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진호의 ‘음악과 삶’ 

만령절(Allerseelen)의 노래들 

꽃은 말을 가지고 있고, 예쁘며, 여러 기능이 있다. 시인은 꽃을 소재로 시를 쓰고, 작곡가들은 그런 시에 선율을 붙여 노래를 만든다. ‘만령절’이라는 노래에는 꽃이 있고, 죽은 이들을 추모하는 내용과 그들을 떠나보낸 이들을 위로하는 내용이 있다.

▎만성절을 맞이하여 헝가리 등지에서 사람들이 촛불을 켜놓고 추모하고 있다. / 사진:Xinhua
동시이자 동요인 ‘과꽃’은 올해에도 어김없이 피었을 과꽃을 무척 좋아해서 과꽃밭에서 아주 오래 살았던 이 땅의 누나들을 노래한다. 그런 누나들이 가을이면 더 생각난다고도 노래한다. 1953년에 발표된 이 동요 속 과꽃은 국화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로, 원래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남부 지방에서 살던 풀이었는데, 18세기 초에 중국에 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가 그 씨앗을 파리의 식물원에 가져가 전 세계에 퍼졌고, 이후 개량되어 다양한 품종이 탄생하게 되었다.

헤르만 폰 길름(Hermann von Gilm, 1812~1864)이라는 오스트리아의 법률가이자 시인은 19세기에 과꽃을 자신의 시에 담았다. 그의 시집 『마지막 장(Letzte Blätter/The Last Pages)』에 수록된 여덟 번째 시에는 한반도 북부가 원산지인 과꽃과 유럽이 원산지인 레세다꽃이 등장한다.

탁자 위에 향기로운 레세다꽃들을 가져다 놓고
최근에 핀 붉은 과꽃도 여기로 가져와서
우리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 나눠요
오월의 그날처럼
내게 손을 줘요, 몰래 잡을게요
사람들이 봐도 상관하지 않아요
내게 당신의 달콤한 눈길만 주세요, 오월의 그날처럼
모든 무덤 위에 꽃이 피고 향기가 나는 날이에요
일 년에 하루, 죽은 영혼조차 자유로운 오늘
내 마음속으로 와줘요, 당신을 다시 안을 수 있도록
오월의 그날처럼


▎하얀 미뇨네트 / 목서초(white mignonette)로도 불리는 레세다 알바(Reseda alba). 레세다의 한 종이다. / 사진:위키피디아
레세다는 유럽에서 노란색 염료를 뽑아내기 위해 오래전부터 재배하고 키웠던 식물이며, 달콤한 향을 낸다. 관상용 식물로도 사랑받는 이 식물의 영어 이름 ‘reseda’는 치유, 회복, 휴식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resedare’에서 유래했다. 레세다꽃과 ‘믿음직한 사랑, 사랑의 승리’ 등을 뜻하는 과꽃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시인은 누군가를 위로하고 사랑하고 있었다. 지난 5월에는 살아 있었을, 지금은 죽은 누군가를 마음속에서 기리고 있었다. 헤르만 폰 길름이 그리워하는 이는 혹시 키가 작은 아이였을까? 그래서 키가 40~130㎝인 레세다를 자신의 시 안에 녹여냈을까.

‘만령절(Allerseelen)’이 위에 소개한 시의 제목이다.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만령절(萬靈節, Allerseelen, Op. 10-8)’은 1883년에 이 시에 선율을 입혀 작곡한 같은 이름의 가곡이다. 우아하면서도 슬픈, 위로의 노래다. 작곡가 자신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가 반주하고 소프라노가 부르는 노래를 인터넷에서 들을 수 있다. 오래전에 녹음한 곡이라 더 고풍스럽고, 추억에 잠기게 한다.

축일로서의 ‘만령절’은 11월 2일이다. 만령절 대신에 위령제(慰靈節) 또는 위령의 날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 만령절의 영어는 ‘All Souls’ Day’이다. 모든 죽은 자의 영혼을 추모하는 날이 만령절이다. 죽은 평범한 사람들을 모두 기리는 날이 있다면, 평범하지 않은 이들만 추모하는 날도 있다. 11월 1일은 유럽의 가톨릭 문화에서 평범하지 않은 모든 성인을 추모하는 날이다. 이름하여 ‘만성절(萬聖節, All Saints’ Day)’이다. 로마 교황청이 시성(諡聖)한 모든 성인의 수, 즉 만성절에 추모하는 성인의 수는 대체로 1만 명이라고 한다. 시성이란 ‘죽은 후에 성인품(聖人品)으로 올리는 일’(네이버 국어사전)을 말한다. 11월 1일 만성절을 국가 공휴일로 정한 일부 기독교 국가가 있고, 11월 첫 번째 일요일을 만성절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처럼 ‘만성절’과 ‘만령절’은 성격이 분명 다른 날이지만,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는 현대인들이 있고, 그런 세태를 아는 교회도 있다. 오늘날에는 만성절을 만령절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이가 많아 최근의 가톨릭교회는 11월 1일에 아예 세상을 떠난 모든 이를 추모하는 것으로, 즉 가족과 성인을 함께 추모하는 것으로 정했다.

성스러운 ‘만성절’과 ‘만령절’ 이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을까? 있다. 10월 31일 핼로윈이다. 할로윈으로도 불리는 핼러윈의 영어 ‘Halloween’에서 ‘hallow’는 성인(saint)을 뜻한다. 그래서 원래 만성절은 ‘Hallow’s Day’이기도 했다. 만성절이 ‘Hallow’s Day’라면 만성절 전야는 ‘All Hallows’ Eve, All Saints’ Eve’였고, 나중에 이것이 ‘Halloween’이 되었다.

특별한 날 혹은 축제로서의 만성절 전야라는 관념은 어떻게 발생했을까. 배려 때문인 것 같다. 로마제국이 알프스산맥 주변에서 살았던 인도 유럽인인 켈트족을 정복하면서 그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했는데, 이들 원주민의 전통적 풍속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만성절은 새롭게 강요하거나 추천되어야 하는 날이었고, 그 하루 전날 켈트족이 과거의 전통대로 무언가를 하는 것을 로마제국은 문제 삼지 않았다. 이처럼 유럽의 이야기였던 핼러윈이 어떤 이유로 오늘날에는 영미권에서 즐기는 전통 행사가 돼버렸고, 영국과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는 문화적·상업적 축제의 날이 되었다. 문화의 속성 중 하나가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나가는 것이라는 점을 잘 알려주는 역사다.


▎오스트리아 화가 페르디난드 게오르크 발트뮐러(Ferdinand Georg Waldmuller, 1793~1865)의 ‘만령절 날에(Am Allerseelentag, 1839)’. / 사진:위키피디아
문화는 퍼져나가면서 변화한다. 그리스와 동유럽, 러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역할을 하는 동방정교회에서는 오순절이 지난 후 첫 번째 일요일을 만성절로 본다. 오순절(五旬節, Pentecost)은 예수의 부활 이후 50일째 되는 날로서, 대체로 5월 중순이나 말에 해당한다. 독일과 북유럽에는 만성절이 아닌, ‘마녀들의 밤’이라는 뜻을 지닌 ‘헥센나흐트(Hexennacht)’가 있다. 이것은 독일 및 북유럽 등지에서 전해 내려오는, 4월 30일 밤에서 5월 1일에 걸쳐 열리는 민속축제다. 축제 속 5월 1일은 기독교의 성녀 발부르가(Walburga)가 교황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던, 성스럽고 신비한 날이었고, 그 하루 전날은 중세 이래 1년에 한 차례 마녀들이 여는 연회가 돼버렸다. 주로 독일에서 열렸던 ‘발푸르기스의 밤(Walpurgisnacht)’이 4월 30일이고, 5월 1일은 성녀 발부르가를 기리는 날이라는 설이 있다. 4월 30일, 더 나아가 5월 1일까지를 일부에서는 독일판 핼러윈이라고도 부른다. ‘핼러윈-만성절-만령절’과 ‘발푸르기스의 밤-성녀 발부르가의 축일’은 내용상으로는 분명 다르지만, ‘떠들썩한 마녀의 전야제에 이어지는 성스러운 날’이라는 구도는 같다. 유럽인들이나 영미인들은 하루는 떠들썩하게 놀고, 그다음에는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는 삶을 살다가, 최근에는 이틀에 걸쳐 떠들썩하게 놀며 먹고 마시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언제이든 마녀를 상징하는 괴기한 옷이나 나무 등을 장작불로 태우면서 논다.

무신론자로 알려졌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가곡 ‘만령절’은 먼저 세상을 떠난 누군가와 함께했던 사랑의 시간을 추억하는 의미인 것 같다. 깊은 위로를 안겨주는 작품이다. 슈트라우스의 선배인 프란츠 슈베르트는 1816년에 ‘만령절의 기도(Litanei auf das Fest Allersellen)’라는 가곡을 작곡했다. 독일 시인 요한 게오르크 야코비(Johann Georg Jacobi, 1740~1814)의 시 ‘모든 영혼은 평화로이 쉬라’에 곡을 붙였다.

평화로이 쉬라, 모든 영혼이여
두려운 고통과 달콤한 꿈을 끝낸 영혼들
출생과 죽음이 없이
평화로이 쉬라, 모든 영혼이여!
사랑스러운 소녀들의 영혼과 눈물은 셀 수 없다
그들을 버렸던 나쁜 이가 있었다.
눈먼 세상도 그들을 내쳤다.
세상과 이별한 모든 이들, 모든 영혼은 쉬시오, 평화 속에
태양을 향해 웃지 못하고,
달이 뜨면 가시덤불 위에서
잠 못 이루었던 사람들.
언젠가 순수한 천국 빛 속에서
신을 대면하게 되리니
이 땅에서 떠나간 모든 이들과 모든 영혼은 평화로이 쉬라!

※ 김진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202212호 (202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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