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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19) 역참과 바다로 이어지는 몽골제국의 유라시아 네트워크 

 

역참 얌(Yam)은 몽골제국 네트워크의 핏줄이었다. 13세기에서 14세기 초까지 주식회사 몽골제국은 제국 전체의 교역로를 유지했고 30~50km마다 역참에 물자를 쟁여뒀다. 마르코 폴로도 몽골제국을 여행하면서 역참을 자주 이용했다. 그는 이런 역참들이 아름답고 으리으리할뿐 아니라 왕에게 어울리는 비단이나 다른 모든 사치품까지 갖추고 있다고 묘사했다.

몽골제국은 역참을 통한 무역을 장려해 여권과 신용카드의 기능을 합친 초보적인 유형의 신분증, 파이자를 나누어주었다. 몽골제국이 무역로를 확장하고 유지했던 것은 그들이 상업과 교역을 중시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칭기즈칸 부족의 분배, 즉 쿠비(Khubi) 체계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병사뿐만 아니라 고아와 과부까지 전리품에서 자기 몫을 챙길 권리가 있었듯이, 칭기즈칸 혈족, 황금가족의 모든 구성원은 제국의 각 지역의 부에서 자기 몫을 차지할 권리가 있었다. 고려와 유럽, 페르시아에서 약탈한 물건들은 이 교역로를 통해 몽골고원으로 흘러 들어갔다. 홀레구칸은 형제 쿠빌라이가 지배하는 원나라에 비단 노동자 2만5000가구를 거느리고 있었고, 티베트에 골짜기 몇 개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초원지대 북부의 모피와 매에서도 자기 몫을 챙겼다. 쿠빌라이는 페르시아와 이라크에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낙타, 말, 양, 염소 떼도 소유했다. 페르시아의 몽골인은 원나라의 몽골 황실에 향료, 강철, 보석, 직물을 공급했고, 원나라의 몽골 황실은 페르시아에 도자기와 의약품을 보냈다. 쿠빌라이칸은 페르시아의 통역사, 의사, 나아가 러시아 병사들도 만 명 정도 수입했다. 이 병사들은 수도 북부의 땅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이용했다. 몽골제국의 칸국들은 정치적으로 싸우면서도 경제적, 상업적으로는 협력했다. 중국, 중앙 초원지대, 페르시아, 러시아의 4개 지역으로 나뉘었지만 다른 지역의 물자에 대한 요구는 줄지 않았다. 한 칸국이 다른 지역 칸국에 그들의 몫을 보내지 않으면 상대편도 그 칸국의 몫을 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경제적 이해관계는 정치적 분쟁을 극복하고 가동되었다. 끊임없이 확장되는 오르톡과 역참 얌은 몽골에서 베트남까지, 고려에서 페르시아까지 최신 뉴스와 사람, 물자를 말이나 낙타 카라반에 실어 보냈다. 몽골제국 전역에 무역이 확대되자 더 빠르고 편한 새로운 길들이 뚫렸다. 티베트로 뚫린 새로운 길은 중국과 티베트의 상업적, 종교적, 정치적 연결에 크게 기여했다. 쿠빌라이칸이 데려온 아랍의 지리학자들, 특히 자말 앗 딘 등은 1267년 쿠빌라이를 위해 지구본을 제작했다. 이 지구본에는 아시아와 태평양의 섬들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까지 묘사했다.

해양 실크로드 진출해 무역 활성화


▎12~14세기 몽골 귀족들의 복장.
몽골제국이 유라시아 전체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태평양과 인도양을 꿰뚫는 해상교통망이 필요했다. 몽골제국의 일본과 인도네시아 자바 침공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들은 조선과 해상운송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수상·해상운송이 육상운송보다 값싸고 효율이 높다는 것을 깨닫고 해상운송을 발전시켰다. 아마 고려의 조선술이 몽골제국의 해상운송 발전에 큰 기여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쿠빌라이칸은 제국 내의 식량은 기본적으로 배로 운송한다는 전략적 결정을 내렸다. 몽골제국은 첫해에 약 3000톤을 배로 운반했지만, 1329년에는 그 양이 21만 톤으로 늘었다. 몽골제국의 수도인 대도(지금의 베이징)은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터미널이었다. 대도는 현재의 베이징과 달리 도시 안에 항구가 있었고 운하를 통해 텐진으로 연결되었다. 항저우를 비롯하여 닝보(寧波), 푸저우(福州), 첸저우, 광저우 등 항만도시로부터 동남아시아, 인도양에까지 수많은 무역선이 항해했다. 중국의 남북이 해로로 연결되었던 것은 몽골시대부터다.

마르코 폴로는 고향으로 돌아갈 때 중국에서 페르시아로 항해하면서 돛대 4개짜리 커다란 정크선을 탔다. 이 배에는 승무원이 300명까지 탈 수 있었고 상인이 들어갈 수 있는 선실은 60개나 됐다. 중국 남부의 항구 취저우에서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에 이르는 길은 극동과 중동을 잇는 중요한 해상 연결로가 되어 마르코 폴로와 이븐 바투타가 이 해로를 이용했으며, 이 해로는 고려의 벽란도, 아라비아, 이집트, 소말리아까지 바로 연결되었다. 이 해로를 따라가면 베트남, 자바, 실론, 인도의 항구들과 이어지며, 이 지역에서는 유라시아 육로 실크로드에서 얻을 수 없는 설탕, 상아, 계피, 면화 같은 물자들이 사고팔렸다. 중국의 첸저우(泉州), 광저우(廣州)를 떠난 경덕진(景德鎭)의 도자기가 동남아시아의 팔렘방 브루나이, 인도 남단의 여러 항구를 거쳐 서쪽 페르시아만에 접한 호르무즈로 도착했다. 그리고 북쪽의 흑해 연안의 수다크, 지중해의 베네치아, 제노바 등 항구도시로 다시 운반되었다.

몽골제국은 이 해로를 모두 지배하지는 않았지만 장기적인 교역관계를 맺어 무역을 활성화했다. 몽골의 보호를 받는 무역회사 오르톡은 태평양 연안과 인도양의 무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몽골제국은 정치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해양 실크로드 지역으로 무역을 확대하기 위해 중국 남부의 오르톡들에게 외국 항구로 이주해 교역기지를 설치하도록 장려했다. 몽골제국의 통치기간 중에 수많은 중국인이 고향을 떠나 베트남,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자바, 수마트라의 해안에 공동체를 만들어 정착했다. 유럽 시장 진출을 위해서 흑해 연안에 교역기지 설치를 장려했고, 제노바 사람들이 크림반도의 카파 항구와 타나에 교역기지를 세우는 것을 허락했다. 1340년에 출간된 상업 안내서 『상업의 실무(Practica della mercatura)』에서 피렌체의 상인 프란체스코 발두치 페골로티는 중국에 이르는 길은 “낮이나 밤이나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동서 간 학술·과학 교류 이끈 몽골제국


▎1287년 원나라에서 발행된 ‘지원통행보초’라는 종이어음.
몽골의 침략으로 이란, 이라크 지역의 제조업이 대부분 파괴된 상황에서 새로운 유라시아 무역 시스템이 만들어지자 중국 제조업은 새로운 기회를 맞이했다. 몽골제국의 중국 정복은 중동 정복만큼 파괴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쿠빌라이칸은 중국의 물자들이 중동 시장에서 팔리게 하는 동시에 무슬림과 인도의 과학기술이 중국으로 광범위하게 이전되도록 만들었다. 몽골제국은 세계 최강의 기마군단을 앞세운 군사력을 바탕으로 유라시아 최대의 중국 경제권을 합쳐버리고 오르톡이란 제도를 활용해 무슬림 상업권을 내세워 제국을 지배했다.

13세기 말에 이르러 오르톡 상인들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장사를 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한국이 고도성장을 하던 1970~80년대 상사맨들과 당시의 오르톡 상인들이 비슷한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한 지역에서는 싸고 풍부한 물자가 유라시아 반대편에서는 새롭고 신기한 상품이 되어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 염료, 약, 피스타치오, 폭죽, 독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품이 거래되었다. 중국의 작업장에서는 세계시장의 수요를 맞추려 도자기, 비단 등 전통적인 중국 수공업품뿐만 아니라 특수한 시장을 노리는 신상품도 출시했다. 예를 들어 상아를 수입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상을 깎아 유럽에 수출하기도 했다. 상인이나 군인들이 가볍고 휴대하기 쉬운 카드로 놀이를 하면서 무역망을 통해 카드놀이가 급속히 퍼졌다. 체스 등은 거추장스러운 도구가 필요했지만 카드는 병사나 낙타몰이꾼이 손쉽게 운반할 수 있었다. 카드 수요가 늘자 종교 경전을 인쇄하는 데 사용하는 조각 나무를 이용해 찍어내는 방법을 도입했는데, 인쇄 카드 시장이 종교 경전 시장보다 훨씬 더 커졌다.

몽골제국 동서 간의 학술과 과학 교류도 활성화되었다. 특히 카안 울루스(원나라)와 훌레구 울루스의 교류가 활발했다. 대원의 수도 대도에는 이란과 이슬람권 학자들이 상주하고, 훌레구 울루스의 수도 타브리즈에서도 다수의 중국 학자가 활동했다. 유라시아 전역의 몽골 칸국들은 대군과 대량의 물자를 운반하기 위해서 서로 역법을 조정해야 했다. 시간을 기록하는 방법이 서로 다른 여러 장소에서 활동을 조정하고 사회생활을 규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몽골제국은 새로운 지역을 정복할 때마다 행성과 별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측정할 관측소부터 세웠다. 1271년 대도에 건설된 회회사천대(回回司天臺)에서는 이란 출신으로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였던 자말 앗딘(札馬兒丁)의 주도로 천문을 관측하고 역서(曆書)를 편찬했다. 회회사천대의 관측기기는 모두 이란에서 제작됐고, 도서관에는 페르시아어 서적이 갖추어져 있었다. 자말 앗딘 등 이란과 이슬람권 학자들이 소개한 서아시아의 우수한 천문학은 그 후 중국 천문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대표적 사례가 수시력(授時曆) 편찬이다. 1276년 곽수경(郭守敬) 등은 우수한 서아시아의 관측기기와 천문학을 응용해 새로운 역서인 수시력을 편찬했다. 이는 1281년부터 사용했는데 명나라 시대의 대통력(大統曆)도 기본적으로 여기에 따른다. 따라서 수시력은 중국 역사상 제일 긴 350여 년에 걸쳐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훌레구 울루스에서도 나시르 앗딘 투시가 설계한 천문대가 마라 가(타브리즈 남쪽의 작은 마을)에 건설되었는데, 1271년에는 중국 학자들까지 참여한 천문 관측에 기초해 작성된 ‘일 칸 천문표’가 봉정되었다.

14세기 몽골제국의 몰락은 실크로드를 따라 이루어졌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통합의 붕괴를 초래했다. 몽골제국에 이어 중국 대륙에 등장한 명나라는 극단적인 폐쇄정책을 썼으며 시장경제를 쇠퇴시켰다. 몽골제국 시대에 건조했던 대형 선박도 모조리 파괴했고, 농업 기반의 명나라 경제와 주자학 사상은 이를 답습한 조선에 경제적 사상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몽골제국의 뒤를 이은 유라시아의 강국 명, 청, 오스만투르크 제국 등은 국가의 존망이 내륙으로부터의 위협을 지켜내는 것이어서, 해양 진출에 대한 인식도 의지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13세기 칭기즈칸이 뿌린 씨앗은 15세기 유럽의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유럽인들이 시작한 대항해시대는 중앙유라시아의 위상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증기기관 선박의 수송 능력은 낙타에 화물을 싣고 사막을 오가던 무역을 원시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상징되는 대항해시대의 개막은 유럽의 우위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유라시아 무역의 패턴을 확 바꿔버린 역사적 사건이다. 몽골제국은 어떤 하나의 문명에 대한 편견이나 프레임을 누르고 과학기술, 농업, 국제적 지식 시스템을 새로 편성하고 강요했으며, 이 과정에서 지방 엘리트의 사상 독점을 무너뜨렸다.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하면서 혁명적인 전쟁기술을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보편적 문화로 세계의 시스템을 개편했다. 이 새로운 시스템은 몽골제국이 망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근대세계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이 시스템에는 몽골제국이 강조했던 자유무역, 자유로운 교통, 지식 공유, 여러 종교의 공존, 국제법, 치외법권 등이 21세기까지 고스란히 살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칸의 제국 몽골’ 전시회에서.
칭키즈칸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우리는 현대에 이렇게 개방적인 네트워크 세상에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면서 살지 못했을 것이다. 칭기즈칸은 잔혹한 정복자이기도 했지만 세계적 문명 통합을 이루어 근대문명을 촉발한 영웅이기도 하다.

※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약 30년간 4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 2018년 9월 Forbes Asia 200대 유망 기업에 서플러스글로벌이 선정됐다. 2015년부터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간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와 인류 무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들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2107호 (2021.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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