열아카데미 회원(RA)이 됐다.
영국 미술작가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시는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테이트 모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할 곳이 로열아카데미일 것이다. 로열아카데미는 영국 최초의 왕립예술원으로 250년 역사를 자랑한다. 미술과, 건축과로만 구성된 로열아카데미는 영국에서 처음으로 관학파 미술이 시작돼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영국 로열아카데미에는 대학원만 있다. 대개 영국 대학의 대학원 과정이 1년이며 길어도 2년인 데 비해 로열아카데미 대학원 수업은 3년간 진행된다. 수업료는 전액 장학금으로 운영된다. 영국 작가들에게 로열아카데미는 유구한 전통의 계승이라는 의미를 넘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큰 영예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물론 최근 20여 년간 유명한 영국의 젊은 작가들은 골드스미스나 슬레이드 같은 미술대학 출신이 많다. 하지만 결국 이들이 성공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면, ‘로열아카데미(RA)’라는 존칭을 부여받기도 한다.

몸과 우주에 대한 일생의 실험


▎Antony Gormley, Clearing VII, 2019. Approximately 8 km of 12.7㎜ square section 16 swg aluminium tube, dimensions variable. Installation view, ‘Antony Gormley’, Royal Academy of Arts, London, 21st September to 3rd December 2019 ©the Artist. Photo: David Parry / ©Royal Academy of Arts
로열아카데미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안넨베르크 궁정(Annenberg Courtyard)에서부터 곰리의 첫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아이언 베이비(Iron Baby, 1999)’다. 이는 새로 태어난 아기의 실물 크기와 형태를 주철로 만든 작품으로, 궁정 규모에 비하면 매우 작은 크기다. 완전히 웅크린 아기 조각상은 인간의 약함과 생명의 활력을 동시에 드러내는 듯하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자칫 보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조각은, 보잘것없이 나약한 ‘몸’에서 시작해 작가의 초지일관적 주제인 인간의 몸, 더 나아가 공간으로서의 몸과 우주에 대한 실험으로 발전하는 전시의 시작을 알린다.

나이 일흔에 여는 대규모 전시임을 감안하면 회고전 성격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곰리의 이번 전시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13개 개별 전시 공간이 주어진 것부터 마치 작가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듯하다. 실제로 곰리는 이번에 매우 다양한 신작을 선보였다. 즉, 기본적으로 주어진 보자르 스타일(Beaux-Arts, 아카데믹한 고전주의)의 전시 공간들을 일종의 ‘실험장’으로 보고 이곳에 새로운 감각과 스케일, 빛과 어둠,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 시도를 과감히 도입한 것이다. 덕분에 이번 전시는 곰리의 중요한 구작들과 최근 작품들이 어우러지며 독특한 상호작용을 일으킨다. 옛것과 새것이 한데 모인 경험을 제공하는 전시가 이번 곰리전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Antony Gormley, Cave, 2019. Approximately 27 tonnes of weathering steel, 14.11×11.37×7.34m. Installation view, ‘Antony Gormley’, Royal Academy of Arts, London, 21st September to 3rd December 2019 ©the Artist. Photo: David Parry / ©Royal 1 Academy of Arts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곰리의 초기작들은 대중에게 거의 공개되지 않았다. 이 시기 그의 관심은 대지미술(랜드아트)과 퍼포먼스, 미니멀리즘과의 연관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땅, 바다와 공기(Land, Sea and Air, 1977~1979)’와 ‘땅의 과실(Fruits of the Earth, 1978~1979)’이라는 이름의 작업들은 자연과 인간이 만든 물체들을 납으로 하나씩 감싼 작품이다. 사물을 납으로 감싸며 경험한 공간은 1980년대 들어 그의 가장 중요한 보디캐스팅 작업이 나오도록 유도한 중요한 기초가 됐다.


▎Antony Gormley, Mother's Pride V, 2019. Bread and wax, 306×209.5×2㎝. Installation view, ‘Antony Gormley’, Royal Academy of Arts, London, 21st September to 3rd December 2019 ©the Artist. Photo: David Parry / ©Royal Academy of Arts
‘살점(Flesh, 1990)’ 같은 1990년대 콘크리트 시리즈도 있다. 작품 내부에 인체 형태를 가진 공간을 담고 있는데, 이 공간은 블록의 표면을 깨는 손이나 발 또는 머리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즉, 이후 등장할 주요한 대형 작업에서 볼 수 있는 공간의 음각·양각을 이용한 기법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작가의 상상력 돕는 미술관의 노력


▎Antony Gormley, Body and Fruit, 1991/93. Cast iron and air, 233×265×226㎝(Body), 110.7×129.5×122.5㎝(Fruit). Installation view, ‘Antony Gormley’, Royal Academy of Arts, London, 21st September to 3rd December 2019 ©the Artist. Photo: David Parry / ©Royal Academy of Arts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초기 작업들과 더불어 이번 전시의 핵심은 방문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가능하게 한 작품들이다. 로열아카데미만의 독특한 갤러리에 맞도록 재구성해 방문객들이 각 공간을 항해할 때 자신의 몸을 적극 활용할 수 있게 한 콘셉트가 무척 돋보인다.

특히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I, 2008)’이라는 작업은 24개 주철 형상이 모든 벽과 바닥, 천장에 설치돼 있다. 이들을 하나의 조각으로 만들어 놀라운 설치미술을 보여준다. 무거운 주철 조각들을 어떻게 사방팔방에 붙여놓을 수 있었을까부터 관객의 호기심과 놀라움을 이끌어낸다. 다양한 무게중심을 이용한 조각들의 군집 설치작품이다.


▎Antony Gormley, Lost Horizon I, 2008. 24 cast iron bodyforms, each 189×53×29㎝. Installation view, ‘Antony Gormley’, Royal Academy of Arts, London, 21st September to 3rd December 2019. PinchukArtCentre, Kiev, Ukraine ©the Artist. Photo: David Parry / ©Royal Academy of Arts
‘잃어버린 지평선’ 전시장의 바로 옆 중앙홀에서는 곰리의 초기 작품 ‘확장(expansion)’ 중 ‘몸과 과일(Body and Fruit, both from 1991~1993)’을 만날 수 있다. 몸의 형태를 확장해 폭탄과 과일의 성질을 모두 지니고 있는 속 빈 조각이 달려 있는 방이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엄청난 무게의 조각상을 전시하기 위한 로열아카데미의 노력이다. 작품의 무게는 3톤이 넘는다. 로열아카데미는 이를 천장에 매달기 위해 전시 기간 내내 외부에 대형 기중기를 설치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해외 미술관을 찾을 때마다 배울 수 있는 점이 있다. 가능하면 작가들이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꺼이 돕는다는 점이다. 전시 자체도 놀랍지만, 이러한 놀라운 전시를 가능하게 만든 기관의 협업과 노력도 경이롭다.

작품 ‘호스트’ 영국서 첫 전시


▎Antony Gormley, Host, 2019. Buckinghamshire clay (51°44’ 52.5” N 0°38’ 42.6” W) and Atlantic seawater, dimensions variable. Installation view, ‘Antony Gormley’, Royal Academy of Arts, London, 21st September to 3rd December 2019. ©the Artist. Photo: ©Oak Taylor-Smith
2008년 작업과 더불어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된 대규모 신작도 있다. ‘클리어링(Clearing VII, 2019)’과 ‘매트릭스(Matrix lll, 2019)’다. 클리어링은 바닥에서 천장, 벽에서 벽으로 이어지는 유연한 코일형 알루미늄 튜브가 한 방을 가득 채운 듯한 ‘공간 드로잉’ 작업이다. 작가의 손으로 어떤 형태를 만든 것이 아니라 주어진 공간에 800m 코일형 알루미늄 튜브로 공간을 채우면서 작품이 스스로를 만들도록 한 작업이다. 곰리는 평생 새로운 주형을 만들어 조각상을 제작한 거장이다. 원숙한 노년에 접어든 이 거장이 이제 자신의 재료들이 물질적 탄성을 통해 움직이며 스스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퍼포먼스를 펼친 건 아닐까.

‘매트릭스’ 작업도 매우 놀라운 신작이다. 전시장 메인 홀에 수많은 직사각형 철망이 마치 구름 같은 구조채로 만들어져 매달려 있다. 유럽 침실의 평균 크기에 해당하는 공간들이 하나하나의 직사각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에 대해 작가는 “균일한 공간은 우리가 삶의 공간으로 받아들이기로 합의한 환경의 유령처럼 느껴진다”고 설명한다. 삶의 공간들이 이토록 조화가 어려운 미로와도 같음을 은유했다는 뜻이다.

몸의 내부 공간에 대한 탐구는 ‘케이브(Cave, 2019)’ 작업에서도 나타난다. 거대한 직사각형 구조물들이 마치 ‘세포’들로 짜맞춰진 인체 공간처럼 연계되어 있다. 관람객이 직접 내부를 탐방하며 감상하도록 제작됐다. 곰리는 그저 바라보는 작품을 감상하던 이전 작가들의 태도와 달리, 매우 적극적으로 관객이 함께 느끼고, 경험하는 공간으로서의 작품을 꾸준히 제안하고 있다.


▎Antony Gormley, Matrix III, 2019. Approximately 6 tonnes of 6㎜ mild steel reinforcing mesh, 7.1×9.3×15.15m. Installation view, ‘Antony Gormley’, Royal Academy of Arts, London, 21st September to 3rd December 2019 ©the Artist. Photo: ©Oak Taylor-Smith
이번 전시에서 가장 관심을 많이 받는 작품은 ‘호스트(Host, 2019)’다. 갤러리 바닥부터 23㎝ 높이의 전체 공간을 바닷물과 진흙으로 채워 마치 수만 개의 미생물 생명체가 출현할 것 같은 방을 만들었다. 곰리가 지금까지 보여준 작업과는 매우 이질적인 작품으로, 원초적인 물질 간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스스로 탄생하는 환경을 제안한 것이다. 선뜻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작품임에도 오히려 관객들은 담담하다.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이 공간에서 운행하는 바람과 진흙 냄새를 몸으로 느끼며 과연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작가는 사실 이 작업을 1997년부터 구상했고, 지금까지 단 세 번만 전시됐다. 영국에서도 이번이 첫 전시다.

여러 조각품과 함께 곰리의 다양한 드로잉 종이 작품들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도 이번 전시의 의의다. 대부분 원유, 흙, 피같이 독특한 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다소 샤머니즘적인 냄새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림과 조각을 병행해 일상적인 활동으로 지속해왔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곰리가 원초적 물성과 재료에 관심을 기울여온 배경을 이해한다면 호스트 같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안토니 곰리는 인체와 우주의 관계를 탐구하는 조각, 설치작업과 공공미술로 세계적으로 칭송받는 작가다. 1960년대부터 ‘자연과 우주에서 인간은 어디 서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하며 자신과 타인의 육체를 끊임없이 관여시킴으로써 조각에 의해 개방된 잠재력을 발전시켜왔다. 곰리는 예술의 공간을 새로운 행동, 생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번 전시는 인체 내부의 어두운 공간 자체뿐만 아니라 몸이 주변과 갖는 상관관계, 즉 공간으로서의 몸과 우주 속의 몸에 대한 곰리의 관심과 실험을 요약하고 있다.


※ 이지윤은… 20년간 런던에서 거주하며 미술사학 박사, 미술경영학 석사를 취득하고, 국제 현대미술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큐레이터다. 2014년 귀국하여 3년간 경복궁 옆에 새로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총괄을 역임했다. 현재 2003년 런던에서 설립한 현대미술 큐레이팅 사무소 숨 프로젝트를 운영하며,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북경 중앙 미술학원 객원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201912호 (2019.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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