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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인의 테넷 | 파리 올림픽의 교훈과 우리의 정체성 

 

개막 전부터 온갖 논란과 염려 속에 출발한 파리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걱정은 기우로 드러났다. 파리라는 공간이 주는 경험 자체를 올림픽이라는 글로벌 이벤트에 제대로 녹여낸 덕분이다.

▎지난 7월 31일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전 시상식. 파리를 상징하는 유서 깊은 문화 건축물이 펜싱 경기장으로 활용됐다. / 사진:중앙포토
2024 파리 올림픽의 첫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 친환경 가치를 내세우며 대형 건축물을 새로 짓지 않는 것은 옹색한 변명처럼 들렸고, 수질이 좋지 않기로 유명한 센강에서 수영 경기를 치른다는 발상은 ‘내가 직접 경기하는 것이 아니니까’ 하는 내로남불 같은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게다가 여러 이슈를 만들어낸 개막식의 몇몇 오점은 이 올림픽이 제대로 치러질 수는 있을까 하는 우려마저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모든 이벤트가 지나고 나니 이번 파리 올림픽은 이전의 올림픽과 다른,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행사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기술적 성과나 경제적 이익보다는 인간적인 경험과 감성적 자극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점점 중요해지고 있는 ‘기억할 수 있는 순간’을 창출하는데 중점을 둔 접근법과 일맥상통한다.

기억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

현대의 외식 문화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이제 외식산업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맛뿐만 아니라 그 음식을 어떤 환경에서, 어떤 분위기 속에서 즐길 수 있느냐에 더 관심이 많다. 예를 들어, 누구에게나 익숙한 음식도 특별한 장소나 분위기에서 즐기면 전혀 다른 경험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되면 많은 이에게 공감을 일으키고 감탄을 자아낼 수 있다. 결국 ‘기억할 수 있는 순간’을 만드는 것이 현대 소비자 경험에서 핵심이 되었다.

2024 파리 올림픽은 아마도 이런 현대적 트렌드를 가장 잘 반영한 올림픽이 아닌가 싶다. 오상욱 선수가 금메달을 딴 펜싱 경기를 예로 들어보더라도 이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가 아니었다. 경기가 열린 ‘그랑 팔레’는 파리의 역사적·문화적 상징물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과 같은 장소였다. 많은 관중이 경기장을 직접 보기 위해 몰려들었고, 이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 관람을 넘어 특별한 경험을 만들어냈다. 역사적 장소와 스포츠의 결합은 단순한 1+1=2의 효과가 아니라, 1+1=100 이상의 시너지를 창출했다.

이뿐 아니라 파리 에펠탑, 베르사유궁전처럼 전 세계 사람들이 한 번쯤 꼭 가봤으면 하는 대표적인 명소들이 올림픽 무대가 되었다. 이처럼 파리 올림픽은 경기 자체를 단순한 경합의 장이 아닌 하나의 경험으로 만드는데 성공했고, 이것이 소셜네트워크와 만나 시너지를 극대화했다고 할 수 있다.

성과가 아닌 감동을 주는 이벤트

한국에도 이와 비슷한 접근이 예전부터 있었다. 20년 전 유흥준 전 문화재청장이 ‘경회루’를 민간에 최초 개방했다. 경회루는 원래 임금의 전용 공간으로, 외국 사신을 위해 연회를 열어주고 관리가 멀리 떠날 때 송별회를 베풀기도 한 장소였다. 이것이 현대까지 이어져 권력자들이 사적인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유 전 청장은 한국 문화재를 더 많은 대중에게 개방해 그들이 문화적 자산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이 결정에 대한 반발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민은 경회루 개방을 환영했다.

경회루 개방 사례는 단순히 문화재를 보호하는 것만으로는 그 가치를 온전히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히려 문화재를 대중에게 개방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순간을 만들어야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소수만 향유할 수 있던 독점적 공간을 대중에게 여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국제적 스포츠, 문화 이벤트를 여는 장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다만 한국의 정체성을 근본에 두어야 한다. 파리가 그들의 뛰어난 문화유산을 이번 올림픽을 통해 세계 속에 자랑했을 때, 그 효과가 뛰어났던 건 단순히 그 장소들이 멋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프랑스의 아이덴티티를 그 무엇보다 훌륭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콘텍스트가 존재했기에 세계인들이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세계적인 이벤트를 개최하려고 할 때 한국이 가진 아이덴티티를 어떤 식으로 녹여낼 것인가는 아주 중요하다. 일례로 서울 시민의 자랑인 광화문광장만 해도 올림픽 같은 글로벌 이벤트에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광장 중앙에는 구국의 영웅 이순신과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이 계신다. 그런데 그 뒤에는 애매하게도, 광화문 현판 글씨가 한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문화재의 과거 고증과 복원이라는 측면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 공간이 오늘날 한국을 상징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했다면, 마땅히 광화문도 한글로 적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물며 글로벌 이벤트에 이런 장면이 계속 노출된다면 한국은 자국어나 문자가 없이 여전히 한문에 의존하는 나라 혹은 중국의 문화 속국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 실제로 과거에 한글 현판이 걸렸던 적이 있으니, 굳이 전통을 따른다는 이유로 한문을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접근법이며, 문화적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요소다.

2024 파리 올림픽은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준 행사였다. 올림픽 개최국이 그동안 이룩한 기술적·경제적 성과를 자랑하는 자리가 아닌,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경험과 기억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단순히 더 크고 더 멋진 시설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파리처럼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역사, 인간적인 감성을 잘 활용한다면, 올림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인식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지닌 문화적 자원에 대한 접근을 ‘보존과 유지’에서 ‘활용과 발전’으로 바꿔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정체성과 시대정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준비해야 한다. 이런 바탕 위에 다음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글로벌 이벤트를 치른다면, 경제·기술뿐 아니라 문화 강대국의 모습을 확실하게 세계에 각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상인 - 이상인 디자이너는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의 미국 본사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근무했다. 베스트셀러 『디자이너의 생각법』 시리즈의 저자이다.

202409호 (2024.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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