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43) 실크로드의 찬란했던 오아시스 문명 

 

티무르제국 시대에 건축된 도시의 주요 건물인 모스크와 마드라사들은 대부분 유약을 발라 구워낸 푸른색 벽돌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사마르칸트를 흔히 ‘푸른 도시’라 부른다. 이처럼 사마르칸트가 푸른 도시가 된 까닭은 티무르가 유독 하늘을 상징하는 푸른색을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무역을 하면서 회사 일로 수백만 마일을 날아 출장을 다녔지만, 내가 출장을 다니는 곳은 미국, 일본, 중국, 대만, 유럽, 동남아 등 산업화된 나라가 대부분이다. 산업화된 나라의 도시인 뉴욕, 런던, 상하이, 도쿄, 싱가포르 같은 메트로폴리탄은 점점 더 서로를 닮아가고 있고, 그 특색을 잃어가고 있다. 어떤 도시를 가더라도 점점 더 먹는 음식이 비슷해지고, 젊은 사람들의 얼굴도 닮아간다. 30년 전에는 출장을 가면 양손 가득 선물을 사 왔는데, 요즘은 쇼핑도 하지 않는다.

중앙유라시아는 한때 찬란한 문명을 자랑했지만 21세기에는 지구촌에서 소외된 지역으로 손꼽힌다.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포르투칼,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 서구의 해양 세력이 전 세계 공급망을 장악해버리자, 중앙유라시아는 세계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났다. 그렇지만 중앙유라시아와 실크로드는 나에게는 너무나 매력적인 미지의 세계이다. 실크로드의 초원과 산맥, 사막에서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거친 자연과 싸워가며 유목과 농경, 상업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아직도 나에게 신선하다. 특히 내 관심을 끈 것은 유라시아 상권을 휩쓸었던 소그드 상인들, 그들과 짝을 이루며 세상을 지배했던 초원의 유목민들이었다. 2015년부터 매년 한두 차례는 중앙유라시아의 실크로드를 여행한다. 2023년에도 몇 주 전에 경희대 강인욱 교수가 인솔해 중장년 친구 10명이 11일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등 4개국의 험준한 도로 2400㎞를 달리고, 국경을 다섯 번 넘나드는 힘든 일정을 소화했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실크로드와 관련된 영상을 보면 비단 장수들이 낙타를 몰고 한가하게 사막을 건너는 모습이 나오지만, 사실 실크로드는 사람이 살기 힘든 지역이 대부분이다. 짐승이 다니던 길을 사람이 따라다녔고, 중앙유라시아에 점처럼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상인들이 생존과 번영을 위해 기를 쓰고 연결한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다.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들은 기후변화로 물이 줄어들면 동시에 급격히 쇠퇴하거나 타클라마칸사막에서 날아오는 엄청난 모래 폭풍으로 도시 전체가 모래 더미에 파묻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부하라, 사마르칸트, 카슈카르, 투프판, 둔황처럼 인구가 적은 실크로드 오아시스에서 어떻게 인류사에 빛나는 위대한 지적 업적이 이루어졌을까? 인구는 고작해야 몇십만 명이고, 최고 전성기 때 백만 명이었던 사마르칸트, 부하라에서는 근대 이전까지는 종교, 철학, 수학, 의학, 천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류 최고 수준의 학문적 업적을 이루었다.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 교역 덕분에 수백 년간 지구에서 가장 부유하고 번성한 도시였다. 사마르칸트는 중국에서 종이 기술을 수입했지만, 세계 최고의 종이를 만들어냈다. 이 지역 사람들이 천재적 지능을 가져서 이처럼 찬란한 업적들이 이룬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상업도시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민 자치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 오아시스 국가들은 상인 정신을 바탕으로 개방과 포용 정신을 가지고 중국, 인도, 중동, 유럽 등 전 세계 각국에서 들어오는 정보와 학문들을 자기화하고, 융합하고, 발전시켜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맞는 새로운 개념과 이론을 만들어갔을 것이다.

이번 여행 중에 타지키스탄 판자켄트에 있는 사라즘 유네스코 유산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 유적의 역사는 기원전 4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아직도 발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글로는 검색이 안 될 정도로 우리에게는 생소한 문명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했지만, 세계 4대 문명에 필적할 수준의 문명사회가 이 지역에 있었다.


▎키르키스스탄의 3200m 고지 산악도로에서 내려다본 풍경.
『잃어버린 계몽의 시대』를 쓴 유라시아 학자 프레더릭 스타는 중앙유라시아의 실크로드가 그저 문명이 교차하는 곳이 아니라 개방과 관용을 바탕으로 고도의 학식을 갖춘 지식을 추구했고 수리적 사고를 하였으며, 세속적이고 자신감 있는 ‘길목문명(Croassroads Civlization)’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는 서기 1000년부터 400~500년간 중앙유라시아는 중국, 인도, 중동, 유럽과 교류하면서 문명을 꽃피웠고,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보다 이른 시기에 과학혁명을 이뤄냈다고 설명한다. 프레드릭 스타는 중앙유라시아의 계몽 시대는 경제적 기반과 문화적 특성이 결합한 결과라고 한다. 관개농업과 무역에 토대를 둔 중앙유라시아 경제는 문화 간 접촉을 활성화하여 다른 문화와 종교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 “인류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빛나던 위대한 시기이자 진정한 계몽의 시대”이자 “상당히 높은 수준의 관용적 태도가 견지”되던 시대가 중앙유라시아에서 꽃피울 수 있었다. “유럽 문명은 16세기가 되어서야 11세기 중앙유라시아 문명이 이룩한 과학적 성취에 도달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가 그리스와 로마 문명만 부흥했다는 말은 별로 믿기지 않는다. 오히려 중앙유라시아의 실크로드, 몽골제국과 티무르 제국의 유산에서 더 많은 과학기술, 의학, 철학, 대수학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변변한 농토가 많지 않은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들은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 번영을 누렸다. 기원전 6세기 영국의 켈트족 소녀의 무덤에서 비단이 발견된 것은 그 시기에 이미 오아시스 도시들이 비단 장사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장사를 잘하려면 세상 돌아가는 일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

오아시스 도시들은 통행세만 받은 것이 아니다. 부하라, 히바, 사마르칸트와 같은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에서는 멀리서 카라반이 오는 것이 보이면, 첨탑(칼란)에 있는 사람이 “카라반이 온다, 카라반이 온다”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환영했고, 카라반의 우두머리는 오아시스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왕이나 성주를 찾아가 선물과 세금, 경호 비용 등을 바치고 자기가 지나온 길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그들은 주변 국가의 정세를 파악하고, 세계의 경제와 무역을 파악하면서 투자도 하고, 시장을 열어 각지의 상품을 중개하고, 군사력을 동원해 교역로를 보호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투자은행, 상사, 경호회사, 쇼핑몰의 역할을 한꺼번에 수행한 셈이다. 유라시아 구석구석을 잇는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상인 세력이 성장하고, 상인들은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며 도시마다 도서관을 세웠고, 필사본 서적 경매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무역을 통해 사람과 문화가 활발하게 교류되고,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배척하지 않는 관용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수천 년 전부터 동서 문명 교류는 오아시스 도시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문명 교류, 무역을 통해 인류 문명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고, 스스로는 부를 축적했다. 무역은 중앙유라시아의 도시국가나 유라시아 유목국가에 부와 국력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개방과 관용, 상인 정신을 잃는 순간 그들의 번영도 사라졌다. 프레드릭 스타는 중앙유라시아의 쇠락을 이슬람 내부의 갈등과 대립으로 관용적이고 과학적인 사고가 퇴색했기 때문이라 봤다.

게다가 16세기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해양무역이 확대되어 초원과 사막의 실크로드는 세계의 변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유라시아 내륙 교역량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었지 절대량이 줄지는 않았다. 티무르 제국의 붕괴 이후에도 코칸드 칸국,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 등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중국, 러시아, 오스만투르크, 인도를 엮는 삼각무역의 요충지로 번영을 지속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이 러시아에 완전히 정복당한 것은 19세기 말엽이었다.


▎판자켄트 박물관에서 만난 사라즘 문명의 고대 여신.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하는데, 산업화 성공에 대한 자부심과 냉전시대 우물 속에 갇혀 있는 기성세대들이 한국을 망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21세기에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 4대 강국 사이에서 성장 동력을 잃고 갈 길도 잃어버린 한국이 가야 할 길은 개방과 포용, 상인 정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중국에 1000개가 넘는 창고를 지었던 소그드 상인처럼 우리 기업과 젊은이들이 작은 땅덩어리 한국에 안주하지 말고, 당당하게 세계를 향해 도전해야 한다. 필자 나이 또래가 100만 명이었는데 요즘 매년 30만 명만 태어난다. 지금 이대로 가면 불과 몇 년 후엔 인구절벽으로 한반도에 재앙이 몰아칠 것은 정해진 미래이다. 똑똑한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살고 싶게 만들고, 허황된 순혈주의는 때려치우고 과감하게 이민을 받아들여 소그드 상인들의 사마르칸트, 신라의 경주가 그랬듯이 전 세계 문물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다문화 국가로 개조해야 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불과 70여 년 만에 그간의 성취와 기득권에 집착하며 활력을 잃어버린 한국의 패러다임은 바뀌어야 한다. 아직도 우리 머릿속을 지배하는 조선 후기 소중화 사상, 일제 군국주의, 산업화시대 서양 사대주의를 깨버리는 보편적 세계관과 역사관을 여기 실크로드 오아시스 국가들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중앙유라시아 4개국 역사 탐방을 한 단어로 줄여서 이야기하라면 ‘영점조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지난 200년간 산업화와 세계화를 통해 세계의 패권을 쥔 승자의 입장에서 서구우월주의로 각색된 세계사를 배워왔는데, 현지에서 돌아다니며 본 세상은 서구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역사가 아니었다. 서구의 존재감이 없었던 15~16세기의 르네상스, 지리상의 발견 등을 획기적 전환으로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서구에 의해 이 세계가 제대로 연결되었다는 듯이 세계사를 만들어놨고, 우리도 해방 이후에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머릿속의 서구사대주의로 고착되었다. 예전에 한 미국 언론사가 인류 역사상 10대 부자를 꼽았는데 7~8명을 서양 사람들로 채워 넣었다. 필자가 아는 경제사적인 상식으로는 1명 내외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배운 세계사도 이런 식의 서구우월주의를 바탕으로 기록됐으며, 해방 이후 70년간 이런 왜곡된 세계사를 비판 없이 수용하고 받아들였다.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은 서구 중심의 왜곡된 세계관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관점에서 당당하고 보편적인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나는 실크로드의 역사를 ‘감춰진 역사’라고 표현하고 싶다. 우리가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숨겨진 역사’가 실크로드 곳곳에 널려 있다. 개방과 포용의 실크로드는 그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으며, 실크로드를 공부해야 우리가 더 보편적이고 균형 잡힌 세계관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 김정웅 - 한국공학한림원 회원이자 연세대학교 신소재공학과 겸임교수. 30여 년간 5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이다.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의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00년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기업 간 전자상거래 사업을 하다가 폐업 위기를 겪었지만 반도체 산업에 집중해 전화위복을 이뤄냈다. 지금까지 반도체 업계의 레거시 장비를 전 세계에 5만 대 넘게 판매하며 서플러스글로벌을 세계적인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5년 무역의 날 대통령상과 2021년 산업포장을 수상했다. 2012년에는 발달장애인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Autism Expo를 개최하는 등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2401호 (202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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