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옥 앞 빌딩 꼭대기에 써 붙인 ‘된다, 된다, 잘된다, 더 잘된다’란 구호가 주문처럼 들린다. 입속에서 몇 번 곱씹다 보니 정말로 무슨 일이든 이루어질 것만 같다. 고객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해내고 만다는 도전 정신은 양재생 은산해운항공 회장이 평생을 지켜온 경영 철학이다.
‘믿고 맡길 수 있다’는 말만큼 신뢰의 최대치를 드러내는 표현이 있을까? 더욱이 타인의 일과 업무를 대행하는 입장에선 이 말의 무게가 더욱 무겁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부산을 대표하는 복합운송주선(포워딩) 업체인 은산해운항공이 그렇다. 화주가 맡긴 물건을 적시에 안전하게 운송해야 하는 포워딩업의 특성상 고객의 신뢰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과도 같다. 지난 1993년 은산해운항공을 창립한 양재생 회장은 부산은 물론 국내외 어디서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통한다. 2002년 부산아시아경기대회 성화 봉송, 2004년 현대중공업의 초대형 엔진을 무사히 운송해내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에 앞서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도 은산과 양 회장은 언제나 고객신뢰라는 화두를 놓지 않았다. 최영찬 선보엔젤파트너스 대표가 양 회장을 만나 신뢰와 믿음, 초긍정을 바탕으로 한 위기 극복의 진수를 경청했다.
창업 전 해운회사에서 오래 근무했다고 들었다.경남 함양 지리산 자락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5형제 중 장남으로 어머니를 도우며 어렵게 자랐다. 고등학교를 마친 후 친척 형님의 추천으로 부산으로 와 동서해운에 입사해 19년간 일했다. 영업차장으로 퇴사했는데, 직장생활 동안 입출항, 선적, 영업 같은 물류의 전반을 배우며 창업의 꿈을 키웠다.
1993년, 37살 나이에 창업했다. 언제부터 사업을 꿈꿨나.직장생활을 하던 21살 무렵, 생맥주를 파는 간이주점을 식구들과 함께 운영했다. 요즘 말로 하면 투잡이다. 직장생활을 하면 할수록 나와는 맞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사업이 곧 내 DNA라는 생각이 갈수록 커져갔다. 회사에서 많은 걸 배웠지만 어찌 보면 내겐 죽은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은행에서 빌린 자본금 3000만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소년 가장 노릇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꿈은 언제나 원대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대기업 총수가 될 거라 생각하곤 했다. 정치로 치면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도 꿨다. 실력은 아무것도 없이 꿈만 컸다.(웃음) 66세인 지금도 어릴 때 가졌던 꿈이 원대하게 꿈틀대는 것을 느낀다. 막연하지만 무엇이든 도전하면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다. 내공과 경험이 쌓인 지금은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더 강해졌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돌파구는 생기게 마련이고, 한쪽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
많은 경쟁사 가운데, 은산의 초기 성장을 이끈 차별점은 무엇이었나.창업 이듬해인 1994년, 소량화물들을 한데 모아 대형 컨테이너로 일괄 운송하는 시스템을 국내에서 처음 시작했다. 대다수 포워딩 업체가 단가가 낮고 운송 절차도 복잡한 소량화물을 피하던 시절, 역발상 전략을 편거다. ‘소량화물은 은산에 맡기면 된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시장에서 인정을 받았고 실적 성장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작은 일이 크게 되고, 작은 화물이 크게 되는 진리를 알고 있다. 규모가 큰 화물을 서비스해주는 곳은 그때나 지금이나 많다. 하지만 소량일수록 더 정성을 기울이고 노력해서 완벽한 서비스를 펼치려는 곳은 없었다. 작은 화물을 맡기는 회사들이 우리와 함께 성장해온 셈이다. 세상은 결국 인연이다. 좋은 사람, 좋은 회사를 만나면 나도 좋은 기운을 받는다.
결국은 믿음과 신용이라는 화두를 지켜오신 것 같다.포워딩은 화주와 선주를 연결해 완벽한 운송을 중개하는 일이다. 우리 같은 회사는 고객이 믿고 신뢰하게 하는 일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열심히, 또 완벽히 일하는 게 곧 고객이 돈을 벌고 이익을 내는 길이다. 한두 번은 인맥으로 이어질지 몰라도, 결국 고객의 이익을 확실하게 만들어줄 때만 포워더의 생존이 가능하다.
신용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다. 업의 특성상 영업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지금도 사람을 만나는 일이 주요한 업무인데, 창업 당시에는 기본적으로 하루에 20~30곳을 방문했다.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직접 운전하고 다녔다. 수출·수입하는 기업, 화주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다 만나겠다는 각오였다. 어떤 날은 굴뚝만 보고 무작정 들어가기도 했다. 때로는 “우리는 수출 안 하니, 다른 사람 소개해주겠다”고 한 적도 있었다. 이 모든 게 그저 재밌었다. 문전박대도 당했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희열을 느꼈다. 지금은 나를 괄시했지만 두고 보자. 더 많은 성과를 내서 멋지고 새롭게 ‘재생’하겠다고 다짐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아야 발전하는 법이다. 부정적인 순간 상대가 아니라 내가 손해를 본다.
IMF 외환위기를 오히려 급성장의 발판으로 삼은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 역시 결국 사람, 즉 네트워킹의 힘이었던 것 같다. 1997년 연 매출 91억원 수준에서 이듬해 222억원으로 급증했다. 위기가 왔을 때 좋은 기회가 열린다는 믿음이 있다. IMF 외환위기도 그랬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 전조가 있듯이, 머잖아 큰 위기가 닥쳐오리란 걸 나름 1년 전부터 느꼈다. 영업을 위해 밤낮으로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동안, 많은 경영인들이 사업이 어려워진다, 전망이 밝지 않다는 말을 쏟아내는 게 아닌가. 심각한 위기의 징후였다. 당장 1997년 시무식 때 전 직원에게 월요일은 오전 9시에서 7시 30분, 화~토요일은 8시로 출근시간을 당기라고 선언했다. 직원들 반발이 컸지만, 이의 있으면 100% 사직서를 받겠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위기가 터졌다. 비상경영에 돌입한 화주들이 새벽부터 출근해 여기저기 연락해도, 실제 전화를 받고 일을 처리해주는 곳은 은산밖에 없었다. 불평했던 직원들도 믿고 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은산으로 일감이 몰려들었다.
‘은산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는 업계의 신뢰가 비로소 빛을 보게 된 사례다. 부산아시아게임 성화 운송도 회자된다. 2001년 미국 9·11테러 후, 항공화물 검색 기준이 엄격해졌다. 대회 개최를 한 달 앞둔 상황에서 43개국에 성화 봉송 장비를 보내야 했는데, 성화봉 안에는 가스가 장착돼 있다. 인화물질 운송 기준은 나라마다 제각각인 데다 테러 후 더 엄격하게 기준이 적용돼 운송을 맡았던 대기업마저 “도저히 안 된다”며 손을 들고 나갔다. “은산이 할 수 있겠느냐”는 제안을 받아든 순간 망설이지 않았고, 결국 15일 만에 성화 운송을 완벽히 끝냈다. 직원들이 직접 성화를 들고 비행기에 오르고, 공항에서 받은 성화를 트럭으로 운송하고, 나라마다 전담 직원을 두는 등 육해공에 걸친 특급작전이었다. 대기업도 못 하는 일을 은산이 해냈다는 평판이 퍼져나갔고, 국제 운송업계에서도 큰 화제를 모으며 브랜드 가치를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됐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닥친다. 다만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별해내는 계기가 바로 위기다.
2004년 현대중공업의 초대형 엔진 운송도 화제였다.당시는 국내 조선업이 엄청난 호황을 누리던 시절이었다. 울산 현대중공업이 높이 13m, 무게 700톤에 달하는 엔진을 건조해 독일 선사에 납품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다 짓고 나니 울산에 그 정도 크기와 무게를 선박으로 옮길 크레인이 없는 게 아닌가.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가 해보겠다”고 나섰다. 며칠 밤을 새우며 방법을 찾은 끝에, 부산에 2000톤짜리 골리앗크레인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수소문 끝에 일본에서 14m가 넘는 대형 바지선을 들여와 4시간에 걸쳐 엔진을 옮겨 실었다. 다시 바지선에 실은 엔진을 부산항 2부두로 가져와 골리앗크레인으로 선박에 싣는 데 성공했다. 엔진을 만든 현대중공업도, 해운업계도 모두 깜짝 놀란 일대 사건이 됐다. 현대중공업 사내방송과 신문에 소개될 정도였다. 대형 엔진은 그렇게 안전하게 독일 하데베조선소로 옮겨졌다.
어려운 일을 자처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성공하지 못하면 그만큼 리스크도 커지는 것 아닌가.사실 그간 해오던 일만 잘해도 큰 위험은 없다. 포워더로선 더욱 그렇다. 운송에 실패하거나 하자가 생기는 순간 엄청난 페널티, 즉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간 어렵게 쌓아온 거래 관계도 끊어지기 쉽다. 하지만 난 항상 위기가 기회라고 생각한다. 직원들과 함께 앞장서서 ‘된다, 잘된다, 더 잘된다’는 말을 주문처럼 외운다. 그러다 보니 어느 때부턴가 남들이 손사래 치는 어려운 일들이 으레 은산으로 온다. 그게 바로 우리의 경쟁력이다. 없던 방법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만, 우리가 성공하면 그게 곧 업계의 표준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화물운송에 원천기술이나 특허가 있는 건 아니다. 화주 입장에선 한번 운송하고 나면 그만이지만, 없던 길을 은산이 개척해냈다는 자부심과 신용이 남게 마련이다.
소량화물 개척도 결국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었다.일반적으로 LCL(Less than Container Load)이라 부른다. 소량화물 화주 여럿을 모아 컨테이너 한 대에 실어 운송하는 방식이다. 은산의 자랑 중 하나인데, 많게는 30개, 적게는 10~20개 화물을 컨테이너 하나에 싣는다. 그전까지는 아무리 적은 화물이라도 ‘기본료’ 개념으로 컨테이너 한 대 비용을 치러야 했다. 이를 우리가 30분의 1 비용으로 낮춘 것이다. 부산에 본사를 둔 포워더 중에선 우리가 유일하다. 화주들에게는 물류 운송의 획기적인 변화일 수밖에 없다. 엄청난 비용 절감과 더불어 안정적인 운송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컨테이너에 싣는 것도 아니다. 마치 테트리스 게임을 하듯 노하우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니 다른 곳이 따라 하려 해도 진입장벽이 높다. 은산의 성장뿐 아니라 우리나라 수출기업의 비용 절감, 안전한 배송 시스템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화주의 이익을 끊임없이 고민하다 보니 나온 방법인데, 그게 곧 우리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현재 LCL을 시행하는 곳은 전국에 7~10개 회사에 불과하다.
팬데믹에 이어 국가 간 무역분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은산은 여전히 큰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비결이 뭔가.은산해운항공의 매출은 2020년 1576억원에서 2021년 3013억으로 증가했다. 무엇보다 선임이 상승한 덕을 봤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평소 갈고닦아온 노력과 노하우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고객이 원하는 스케줄을 정확히 맞춰주어야 하니 가격 협상력이 약한 작은 회사들이 우리를 찾아온다. 은산이면 가능하다는 믿음 때문이다. 다른 운송사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고객도 은산을 찾아와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쌓아온 실력과 내공이 위기에서 옥석을 가리게 하는 것이다. 결국 화주들은 자기들의 니즈에 맞춰 움직이게 마련이다. 물론 위기가 지나고 해운시장이 안정되면 떠나가는 고객들도 있을 것이다. 은산이 올해 창립 29년 차인데, 부산에 있는 전체 포워딩 업체 중 종업원 100명 넘는 곳은 5% 남짓이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30년간 살아남은 업체가 5개도 안 된다. 진입장벽은 낮지만 생존은 어려운 업종이 바로 포워딩이다.
최근 물류와 전혀 다른 길에 나섰다. 바이오와 생수사업에 도전한 배경이 궁금하다.평소 알고 지내던 한 기업인이 폐암에 걸려서 일본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일본 의사로부터 한국에 가면 이러이러한 물이 있다며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 그분이 올해로 18년째 마시는 물이 바로 금천게르마늄 생수인 ‘헬시언’이다. 나 역시 10년 넘게 먹고 있는데 효능에 확신을 가져 인수하게 됐다. 혈액 속 수소이온지수(ph)와 가장 유사한 ph 7.5~8.2 수준이며, 칼슘, 마그네슘, 칼륨 등이 풍부하다. 무엇보다 인수 후 전 직원과 가족에게 이 물을 제공하고 있다. 1년에 수억원이 들지만, 은산 가족들이 함께 건강해진다는 뿌듯함이 크다. 은산바이오 역시 개인적인 체험에서 시작했다. 식약처에서 인증받은 유산균으로, 그 효과를 가장 톡톡히 본 사람이 바로 나다. 현재 ‘이피미 바이오프로’라는 제품명으로 생산 중이다. 본업인 해운항만도 중요하지만 물과 인연을 맺고 은산바이오를 시작한 것도 개인적으로는 보람 있는 일이다. 어차피 제조는 역량이 부족하니 유통에 집중하려 한다.
부산항은 세계 6위 무역항이다. 부산항의 미래와 이를 위한 은산의 준비가 궁금하다.부산은 지정학적으로 지구촌 최고의 갑문이다. 현재 지구촌 물동량의 75%가 부산항을 거친다. 환적화물로는 싱가포르에 이어 2위다. 물류는 앞으로도 국가경쟁력을 계속 갖춰가야 하는 산업이다. 북미와 서구를 거쳐 아시아 각지로 가는 경로 중 부산만큼 지정학적으로 완벽한 곳이 없다. 그런 면에서 가덕도 신공항은 새로운 퀀텀점프를 위한 발판이 될 것이다. 글로벌 물류는 대량의 컨테이너가 물류기지로 모이고, 여기서 다시 항공 편으로 빠르게 세계 각지로 퍼지는 ‘Sea&Air’ 복합물류로 바뀌고 있다. 글로벌 물동량 6위, 환적량 2위인 부산에 공항이 들어서면 싱가포르도 제칠 수 있다. 부산이 지구촌 물류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은산도 국내뿐 아니라 글로벌기업을 목표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 중국과 베트남, 미국 투자에 그치지 않고 글로벌 진출을 확대할 계획이다.
※ 최영찬 대표는… 선박과 플랜트 분야 제조업을 영위하는 선보공업의 차세대 경영인이다. 제조업체들이 스타트업 및 투자 생태계와 어떻게 공존하고 미래 사업을 만들지 고민하면서 선보엔젤파트너스와 기업 연합형 CVC인 라이트하우스를 창업했다. 200여 개 스타트업에 투자했으며, 컴퍼니빌딩 프로젝트와 기존 포트폴리오 기업을 공동경영 형태로 성장시키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창업한 2개 법인과 별도로 3개 프로젝트의 공동대표로도 활동하면서 산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정리=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최재승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