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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우가 만난 예술계 파워리더(23) 노신경 성신여자대학교 동양화과 학과장 

바느질로 그린 그림 

정소나 기자
붓 대신 바늘을, 종이 대신 천을 사용한 바느질 회화로 의식의 수면 아래 잠재하는 기억을 재구성하는 노신경 작가. 그녀는 화선지와 먹으로 그리는 한국화의 정신과 회화적 조형성을 바탕으로 더욱 자유롭고 감각적인 조형 언어로 소통하며 관람자들에게 색다른 경험과 시각적 아름다움을 전달한다.

▎바느질 회화로 색다른 경험을 전달하며 현대 동양화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노신경 작가.
현대 회화가 전통 회화와 다른 점은 무수히 많다. 현대 동양화도 마찬가지다. 그중에서도 최근 동양화의 흐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재료에 대한 관심이다. 화선지에 붓과 먹으로 ‘그리는’ 단조로운 수묵화 대신 여러 가지 재료와 방법으로 회화를 ‘제작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성신여자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한 뒤, 동 대학원 동양화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모교 동양화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인 노신경 작가 역시 색다른 방식의 작품 표현으로 주목받고 있다. 고전적인 회화의 표현 방식에서 벗어나 두꺼운 한지나 천에 다양한 색실로 반복적으로 박음질을 하는 ‘바느질 회화(Sewing machine drawing)’를 선보여 보수적인 전통 회화에 도전하면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나가고 있다.

여러 종류의 천과 반복된 색실의 드로잉이 화면 위를 유영하며 삶의 흔적과 흐르는 시간성을 조형하는 그녀의 작품은 동양적 매력이 묻어나면서도 촉각과 시각적 형식을 동시에 드러내며 색다른 경험을 전달한다.

정승우 이사장이 한국화를 기반으로 현대 회화의 새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노신경 작가를 만나 동양화의 확장성과 그녀의 예술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가 궁금하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서양화는 서구의 그림, 즉 캔버스와 유화물감을 주재료로 한 그림이고 동양화는 한국화, 중국화, 일본화 등 아교와 동양화 물감을 사용한 그림을 지칭한다. 이에 더해 서양화는 재현화처럼 객관화가 중시되는 그림을, 동양화는 관념화처럼 주관적인 측면과 정신성을 강조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지필묵이 아닌 서양의 재료를 사용한 그림도 동양화라고 볼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화선지 위에 먹으로 선과 여백을 중시하며 그리면 동양화, 캔버스 위에 유화물감으로 입체감, 원근감을 살려 그린 그림을 서양화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현대 동양화는 재료의 혼용이나 표현 방식이 굉장히 다양하다. 단순히 재료적인 측면에서 동양화와 서양화를 구분하기보다는 그림을 대하는 방법, 즉 정신성의 측면에서 구분하는 것이 동시대 작품을 대하는 자세인 것 같다.

동양화는 과거 상류층의 고급 취미 생활이기도 했는데.

조선시대부터 동양화, 한국화의 특징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사대부를 중심으로 유교 질서를 반영한 문인화와 수묵화가 유행했지만, 서민들은 민화를 향유했다. 조선 후기의 불화도 민화 양식이 혼합된 양상을 보였기 때문에 상류층을 위한 취미라기보다는 우리 선조들의 삶과 정서를 엿볼 수 있는 예술 문화라고 생각한다.

동양화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있나.

예술고등학교에 다니며 세부 전공을 체험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먹의 내음, 스밈과 번짐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 화선지의 매력이 굉장히 강렬하게 느껴졌다. 화선지에 먹선을 그었을 때 나타나는 농담과 선 하나만으로도 화면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먹선의 존재감, 여백의 미학에 매료돼 동양화를 전공하게 됐다.

손바느질에 이어 재봉틀로 드로잉 작업을 하며 ‘바느질 회화’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재봉틀은 언제 처음 접했나.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와 함께한 기억이 많다. 할머니께서 당시 아주 예쁜 백록색 재봉틀을 가지고 계셨고, 이를 활용하여 생활에 유용한 여러 가지 소품을 만들어주셨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께서 재봉틀을 사용하시는 것을 보고 자라서인지 친숙함을 느꼈고, 작품에 활용해봐야겠다는 영감을 얻었다.

‘천과 실’, 그리고 이 둘을 엮어내는 ‘바느질’이라는 행위는 어떤 의미인가.

나의 작업에서 바느질은 다른 회화 작업에 있어 붓과 물감이라고 할 수 있다. 한지와 천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바느질 선은 붓으로 그은 선을 대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바느질을 통해 자유로운 드로잉 선으로 화면을 구성하며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바느질 드로잉’이라고 생각한다.

‘Piece & Piece’이라는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작품 설명을 부탁한다.


▎정승우 이사장과 노신경 작가가 동양화의 확장성과 작품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지 위에 비정형의 천 조각들을 반복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사물 간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 작품이다. 다양한 종류의 천을 이어 붙이거나 동양화 물감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시간을 기록하듯이 색실들을 드로잉적으로 표현했다. 유기적 자연의 형태를 천 조각으로 바느질한 후, 화면에 직접 드로잉 선을 더해 깊이감을 부여하면서 현대미술에 새로운 미의 가치와 개념의 방향을 설정하고자 했다. 작품은 먹과 종이 대신 실과 바늘을 재료로 선택하여 박음질을 주된 방법론으로 사용한다.

어느 정도 선의 방향을 계산하고 시작하기는 하지만, 재봉틀로 작업하다 보니 무의식중에 선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꽤 많다. 이렇게 자동 기술법을 통한 드로잉으로 순수회화적 공간을 창출하고, 관계와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수많은 선이 연결성을 지닌 화면 구성은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요소들로 의도적인 만남을 통해 조화로운 예술적 공간을 창출하는 작품이다.

작업할 때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조형성, 색감, 물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작업에서 드러나는 전체적인 조형 감각,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색감, 천과 실, 바느질 드로잉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물성 등에 초점을 맞추며 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 과정도 궁금하다.

먼저 화선지 두장을 합친 이합장지 밑에 얇은 솜을 덧대어 종이와 솜을 바느질로 결합하는 작업을 한다. 그 위에 아교반수를 3~4번 정도 해 물의 흡수와 번짐을 잡아준 후 물감으로 채색한다. 채색된 종이 위에 바느질 드로잉을 하고, 오브제로 조형적인 작업을 더해 마무리한다. 여러 단계의 작업을 거치다 보니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시간이 좀 많이 걸리는 편이다.

바느질은 공예에 가깝지 않나.

내 작업에서는 종이 위에 모필을 대신해 재봉질로 선을 만들어간다. 먹은 실로 대체되었고 모필의 강약, 농담의 변화는 균질한 재봉선으로 마감된다. 바느질과 오브제로 부착되는 천 조각의 조형이 문제가 아니라 힘 있고 깊이 있는 화면과 선이 여전히 중요하다. 화면과 선이 중심이 되는 것이 그림, 회화이며 이 지점에서 공예가 아닌 동양화의 새로운 계승, 해석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들을 보면 조각보에 큰 애착이 있는 것 같다.

대학 4학년 시절, 졸업 작품을 준비할 때 교수님이 ‘전통’과 연관되면서도 개성 있는 작품을 제출할 것을 요청하셨다. 다른 친구들이 모두 작품을 시작하는데 주제도 정하지 못할 만큼 많이 고민했다. 그러다 우연히 인사동을 지나다가 전시장에 걸려 있는 조각보를 보게 되었다. 우리 조상들이 자투리천을 모아 만든 조각보는 기능적인 측면에서나 독특한 조형미를 뽐내는 예술적인 측면에서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때 본 조각보에서 영감을 받아 천을 이어 붙이고 바느질로 드로잉을 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됐고, 지금의 바느질 드로잉 작업으로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작업의 모티브가 되어주는 조각보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바늘땀들이 바느질 선이 되고, 이들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나가는 ‘inbetween’ 작품 전시 전경.
동양화 작가이자 성신여대 동양화과 학과장으로 교단에 선다. 평소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학생들에게 자신이 하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진심을 다해 작업하라고 강조한다. 현재 우리 학교 동양화과에는 굉장히 훌륭한 학생이 많다. 저마다 역량과 인성이 뛰어나고 작가로서의 잠재력과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자부심을 느끼며 가르치고 있다. ‘멋진 미래는 좋은 과거에서 온다’는 말처럼 각자가 가진 창의성과 예술성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미래에 대해 고민한다면 10년, 20년 후에는 더없이 훌륭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는 언제인가.

아무래도 학생들의 졸업 전시를 오픈했을 때인 것 같다. 매해 열리는 졸업 전시이지만 학생들이 4년간 공부한 결과물을 볼 때면 입학한 순간부터 현재까지의 학생작품들과 여러 에피소드가 생각나면서 미소를 짓게 된다. 전시를 준비하는 내내 학생들과 함께 힘든 시간을 보내지만 전시를 오픈할 때 느끼는 감동과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많은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을 공유해달라.

2011년, 복합문화공간 유중아트센터의 1기 입주 작가로 활동했다. 그때의 인연으로 정승우 이사장님을 뵙게 되었고, 현재까지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는 입주 작가의 공간이 없어져서 아쉬운 마음이지만, 당시 서울에서 유일한 레지던시였다. 1기 입주 작가로 있으면서 오직 작업에만 몰두하면서 많은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이에 더해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해 문화예술에 대한 시각을 넓힐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유중아트센터에서의 입주 작가 생활은 나의 작가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좋은 경험으로 기억된다.

앞으로의 작업 방향은.

바늘과 실이라는 재료와 회화적인 바느질 드로잉 방법은 지난 시간의 기억을 통한 삶의 흔적을 화면에 이야기처럼 전개하는 작업이다. 여기에 꿰매고, 붙이고, 잘라내는 작업을 더해 자아를 인식하는 시간적 경험의 의미를 부여한다. 또 다른 유형으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색실들의 우연적 만남을 박음질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혹은 헤아리듯 흐르는 시간성을 조형하는 작품을 하고 있다.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도 이런 미적 정서를 공유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앞으로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생명력 있는 작품을 계속 창조해나가려 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예술가는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특별한 자격 기준이나 예술가와 비예술가를 가르는 명확한 기준은 없지만, 예술을 직업 혹은 생업으로 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전에 비하면 예술가를 위한 지원 사업이나 공모가 많아진 건 사실이지만, 아직은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나 지원이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사회 초년생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예술가들에 대한 창작 지원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란다.

※ 정승우 - 고려대학교 법학과(학사), 동 대학원(법학 석사, 법학 박사) 졸업 후 2011년 공익재단법인 유중문화재단과 복합문화공간인 유중아트센터를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정리=정소나 기자 jung.sona@joongang.co.kr _ 사진 최기웅 기자

202402호 (202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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