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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38) 상인과 낙타가 만든 이슬람 자유무역지대 

 

우리는 고대 문명의 후각적 요소를 이해하기 힘들지만 고대인들은 우리보다 후각이 훨씬 더 민감했다. 그들은 위생 시설이 변변치 않은 비좁은 도시에서 지도 없이 냄새로 장소를 식별할 수 있었다. 신전에서 피우는 유향과 몸에 바르는 유약은 고대인들에게는 최고의 사치품이었다

무덥고 건조한 기후는 아라비아반도의 상징이자 저주다. 광활한 사막의 남서부 예멘 지역은 연평균 강수량이 250ml로, 비가 내리는 편이라 ‘행복한 아라비아’라고 불리던 산악지대였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동방박사들이 바쳤다는 유향과 몰약은 이 지역의 특산물이었다. 유향과 몰약은 종교적 이유와 세속적 이유 모두에서 사치품으로 각광받았다.

유향과 몰약은 고대 서양에 비단과 후추가 전파되기 전까지 가장 대표적인 사치품이었다. 기원전 1500년부터 아라비아 상인들은 이제 막 길들인 낙타로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지중해 분지의 소비자들에게 유향과 몰약을 팔았다. 오래전부터 이집트와 바빌론의 귀족들은 향을 내는 제품의 가치에 눈떴다. 기원전 2500년경 세워진 이집트의 석비는 푼트 지역(오늘날 예멘과 소말리아)과 향을 무역하는 여행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스와 팍스로마나 시대에는 전리품을 팔아 유향과 몰약을 사느라 나라 재정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비단과 더불어 향료의 수입은 로마제국 내부에 유통되던 은을 고갈시켰다. 나이젤 그룸은 로마제국의 수도로 모인 낙타 1만 마리 분량의 향료를 구입하는 데 연간 1500만 데나리온이 들었다고 추정했다. 예수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로마의 사상가 세네카가 벌어들인 돈만 1억 데나리온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치 임금이었고, 성경에는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의 향유로 예수의 장례를 준비했다고 기록돼 있다.

유향과 몰약은 수천 년간 히트 상품이어서 카라반의 이동경로에 있는 수많은 도시와 마을이 유향과 몰약 덕분에 번성했다. 고대 남부 아라비아의 상인들은 향신료와 후추 거래를 독점해 큰돈을 벌었다. 아라비아반도에서 향료 무역은 이슬람의 탄생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 말기, 서양에서는 로마제국 말기에 로마와 페르시아가 전쟁을 하자 전통적인 무역로가 막혔고 아라비아사막이 대체 무역로로 쓰이면서 아라비아반도에서는 경기가 좋아졌다. 610년 즈음 메카의 상인이었던 무함마드는 유대교의 구약성서를 기초로 하여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이슬람교 선지자 무함마드는 가난한 고아 출신의 상인으로, 양을 돌보는 목동으로 지내다가 삼촌 아부 탈리브를 따라 대상무역을 시작했다. 25살까지 장가를 못 가다가 자기가 일하는 카라반(상단)의 40세 미망인 여주인 카디자와 가까워져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이 되었다. 이때가 서기 595년쯤이었다. 카디자의 카라반이 어떤 상품을 팔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추, 건포도, 가죽, 예멘의 유향, 이집트의 옷감 등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본다. 카디자와 결혼한 후 무함마드의 인생은 고속도로를 탔다. 그 후 십수 년간 별 탈 없이 살다가 40세가 되던 610년부터 메카 북쪽의 산에 머물며 기도와 명상을 하는 은둔 생활을 하다가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고 각성해서 선지자가 되었다. 43세부터 이슬람교 포교를 시작했는데 다른 종교의 우상숭배와 순례를 금지하려다가 순례 등에 이해가 걸린 사람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버려 거상이었던 아내 카디자도 파산하고 말았다. 619년 무함마드가 50세일 때 아내 카디자가 65세로 죽고 이틀 후 후원자였던 숙부 아부 탈리부도 죽자 무함마드에 대한 박해는 더 심해졌다. 무함마드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다신교를 믿으며 기득권을 누리던 부족의 지도자들은 그를 암살하기로 모의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정보를 미리 알고서 소수의 무슬림과 함께 메디나로 도망쳤다.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가 메디나에 도착한 622년 7월 2일을 헤지라(聖遷, 이슬람 기원)라고 부른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군세를 확장하고 성전(지하드)을 벌여 630년 반대세력인 메카를 정복했다. 무함마드는 불과 20여 년 만에 광대한 아라비아반도를 손에 넣었다. 632년 모함마드는 62세 나이로 메디나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중국 문헌에 따르면 모함마드가 죽기 12년 전인 620년에 이미 이슬람이 광저우에 전해졌다고 한다.

사산조페르시아와 비잔틴제국 사이에 벌어진 수십 년간의 전쟁으로 피폐해져 ‘불모의 땅’이라 불렸던 아라비아반도에서 이슬람제국이 혜성같이 떠올라 중동, 북아프리카, 스페인, 중앙아시아를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아라비아반도의 유목 아랍인들은 7세기와 8세기에 낙타를 타고 ‘대정복 운동’이라는 민족이동을 실시했다. 7세기 동로마제국과 사산조페르시아가 장기간에 걸친 전쟁에 지쳐 있을 때, 아라비아반도의 예언자 무함마드(572~632)는 이슬람교를 창시하고 아랍 유목민을 하나로 통합했다. 아랍인이 하나의 민족으로 성장하여 세계사를 바꾸는 계기가 된 사건이 당시 경제 중심지였던 다마스쿠스를 대상으로 벌인 지하드라는 이름의 정복전쟁이었다. 병든 비잔틴제국을 물리치고 손쉽게 다마스쿠스를 정복했다. 이 대단한 성공으로 아랍 유목민들은 정복사업에 올인하게 되었다.

대정복 운동으로 이집트, 리비아 등 지중해 남부가 이슬람 세계로 편입되었고, 지중해 세계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두 세계로 분열되었으며, 현재까지 그 분열이 계속되고 있다. 서아시아의 사산조페르시아도 이슬람제국에 정복되고, 대정복 운동은 ‘바다의 제국’인 로마와 ‘육지의 제국’인 페르시아의 대립 시대를 끝내고 세계사의 일대 분기점이 되었다. 이슬람제국의 대영역이 그대로 현재의 이슬람권이 된 점도 흥미롭다.

아랍 전사들은 대정복 운동 시기에 농경지대 주위의 불모지 사막과 단봉낙타를 교묘하게 활용하여 싸웠다. 몽골족이 말을 타고 제국을 건설한 것과 달리, 앞발굽에서 어깨까지의 높이가 약 2m인 단봉낙타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말처럼 질주하는 단봉낙타를 타고 갑자기 사막에서 모습을 나타냈다가 사라지는 수법으로 적을 농락했다. 아라비아반도의 유목민은 사막에서 낙타 유목을 생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사막을 무서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사막은 바다였으며, 오아시스는 항구, 낙타는 배였다. 무슬림 군대가 획득한 전리품의 4/5는 병사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었다. 사령관이든 보병이든, 장군이든 일병이든 차등 지급은 없었다. 전리품 중 1/5은 메디나의 국고로 들어갔다. 무함마드 시대에 그 돈은 대부분 빈민에게 분배되었다. 우마이야 시대에는 이 정책이 약해지긴 했어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기득권 세력들이 자기 몫을 포기하고 공평한 분배정책을 실시한 것도 이슬람이 빠르게 확장된 이유이다. 고대나 현대나 이익을 어떻게 나누냐는 조직문화에서 핵심이다. 무슬림 군대가 지나간 곳에는 이러한 이슬람 문화가 전파되었다.

팍스 이슬라미카, 유라시아 자유무역지대를 만들다


▎초기 이슬람 정복 운동. 7세기 초 무함마드가 아라비아반도에 최초로 통일된 정권을 수립했고, 이후 정통 칼리파조와 우마이야 왕조의 확장 정책으로 이어졌다. 이슬람제국은 중국, 인도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중앙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이베리아반도 등을 짧은 시간에 정복해나갔다. 그 결과 사산조페르시아는 멸망했고 비잔틴제국은 큰 영토를 상실했다. / 사진:WIKIMEDIA
655년 이슬람 세력은 마스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지중해 동부의 지배권을 빼앗았다. 해군이 없었던 이슬람 군대는 콥트 기독교도 선원들을 배치했는데 이들은 자신을 다스리던 그리스인을 경멸했고, 이슬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로 기록될 전투에서 일등 공신이 되었다. 유럽을 인도와 중국으로 이어주던 해로가 단번에 끊어졌고 850년 후 바스코 다 가마가 유럽인 최초로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건너기까지 이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로마가 ‘우리 바다’라고 불렀던 지중해의 상권은 이슬람 상인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7세기에서 9세기까지 인도양은 모든 나라의 배들이 오가는, 안전하고 자원이 풍부한 바다였다. 압바스 왕조가 수도를 다마스쿠스에서 페르시아만 앞에 위치한 바그다드로 옮기자 해상무역이 크게 번성했다. 소그드어가 중앙아시아의 공통어간 된 것처럼 페르시아어는 남쪽 바다의 공통어가 되었다.

대정복 운동 시기에 아랍인 130만 명이 아라비아반도에서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 이란으로 이주하며 농경사회의 지주가 되었다. 대정복 운동은 아라비아반도로부터의 민족 대이동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이슬람력이 넓은 지역에 퍼졌으며, 신의 계시를 집대성한 코란이 편찬되었고, 이슬람 사회의 기반이 구축되었다.

대정복 운동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전리품이 줄어들자 상업적 확장이 더 중요해졌다. 가난하고 후진적인 서유럽보다는 실크로드 무역으로 부자가 된 중앙아시아가 훨씬 더 매력적인 문명이었다. 이슬람 군대는 751년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를 탈레스에서 격파하면서 신장위구르를 제외한 유라시아 서부 무역로 대부분을 점령했고, 그 상황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초기 이슬람 정복자들은 기본적으로 팍스로마나를 재현해 규모가 더 커진 팍스 이슬라미카를 만들어냈다. 팍스 이슬라미카는 팍스로마나보다 더 강력하게 유라시아를 흔들었고 신라까지 그 영향권에 들었는데 우리는 팍스로마나만 배운다. 이슬람의 우마이야와 압바스 제국은 사실상 옛 국경과 장벽을 없앤 거대한 자유무역지대로 기능했다. 아득한 고대부터 동과 서를 가르며 경계 역할을 했던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자유무역이 이루어졌고, 홍해와 페르시아만, 육상 실크로드가 더는 경쟁을 벌이지 않았다. 대신 글로벌 물류 시스템이 통합되었고, 칼리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세력은 누구나 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무함마드가 죽고 100년 뒤인 8세기 중반에 페르시아인으로 추정되는 무슬림 상인 수천 명이 당나라의 항구뿐 아니라 내륙의 도시까지 진출했다. 당나라 시대 중국 남방의 항구에 몰려든 거대한 이슬람 원양상선의 크기에 당나라 사람들은 깜짝 놀라, 이 상선들을 ‘페르시아의 거대 상선’이라고 불렀다. 이븐 쿠르다드비가 845년에 편찬한 지리서『왕국과 도로 총람』에는 아랍인들이 자연환경이 뛰어나고 금이 많이 나는 신라를 동경하여 수많은 아랍인이 한반도로 건너가 영구 정착했다고 한다.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는 선지자 무함마드. 1307년 자미 알타와리크의 연대기 요약서 삽화. 이슬람 수니파에는 무함마드의 얼굴이 나오는 그림이 있지만 시아파에서는 무함마드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 금기시된다. / 사진:WIKIMEDIA
반면 해양 진출에 별 관심이 없었던 중국은 몇 세기가 지나서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 대양항해를 할 수 있는 배를 만들 수 있었다. 당나라 때에 서역으로 가는 구도승들은 외국배를 빌려 탔어야만 했다. 중국의 대형 정크선은 250년이나 지난 서기 1000년 무렵에 인도양을 항해했으니 이슬람 상업세력의 세계 진출이 얼마나 활발했는지 알 수 있다. 정화의 대항해는 400년이 더 지나서 스리랑카와 잔지바르를 항해했다. 무슬림 상인들은 유럽의 대항해시대가 시작되기 전인 16세기까지 1000년간 유라시아의 장거리 교역을 주도했던 것이다.

아랍어는 새로운 이슬람제국의 공용어가 되었고, 무슬림 해군은 지브롤터에서 스리랑카에 이르는 항구와 항로를 누볐다. 9세기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통치자들은 하자르족과 계약을 맺고 이들을 통해 스칸디나비아인과 교류했다. 동쪽으로는 중국과 육상, 해상 실크로드로 무역이 활발해졌으며, 북아프리카 상인들은 사하라사막 너머 남쪽으로 카라반을 보냈다.

선지자 모함마드 사후 불과 몇 세기 만에 그의 후계자들은 유라시아 대부분을 거대한 상업지대로 만들었다. 이 상업지대에서는 아프리카의 금, 상아, 타조 깃털을 스칸디나비아산 모피, 발트해의 호박, 중국산 비단, 인도산 후추, 페르시아산 금속공예품과 거래할 수 있었다.

이슬람 정복 운동에서 활력을 얻은 아랍인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문화적 르네상스를 이루어냈다. 당대 최고의 문학, 예술, 수학, 천문학의 중심지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장안이 아닌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코르도바였다. 중세는 유럽에서나 암흑 시대였지 이슬람의 중동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였다. 무슬림의 상업 네트워크에서는 환어음, 정교한 대출제도, 선물시장 등 여러 선진적 시스템들이 만들어졌다. 이슬람제국의 선진문명은 당시 변방이었던 유럽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아랍어에서 유래한 영어 단어가 많다. 리스트(해도가 없는 항해), 매거진(원래는 창고였는데 여러 가지를 잡다하게 담는다는 뜻에서 잡지로 바뀜), 체크(수표), 화학 등의 어원은 모두 아랍어다. 또 인도 숫자를 개량한 아라비아숫자, 십진법, 대수학에서부터 연금술과 증류기, 역풍에도 배가 전진하게 하는 삼각돛, 의학 기술까지 이들이 전해준 지식과 기술은 유럽의 르네상스가 일어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 김정웅 -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약 30년간 4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 2018년 9월 Forbes Asia 200대 유망 기업에 서플러스글로벌이 선정됐다. 2015년부터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간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와 인류 무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들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2308호 (2023.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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