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진호의 ‘음악과 삶’ 

시간이 흐른다는 것 

한 해가 갔고, 새해가 왔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그만큼 커졌고, 가깝던 것들은 그만큼 멀어졌다. 이런 사실들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가깝고, 친숙하고, 변치 않는 것들이 있고, 우리는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 지구 위의 음악도 우리가 늘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우리는 우리를 기다려주는 것들과 사람들도 좋아한다.

▎19세기 영국의 잡지 여흥의 시간(The Leisure Hour, 1864)에 실린 ‘이녹 아든’ 삽화
1926년 미국 천문학자 에드윈 파월 허블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두운 은하들이 내는 빛이 점차 붉은색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망원경을 통해 확인했다. 관측된 적색편이 현상에 따라 그 은하들은 우리로부터 멀어져간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은하가 멀어져간다면 은하가 구성하는 이 우주는 팽창하고 있을 것이다. 1926년으로부터 100년이 좀 덜 되는 시간이 흘렀다. 우주는 그만큼 팽창했을 것이고, 작년보다 좀 더 팽창했을 것이다. 이 우주에서 예전에는 가까웠던 것들이 그만큼 멀어졌을 것이다.

우주 자체가 확장되고 있고, 그렇게 크기가 변하는 우주에서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음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는 집은 우주의 관점에서 항상 같은 곳에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퇴근 후 항상 거기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 집으로 간다. 우리의 의식 저 깊은 곳에, 어떤 장소는 변함없이 거기 있다. 20년이 지난 뒤 찾아가도 예전에 살던 집이 여전히 거기에 존재하듯이 말이다. 우리의 직관에 따르면 - 흘러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과 달리 - 어떤 공간은 거기에 콱 박혀 있다. 어떤 공간이 같은 장소에 그대로 박혀 있다고 우리가 믿는 것을 ‘동소성의 가정’이라고 한다. 현대과학은 이것이 틀렸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 공간이 같은 장소에 그대로 박혀 있다는 생각은 거대한 우주의 관점에서나 틀린 것이고, 지구에서 일상을 사는 우리의 오래된 정서적 관점에서는 맞다. 우리의 무의식 저 밑에서 우리는 어떤 것들이 변치 않고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맞는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늘 거기 있는 것들은 바쁘게 살아가며, 변화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오랜만에 찾아간 고향 집의 모습은 여전히 푸근하고, 거기 살고 계LIFE시는 부모님들은 우리에게 정신적 위안을 준다.

우리는 그런 부모님들을 닮는다. 유전자의 힘에 의해서든 문화적인 요인에 의해서든 우리는 그렇게 된다. 그럼으로써 인간사회에서 그대로 박힌 어떤 불변성을 유지해간다. 자신에게 전해진 부모님의 유전자와 문화에 의해, 어른이 되어서 “현실에 던져진 나(어떤 남자아이)는 철이 없는 아들이 되어서 이곳저곳에서 깨지고 또 일어서다 외로운 어느 날 꺼내본 사진(을 보니) 그 속에(서) 아빠를 닮아 있는” 자신을 본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필자와 이름이 같은 가수 김진호의 노래 [가족사진]의 가사다.

우리의 기억, 우리의 정서와 감정, 그에 기초한 예술은 우리의 세계 인식에 기초한 것 같다. 고향에 대한 시가 우리를 감상에 젖게 한다면, 그 배경에는 앞에서 말한 우리네 마음속 동소성의 가정이 있는 게 아닐까. 시인 정지용의 [향수]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고 노래하는데, 우리 중 대부분은 정말로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의 경험을 차마 잊지 못한다. ‘향수’ 속 잊지 못하는 고향 집에는 누가 있는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있다. 아내는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주으면서” 거기에 있다. 이런 광경도 “차마 꿈엔들 잊을 수 없다.” 정지용은 그의 나이 11세에 결혼한 아내를 고향 집에 놔두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27세 때 일본에서 이 시를 썼다고 한다.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은 이 차마 잊을 수 없는 명시에 위대한 작곡가 김희갑이 붙인 노래를 아무렇지 않게, 그러나 잊을 수 없게 노래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고향을 등지고 타향에 간 이들이 고향에 되돌아오는 이야기는 어쩌면 상술한 동소성의 가정에 기초한 덕분에 우리 마음을 아리게 후벼 파는, 매우 보편적인 감정을 자아내는 설정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그런 설정에 따른 많은 콘텐트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도 이런 설정이다. 고향을 등지고 전쟁 영웅이 된 후 파란만장한 유랑 끝에 10년 만에 귀환하는 이야기. 그렇게 오랜 출타의 이야기는 그의 고향 집의 불변성을 위협하는 요인들로 독자들 혹은 청자들을 애타게 한다.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를 넘보던 역당들이 있었고, 오디세우스는 이들에게 복수해 차마 잊을 수 없는 자신의 가정을 지켜낸다. 독자들 혹은 청자들이 공감하는 대목일 것이다.

설정은 같되 다른이야기


▎이탈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매너리즘 화가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Francesco Primaticcio)의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Odysseus and Penelope, 1563) / 사진:위키피디아
등장인물과 고향 집의 디테일만 다를 뿐, 기본 설정이 같은 이야기들이 꽤 있다. 노르웨이 신화에 나오는 영웅 페르 귄트에게도 산전수전을 다 겪고 수십 년 만에 귀환했을 때 변함없이 맞이해주는 평안한 집이 있고 그 집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 페르 귄트는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이 쓴 희곡의 제목이자 그 극의 주인공이다. 극 중 페르 귄트는 노르웨이에서부터 북아프리카까지 다양한 곳을 여행하다가 늙어서 고향으로 돌아온다. 노르웨이 작곡가 그리그는 이 극에 음악을 붙였다가, 이후에 같은 이름의 모음곡을 만들었다. 늙고 지친 페르 귄트는 천신만고 끝에 고향의 오두막으로 돌아와 여전히 그를 맞이하는 백발의 솔베이지가 불러주는, 차마 잊기 어려운 자장가를 들으며 죽는다. [솔베이지의 노래]라고 불리는 유명한 곡이다. 여인 솔베이지는 세월이 흐른 만큼 늙었지만 집은 여전히 거기 있다. 솔베이지는 이렇게 노래한다. “한 해가 사라지리라. 그러나 이것을 나는 확실히 아노라, 당신이 다시 돌아올 것을.”

이 설정 혹은 플롯 자체가 불변하지는 않는다. 이 설정 혹은 플롯이 깨지는 이야기도 있다는 뜻이다. 영국의 계관시인 앨프리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의 서사시 [이녹 아든](Enoch Arden, 1864)이다. 아내의 행복을 위하여 선원이 된 주인공은 배가 난파해 무인도에서 10년이란 세월을 보내게 되는데 그의 아내는 그가 익사했다고 생각해 어릴 적부터 사귀었던 친구의 구혼을 받아들이고는 주인공의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산다. 기적적으로 섬에서 나온 이녹은 귀향했으나 아내와 친구의 행복을 위하여 몸을 숨기고 고독한 생활을 하다가 죽는다. 그의 사후에 사정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이녹을 동정하며 슬퍼한다. 출판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얻어 테니슨을 국민적 시인으로 만든 작품이다.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는 1897년에 이 이야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작곡했다. 테니슨의 이야기는 여러 번역자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되었고, 슈트라우스는 그중 하나를 무대 위 낭송자에게 읊게 했으며, 그 낭송을 피아노가 배경음악으로 받쳐주었다. 화려하지만 좀 어려운 교향시와 오페라 작곡가인 슈트라우스가 아직 성공하기 전에 쓴 작품인데, 지금도 독일에 좀 남아 있는 당시의 카바레에서 이 곡이 종종 연주되었다. 이 작품의 장르로 ‘멜로 드라마(Melodrama)’라는 용어가 쓰인다. 실험적 공연 극장인 카바레나 소극장, 귀족이나 부유층의 저택 안 고급스러운 살롱 등에서 공연되던 ‘멜로 드라마’에서는 과하지 않은 적당한 연기가 동반되는 어떤 이야기를 낭송하는 낭송자와 그것을 반주하는 악기 및 그것을 연주하는 연주자들이 등장한다.

[이녹 아든]은 오디세우스처럼 어쩌다 출타한 사람의 이야기다.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출타하여 겪는 모험과 방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모든 모험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니 어쨌든 여전히 아내의 상태에 있는 여인이 등장한다. [이녹 아든]에서는 모험과 방랑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주인공이 돌아와보니 아내는 남의 여자가 된 상태다. [이녹 아든]은 [오디세우스]의 변주 혹은 현대적 재해석일 수 있다.

오디세우스와 페르 귄트는 어떤 부류의 남자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람들이다. 사실 오디세우스는 고향에 못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그의 여러 모험 중에서는 스스로 택해서 눌러앉았던 경우도 있었다. 아름다운 요정 칼립소가 사는 섬에 당도했던 오디세우스는 그곳에서 무려 7년 동안 머물면서 칼립소의 아낌없는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다. 칼립소를 떠나게 된 것도 그녀에 대한 지겨움 때문이었다. 어쨌든 오디세우스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 중 하나에서 영웅으로 그려졌고, 7년이라는 부정한 세월을 뒤로하고는 고향에 돌아와서 아내와 재회했다. 기원전 8세기경에 활동했던 호메로스의 시대에는 오디세우스와 같은 호색한 남성을 영웅으로 평가했나 보다.


▎프랑스 화가 앙리 레만(Henri Lehmann)의 ‘칼립소’(Calypso, 1869) / 사진:위키피디아
이녹 아든은 불쌍히 여길 사람이다. [이녹 아든]의 시대에 오디세우스 같은 뻔뻔한 인물은 콘텐트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일까. 19세기 영국은 세계 최고 선진국이었고, 그래서

[이녹 아든]은 기다려주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살았던 여성상을 보여주었을까? 그게 아니면, 오디세우스와 그의 아내 페넬로페는 어쨌든 귀족이어서 기다릴 여력이 있었고, 가난한 어촌에서 살던 이녹 아든의 서민 아내는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생계형 재혼을 선택했던 것일까. [이녹 아든]의 이야기는 미국 사회에서 ‘이녹 아든 법률(Enoch Arden law)’의 제정을 초래할 정도로 현실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어떤 배우자가 자신의 상대 배우자가 대체로 7년 정도 아무런 설명 없이 행방불명 상태라면, 그 배우자의 재혼을 허락해주는 법이다.

[이녹 아든]의 이야기는 20세기에 만들어진 영화들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며 쓰인다. 대표적인 것이 2000년에 개봉된 [캐스트 어웨이]이다. 영화에서 톰 행크스는 애인에게 프러포즈한 후 비행기를 타고 출장 가다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인해 무인도에서 4년을 홀로 살아가야 했던 바쁜 샐러리맨 역을 맡았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되돌아온 주인공 앞의 옛 애인은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한 상태다. 영화는 아련한 장면도 보여주지만, 전반적으로 쿨하다. 한 해가 지나면서 멀리 있던 은하가 더 멀어진 것처럼, 우리에게서 더 멀어진 소재, 더 멀어진 관점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이용해 콘텐트를 만든다면 현대적 재해석을 잘해야 할 것이다.

※ 김진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202301호 (2022.12.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