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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찬이 만난 부울경 혁신 리더(5)] 김현겸 팬스타그룹 회장 

동북아 대항해 시대를 꿈꾸다 

장진원 기자
스물여덟 청년이 창업한 해운사는 30여 년이 흐른 지금, 부산과 한국을 대표하는 복합 해운그룹으로 성장했다. 국내 최초 카페리 운항, 최초 국적 크루즈선사에 이어 동북아 복합물류 노선 개척에 이르기까지. 김현겸 회장과 팬스타그룹이 걸어온 길은 한국 해운업의 새 길을 열어온 도전과 혁신의 발자취다.

부산항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무역항이다. 동북아와 세계 물류의 거점 항만인 부산항의 물동량은 세계 6위 규모다. 항공운송의 메이저 기항지가 인천국제공항이라면, 부산항은 해상운송·여객을 책임지는 대한민국의 관문이나 다름없다.

부산항과 한국의 해운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이 있다. 팬스타그룹이다. 국내 최초의 국적 크루즈 운항사, 국내 선사 최초의 일본 통관면허 획득, 국내 최초 카페리 운영 선사, 중국-일본-한국을 연결하는 신항로 개발 등 “팬스타가 가는 길이 새로운 길”이라는 업계의 평가는 과언이 아니다. 지난 1990년 팬스타 창업에 나선 이래 한국 해운업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김현겸 회장은 부산과 부산항이 키워냈고 자랑할 수 있는 혁신 기업가다. 해운업에 뛰어든 지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김 회장의 도전과 혁신은 계속된다. 최영찬 선보엔젤파트너스 대표가 김 회장을 만나 팬스타그룹, 나아가 한국 해운의 대항해시대를 경청했다.

대학 졸업 후 1988년 해운회사에 입사했다. 입사 2년 만에 직장을 나와 28세 젊은 나이에 창업에 나섰다. 어떤 꿈을 꾸셨나.

초등학교 육성회비를 못 낼 정도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중학교도 야간으로 진학해 낮에는 관공서에서 사환으로 일했다. 태어나고 자란 부산 중앙동은 육교에만 올라도 부산항이 훤히 보이는 곳이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었고, 막연히 선장이 돼 외국을 오가며 돈을 많이 벌겠다는 꿈을 키우곤 했다. 하지만 한국해양대학교에 진학하려던 계획이 시력 기준에 미달해 물거품이 됐다. 당시 중동건설 붐 덕에 인기 있던 토목공학으로 진로를 변경했지만, 2학년 무렵에 이미 해운업에 뜻을 뒀다. 부전공으로 무역학을 택해 해운업을 배웠다. 졸업 후 해운사인 줄 알고 들어간 회사가 알고 보니 선박 없이 화물 운송을 중개하는 *포워더사였다.

*포워더(Forwarder)란 복합운송주선업자(NVOCC, Non-Vessel Operation Common Carrier)를 가리킨다. 선박 등 운송수단을 보유하지 않고, 화주와 운송수단을 연결해 수출입 화물 등 운송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진행하는 회사를 말한다.

2년 만에 퇴사해 동료 몇 명과 함께 1990년 회사를 차렸다. 경기도 군포 신혼집을 담보로 빌린 2000만원을 더해 5000만원을 사업 밑천으로 삼았다. 당시 가장 큰 해운사가 범양(凡洋)상선이었는데, 나는 그보다 더 큰 우주를 아우르겠다는 포부로 범성(凡星)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영어로 팬스타(PanStar)다.

해운업은 신생 업체가 진입하기 어려운 업종으로 알고 있다.

회사 설립 당시 국내 무역회사가 1만 개가 넘었다. 한 달에 컨테이너 100개씩, 1년에 1200개를 달성하자고 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화주 입장에서 신생 포워더를 선뜻 믿고 화물을 내줄 리 만무했다. 컨테이너 화물이 있는 회사를 물색해 사장 집까지 찾아가 설득하고, 약속한 운송기일을 철저히 지켜가며 신용을 쌓았다. 믿을 수 있는 포워더라는 입소문이 돌자 대기업들도 점차 일감을 맡기기 시작하더라. 1990년대 후반 들어선 국내 5대 포워더사로 성장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포워더 면허를 1년에 한 곳만 내줄 정도로 관리감독이 철저했다. 부산항의 포워더사도 100곳이 채 안 됐다. 지금은 신청만 하면 다 받아주는 신고제로 바뀌었다. 한국 사회의 신용이 그만큼 성숙했다는 뜻이다. 현재 국내 포워더사만 해도 4000곳이 넘는다. 다만 선주협회에 등록된 기업은 200개가 채 안 되는데, 그중 컨테이너선을 싣고 가는 선주는 우리를 포함해 15곳 정도에 불과하다. 단독 국적 선사로는 부산에서 우리가 유일하다. 굉장히 희귀한 사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 팬스타는 자체 선박을 보유한 선사다. 포워더로 입지를 탄탄히 굳혔는데 굳이 배를 소유한 선사로 변신한 계기가 있나.

회사가 커지고 수익이 나자 ‘내 배를 갖고 싶다’는 오랜 꿈이 다시 꿈틀거렸다. 포워더는 항상 남의 배에 공간을 확보해 고객 화물을 실어야 한다. 화물이 밀려와도 배를 확보하지 못하면 실을 수 없어 고객 니즈를 충족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당시 한일(韓日) 간 컨테이너 운송시장은 기존 선사들이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해 진입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눈길을 돌린 게 화물과 여객을 동시에 싣는 카페리였다. 국내에 카페리를 운영하는 선사 자체가 없었다.

안정적인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험에 뛰어들었다.

카페리는 일반 컨테이너선에 비해 10배나 비싸다. 주변에서 백이면 백 모두 무모하다며 말렸다. 하지만 남과 같은 길을 가선 성공할 수 없다는 믿음과 영업에 대한 자신감으로 밀어붙였다. 때마침 일본에서 건조한 지 5년이 채 안 된 선박을 매각하겠다고 나섰다. 그 배가 팬스타의 1호 카페리선인 2만2000톤급 팬스타드림호다. 제3국에 선박을 등록하면 세금을 아낄 수 있었지만, 드림호는 나의 꿈을 이뤄준 배인 만큼 당당히 태극기를 달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호 선박 운영이 처음부터 순탄하지만은 않았다고 들었다.

2002년 4월에 여객운송사업 면허를 취득해 부산-오사카 항로에 팬스타드림호가 취항했다. 하지만 내 배를 가졌다는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초기 영업이 최악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화주들이 카페리를 낯설어했다. 선사 경력도 전무했기에 화물이 모이지 않았다. 요즘 말로 하면 믿을 수 없는 ‘듣보’ 신세였다. 카페리, 즉 여객선은 정기선이다. 지하철·버스처럼 화물과 여객이 없어도 정기적으로 운항해야만 한다. 화물칸이 텅텅 빈 채 출항하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그렇게 한 번 운항할 때마다 수천만원씩 손해가 났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적자를 걱정할 정도였다. 하지만 고객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었다. 적자를 무릅쓰고 배를 띄웠다. 왕복 150차례 운항 동안 결항률 제로를 기록했다.

사업 초기에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해갔는지 무척 궁금하다.

1999년 설립한 일본 현지법인 ‘산스타라인’을 통해 일본 통관 면허와 철도운송 면허를 취득한 게 결정적이었다. 통관 절차를 간소화하고 해상·철도 운송을 연계하니, 4일 이상 걸리던 한일 간 운송 시간이 2일로 확 줄었다. 비용은 항공운송에 비해 20% 이하로 저렴한데 운송 시간은 비슷하니 화물이 늘기 시작했다. 그렇게 취항 1년 6개월 만에 이익을 내는 데 성공했다. 2002 한일월드컵을 기점으로 여행객과 물동량도 대폭 늘었다. 사업에 탄력이 붙으면서 승승장구했다.

크루즈 사업에 처음 진출한 것도 그 무렵이다.

국내 선사로는 최초로 크루즈 사업에 뛰어들었다. 2004년 12월부터 드림호가 오사카 항로를 쉬는 주말에 부산항 원나잇 크루즈를 시작했다. 매년 1만 명 이상이 이용하면서 부산을 대표하는 해양 관광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국내 크루즈 관광의 가능성을 확인한 계기다. 2007년에는 팬스타써니호를, 2008년 들어 팬스타허니호를 추가로 도입해 크루즈 사업을 본격화했다. 남해안크루즈, 현해탄크루즈 등 다양한 테마 크루즈를 개발했다. 국적 크루즈 사업은 나의 오랜 꿈이기도 하다. 2007년 무렵 우리가 가진 배가 세 척이었다. 엄청난 부자였다.(웃음)


크루즈 사업이 미처 순항하기도 전에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2008년 금융위기다. 끊임없는 위기의 연속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리먼브라더스발 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자 선박 연료비가 치솟았다. 엔고까지 겹쳐 선박 리스비가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치달았다. 경기가 침체되니 일본을 오가는 승객과 화물도 급감했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당시 1년 만에 400억원 적자를 냈다. 회사 부채를 전부 합치면 800억원에 달했다. 채권자들이 회사로 몰려와 아우성을 쳤다. 정말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때 국내 모 대기업이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찾아왔다. 회사와 배, 직원들을 모두 넘겨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모든 것을 바쳐 일군 회사와 사업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처지에 놓이니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무리하게 크루즈 사업에 수백억원을 쏟아부은 스스로를 원망하기도 했다. 2008년 도입한 팬스타허니호는 크루즈 전용선으로, 배 구입비 외에 수리와 개조에만 120억원을 들인 터였다. 제대로 운항도 못 해보고 위기에 빠져버렸다.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였다. 도대체 어떻게 파고를 넘었나.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절체절명의 순간 구원의 손길이 나타났다. 가장 큰 채권자인 일본 리베라그룹이 “한국 채무를 모두 갚을 때까지 기다려주겠다”는 게 아닌가. 사실 여기에도 비화가 있다. 당시 팬스타 인수에 나선 국내 대기업 총수가 직접 일본을 찾아가 리베라그룹 회장을 만났다고 한다. 우리 채무 일부를 출자전환해 동업을 하자는 제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리베라그룹 회장은 “김현겸과 이야기를 나누고 왔느냐”는 말부터 꺼냈다고 한다. “아니다”라는 답이 떨어지자 “사업상 도의가 없다”며 문전 박대를 했다고 한다. 이후 팬스타 회생 가능성을 점검한 리베라그룹은 “정상화에 자신 있느냐”는 질문과 함께 ‘8000만 달러에 이르는 채권 행사를 국내 채무를 모두 갚을 때까지 보류하겠다’는 서류를 보내왔다. 그간 쌓아온 신뢰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리베라가 기다려주겠다니 다른 채권자들도 슬슬 태도를 바꾸었고 상환 압박이 급격히 줄었다.

보유했던 선박은 어떻게 됐나.

고강도 구조조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팬스타써니호는 중국 코스코에 팔고, 팬스타허니호는 페널티를 물고 매도인에게 반환했다. 그렇게 재기할 자금을 마련했다. 경기가 호전되면서 사업이 다시 자리를 잡아갔고, 5년 만에 빚을 다 갚았다.

최근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이 이어졌다. 팬스타그룹도 영향을 받았나.

미국,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 공장들이 멈춰서니 선박회사도 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외려 팬데믹 위기가 우리에겐 기회가 됐다.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진 게, 선사들 입장에선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차라리 선임을 올리기 시작했다. 전 세계적으로 선임이 팬데믹 전보다 2~3배씩 올랐다. 우리나라나 중국 등에선 코로나 시국에도 공장이 쉬지 않고 돌아갔다. 물동량은 있는데 (코로나 감염으로) 하역을 담당할 사람이 없으니 체선이 이어졌고 선임도 계속 급등했다. 우리도 영문도 모르는 사이에 오른 선임 덕을 톡톡히 봤다. 비행기도 못 뜨니 마스크처럼 급한 화물들이 다 우리에게 오더라. 일반 컨테이너선은 일본 가는 데만 1주일씩 걸리는데, 우린 여객선에 특화된 회사라 하루면 충분했다. 중국에서 생산한 물건도 만 이틀이면 일본에 도착했다. 운송 시간이 비행기보다 빠르니 화물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많을 때는 한 척에 컨테이너를 100개씩 실었다. ‘팬스타 코리아 랜드브리지(PKLB)’의 위력이 발휘된 순간이다.

팬스타가 개척한 PKLB 개념은 동북아 물류의 중심을 한국으로 이끈 획기적 시도로 평가받는다.

어느 날 군산에서 저녁식사 후 차를 타고 부산으로 왔는데 2시간 30분밖에 걸리지 않더라. 2012년 여수박람회를 앞두고 호남지역 고속도로 인프라가 개선돼 훨씬 빠르고 안전한 영호남 간 육상운송이 가능해진 덕분이었다. 중국 산둥에서 군산까지 배로, 다시 군산-부산 간은 육상노선으로, 부산에서 오사카까지 해상노선으로 잇는다면 중국-한국-일본 간 완벽한 고속 해상·육상 복합화물 노선이 완성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 한국이 중국과 일본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구상이었다. 2010년 1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PKLB 노선을 이용하면 토요일 산둥반도 스다오에서 선적한 화물이 일요일 아침 군산에 도착한다. 트럭에 실린 화물이 고속도로를 달려 일요일 점심께 부산항에서 선박으로 환적돼 월요일 아침이면 오사카에 닿는다. 금요일에 중국에서 출발한 화물을 월요일 아침에 일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물류 시간을 정말 획기적으로 줄인 묘안이다.

그동안 중국에서 일본까지 해상운송은 짧아야 4일, 길게는 일주일 가까이 걸렸다. PKLB는 이를 리드타임 40시간 이내로 줄여 물류비를 대폭 절감했다. 항공운송과 동일한 수준이다. PKLB 물량은 매년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2021년에는 전년 대비 40% 넘는 증가율을 기록했다. 항공운송 못지않은 속도와 가격경쟁력으로 해상운송에만 의존할 때의 단점을 완벽하게 극복한 수단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현재는 북중국 다롄-인천 간 페리와도 협업하는 등 물류 영역을 점차 확대하고 있다.

PKLB 노선이 팬스타의 위기 극복을 최전선에서 해결할 든든한 포트폴리오가 된 것 같다.

한·중·일 삼국을 잇는 PKLB 서비스가 안정적으로 구축되면서 한일 간 무역분쟁이 발생해도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게 됐다. 한일 간 물동량이 줄어도 중일 간 거래는 계속되기 때문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를 둘러싼 갈등으로 줄어든 한중 간 물동량을 중일 간 거래로 극복한 것도 마찬가지다. 동일본 대지진 때 일본 물동량이 크게 줄었음에도 팬스타가 큰 타격을 받지 않은 것도 PKLB 덕분이다. 해상과 육송을 연계한 PKLB 서비스는 동북아시아에서 대체 불가한 독보적 물류 루트가 됐다. 우리에게도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다.

화물운송과 달리 여객 사업은 코로나19로 타격이 컸을 것 같다.

그렇다. 부산-일본 항로 여객선 운항이 전면 중단됐고, 연안 크루즈도 2년 넘게 발이 묶인 상태다. 다행히 부산항 원나잇 크루즈는 지난 4월부터 운항을 재개했고, 5월부터 본격적인 정기 운항에 들어갔다. 매 항차 200명 넘게 승선하는 등 예전의 인기를 되찾는 중이다. 한일 간 뱃길도 조만간 열릴 거라 기대한다. 그렇게 되면 그간 억눌렸던 양국 간 여행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팬스타는 여객선 기준 화물운송으로 어떤 외부 변수에도 고객이 신뢰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코로나로 여객선이 묶이는 상황에서는 역으로 화물선을 기존 여객선과 동일한 스케줄로 한 치의 오차 없이 운항해 고객의 믿음에 보답했다. 고객들 역시 신뢰로 화답해 화물 물량이 많이 늘었다. 지금도 팬스타는 ‘좋은 위기’를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최근 반가운 뉴스도 나왔다. 대선조선을 통해 친환경 크루즈 선박을 건조한다는 소식이다.

이번에 발주한 크루즈페리는 야외수영장, 발코니객실 등 정통 크루즈 못지않게 호화로운 시설을 갖출 예정이다. 2025년 취항해 한국에 본격적인 크루즈 여행 시대를 열 것이다. 나아가 한·중·일을 비롯한 동북아시아는 물론 동남아지역을 무대로 하는 국제크루즈 운항도 추진할 계획이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접었던 국적 크루즈 선사의 꿈을 다시 실현하게 되는 셈이다. 팬스타그룹 창립 32년 만에 처음 신조하는 선박이라는 점에서도 의미는 막대하다.

중견 조선소인 대선조선에 발주한 것도 지역에선 화제였다.

오랜 시간 고민했다. 현대, 삼성, 대우 등 국내 대형 조선소나 크루즈선 건조 경험이 많은 유럽과 일본 조선소에 맡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산에 있는 대선조선을 파트너로 택했다. 부산에 본사를 둔 팬스타와 대선조선이 힘을 모아 국내 최초의 호화 크루즈페리를 건조함으로써 지역업체 간 상생 모델을 만들고자 했다. 지역 조선소가 건조 역량을 한 단계 높임으로써 세계시장으로 진출하는 토대를 제공한다는 의의도 크다. 현재 국제사회는 화석연료 소모량을 최소화하는 친환경 선박을 선택이 아닌 필수 사항으로 요구하고 있다. 새로 건조하는 크루즈페리는 하이브리드 추진 장치와 황산화물 제거 장치를 탑재하는 등 고효율 친환경 선박으로 설계했다. 환경을 보호하고 운항비용도 줄여 고객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

평소 ‘견리사의(見利思義, 눈앞에 이익이 보이거든 의로움을 생각하라)’를 경영 신조로 강조한다. 끝으로 젊은 경영자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들에게도 “실패는 상처가 도지는 것처럼 반복될 수 있다”고 주의를 준다. 실패하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할 수 있는 사람이 사업가로 나서야 한다.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데, 무엇보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대학 시절부터 ‘내가 뭘 하고 싶고, 뭘 잘할 수 있나’를 깊이 고민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래야 후회가 없고, 인생을 낭비하지 않게 된다. 청년 창업도 신중해야 한다. 혼자서 열 사람 몫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적어도 두세 사람 몫을 혼자 거뜬히 감당할 자신감이 있을 때 창업에 도전해보라 말하고 싶다. 일단 창업을 했다면 꾸준히 힘을 축적하고, 사업 확장에 대한 확신이 들면 그 축적된 힘으로 끝까지 뛰는 뚝심을 발휘해야 한다.

※ 최영찬 대표는… 선박과 플랜트 분야 제조업을 영위하는 선보공업의 차세대 경영인이다. 제조업체들이 스타트업 및 투자 생태계와 어떻게 공존하고 미래 사업을 만들지 고민하면서 선보엔젤파트너스와 기업 연합형 CVC인 라이트하우스를 창업했다. 200여 개 스타트업에 투자했으며, 컴퍼니빌딩 프로젝트와 기존 포트폴리오 기업을 공동경영 형태로 성장시키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창업한 2개 법인과 별도로 3개 프로젝트의 공동대표로도 활동하면서 산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 정리=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최재승 객원기자

202209호 (2022.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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