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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대 오픈카 몰던 英유학생‘청와대’라는 이름 붙인 대통령 

장면 총리와 경쟁, 박정희와 반대 투쟁, 5공 정권과 친밀
강준식의 대통령 이야기 정치비사 윤보선 


▎1. 취임선서를 하는 윤보선 대통령. 2. 6대 대통령 후보에 나선 윤보선.

윤보선의 이상과 현실

어떤 이는 자기 이상이나 신념을 위해 싸운다. 그래서 가진 것이 엄청 많은데도 현상을 뒤엎는 혁명에 가담한 귀족들이 있다. 해위(海葦) 윤보선도 그런 경우였을까? 1897년 아버지 윤치소(尹致昭)와 어머니 이범숙(李範淑) 사이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윤보선은 이상과 현실 사이를 부단히 왕복했던 인물이다.

어느 정도 부자였느냐 하면 그가 태어난 충남 아산 생가나 그가 성장하면서 살았던 서울의 안국동 집이 둘 다 문화재로 지정될 정도의 대저택이었다.

“당숙(尹致昊)이 미국에서 자전거를 처음 사 와서 그걸 즐겨 탄 것이 내가 바퀴를 접한 최초일 거야. 어른 자전거여서 한쪽 발을 차체 사이에 넣고 페달을 밟으며 탔지”라고 윤보선은 ‘축지기계’를 타고 놀던 어린 시절을 회고한 일이 있다. 또 1905년에는 “큰아버님(尹致旿)이 영국제 자동차를 사 오셨지. 운전수가 없어 상하이에서 중국인 운전수를 데려왔다”면서 그 차를 타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런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는 신분이었으면서도 일본에 대한 나랏빚을 갚자는 운동이 벌어지자 그는 어린 나이에 점심을 절식한 돈으로 국채상환운동에 동참했다고 한다.

반면 또 학교는 진고개(충무로)에 있던 일본인 전용의 히노데(日出)소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중등부→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로 진학하게 된 그는 일본인의 평균 월급이 20엔이던 시대에 집에서 월 25엔(약 450만원)의 학비를 부쳐줘 공부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지만 “몸과 마음이 당시 중국의 신해혁명에 쏠려 있어 그런 상태로는 도저히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2년쯤 공부하다 귀국했다고 한다. (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 1967)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상하이에서 온 여운형(呂運亨)의 도움을 얻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상하이임시정부의 최연소 의정원 의원이 된 그는 임정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국내에 잠입해 자금을 조달해 오라”는 명을 받고 동생을 시켜 집에서 가져온 3000엔을 이승만에게 바쳤다.

금일의 화폐가치로 7억원에 가까운 거금을 쾌척한 그는 그 후로도 독립운동을 계속했는가? 아니다. 돈을 전달한 그 해 6월 그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예비학교를 거쳐 에든버러대학에 입학했는데 전공은 그가 목표로 했던 구국(救國) 또는 독립운동과 아무 관련도 없는 고고학이었다.

영국인의 평균 월급이 7파운드이던 시대에 그는 400파운드(약 2억원)를 주고 이탈리아제 스포츠형 오픈카를 구입했다. 그 시절은 영국에서도 아직 학생 오너드라이버가 없어 한국의 ‘프린스’로 통했다고 한다.

공부가 끝난 뒤 유럽 각지를 구경 다니느라고 집에서 보내준 여비를 두 번이나 다 써버리자 부친은 “부자지정을 생각해서 다시 여비를 보내지만 다음에는 더 생각 않겠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에 배를 타고 10여 년 만에 귀국하게 된 그는 집에 도착하자 고고학 학사 졸업증부터 내밀었더니 부친은 “그래, 할 일이 없어 이 쓰잘데없는 걸 배워왔느냐?” 하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윤보선)

귀국 후 그는 집에 찾아오는 친구들과 다시 나라를 빼앗긴 울분과 정한을 나누면서 그로부터 해방이 되기까지 13년 동안 ‘애국적 무위(無爲)’로 일관하게 된다. 이처럼 이상과 현실 또는 명분과 실리를 왕복하는 그의 특이한 행보는 그 후로도 죽 이어졌다.

윤보선과 명사정치


▎1949년 1월 6일 윤보선·공덕귀 결혼(왼쪽 사진). 1960년 8월 4대 대통령 윤보선 가족.
해방이 되자 그는 한민당 창당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래서 그가 살던 안국동 저택은 한민당의 산실이 되었다. 아마도 영어를 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인천에서 태어난 조지 Z 윌리엄 중령이 한민당 출신을 하지 사령관에게 천거할 때 그 또한 추천돼 농상국 고문에 위촉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군정청 일을 그만두고 1947년 4월 경영난에 빠진 민중일보를 인수해 사장에 취임한 뒤 상하이 시대부터 인연을 맺었던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것이 구국의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부수 1만2000부의 <민중일보>는 당시 ‘이승만 신문’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다.

그 공으로 윤보선은 대통령이 된 이승만으로부터 서울시장→상공부 장관→적십자 총재에 기용된다. 그러나 1951년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국민방위군에 편성된 정부예산을 횡령함으로써 5만 명에 달하는 방위군이 식량과 침구를 지급받지 못해 굶어 죽거나 얼어 죽거나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 윤보선이 사실을 보고하러 대통령 관저에 찾아갔더니 이승만은 “아, 윤 총재도 세상 사람들의 모략에 걸렸군!” 하고 오히려 그를 장황하게 설득하려고 들었다. 이에 정나미가 떨어진 윤보선은 1952년 5월 부산 정치파동이 터지자 독재를 강화하는 이승만과 결별했다.

그 후 야당에 들어가 3대와 4대 국회의원에 연달아 당선됐고, 1959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아직 재선이었지만 지난날 서울시장→상공장관→적십자 총재를 역임한 화려한 경력은 1960년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趙炳玉)이 급서한 뒤 그를 일약 민주당 지도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같은 해 4·19혁명이 일어났다. 그는 독재정권을 쓰러뜨린 주체가 아니었지만 주체세력인 학생이 정권을 잡을 수 없는 처지라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가 된 장면과 함께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해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그는 이를 사실상 추인함으로써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제2공화국을 버렸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이 자신에게 정권을 넘길 것으로 기대했으나 결과는 달랐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윤보선은 대선 후보로, 야당 당수로 그리고 재야인사로 3공에 맞서 치열한 민주투쟁을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3공이 끝난 뒤 그는 5·18의 엄청난 희생 위에 성립된 5공을 인정했다.

1공과 3공의 독재에 맞섰던 그가 어떻게 새로운 독재정권을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 투쟁의 대상이 체제가 아닌 한 특정인이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용원)도 있고, ‘명사(名士)정치’의 한계 때문이었다는 분석(유재일)도 있다.

“명사정치의 특징은 시대적 과제를 고민하기보다는 권력 획득과 품위 유지에 더 집중하면서 종종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이상과 현실, 명분과 실리를 왕복했던 그의 특이한 행보의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

영국 신사


▎윤보선 대통령 취임연설.
윤보선은 자리 그 자체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서울시장을 하다 상공장관으로 영전했을 때는 “업무를 거의 파악한 서너 달 후엔 벌써 입맛이 떨어져버렸다”고 했고, 민주당 창당 후 원내총무에 추대됐을 때는 번잡한 정당 잡무가 귀찮아 “병 난 것을 기화로 부산에 내려가 요양하며 겨우 (사표를) 수리시켰다”고 회고했다.(윤보선 외 <사실의 전부를 기록한다>, 1965)

장관이나 대학 총장급 명사 13명을 배출한 해평(海平) 윤씨 명문가에서 자라난 그에게 자리는 그저 ‘권위’ 또는 ‘체통’을 확립해주는 하나의 방편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리를 이용해서 자기 세를 불린다든지 치부를 한다든지 하는 편법이나 부정부패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체통 그 자체였다.

그래서 체통을 지키는 데 필요한 격식, 품격, 서열 같은 것을 아주 중시했다. 용모에 신경을 쓴 것도 그와 관련이 있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줄넘기와 아령, 산책 등의 아침운동을 했는데 이 또한 단정한 몸매로 체통을 유지하는 일과 관련이 있었다. 그를 가까이에서 모셨던 한 측근은 “그분이 넥타이를 매지 않은 모습을 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다. 청와대에서 거의 동거하다시피 했던 나도 대통령을 만날 때는 반드시 정장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회고했다.(김준하 <신동아> 2001년 9월호)

체통을 중시한 대표적 사례로는 대통령에 선출된 다음날 곧바로 경무대에 들어갔던 일을 들 수 있다. 경무대는 대통령이 기거하는 곳이지만 집무처의 성격이 강해 내각책임제하의 제2공화국에서는 정부를 이끄는 국무총리가 들어가는 것이 마땅했는데, 대통령의 체통을 앞세운 그가 경무대를 선점해버린 것이다.

큰 집이 탐났던 것은 아니다. 그에겐 99칸의 대궐 같은 안국동 집이 있었다. 그럼에도 경무대로 들어간 것은 그 상징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나중에 국무총리가 된 장면은 반도호텔 828호실을 집무실로 사용하게 됐으나 장소가 비좁아 여간 애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경무대에 들어가서 그가 한 일이 몇 가지 전해진다. 그 중 하나는 원부(怨府)의 이미지가 강한 경무대의 이름을 청와대로 바꾼 일이다. 이에 대해 “윤 대통령의 치적으로 남은 것은 청와대라는 이름뿐”이라고 비꼬는 이도 있었다.(송원영 <제2공화국>, 1990)

다른 하나는 청와대에 ‘파우더룸(여자화장실)’을 만든 일이다. 윤보선은 “레이디는 파우더룸이란 데서 화장도 고치고 향수도 뿌리고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면서 청와대 안에 파우더룸을 설치하도록 지시했고, 서양식 정장 차림의 여성 방문객이 모자와 흰 장갑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탁자의 위치와 치수, 한국 수를 놓은 타월까지 지정할 정도로 신경을 썼다.(<여성신문> 2007년 2월 2일) 격식을 중시하던 윤보선다운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체통과 관련해 서열은 그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1959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 뽑혔을 때 “상산(김도연)이 있는데 내가 나설 수 있나?” 하고 종내 연단에 올라가기를 거부했다. 이에 사회자가 “해위(윤보선)는 급통이 생겨서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둘러댔는데, 이런 그를 두고 민주당 신파의 김재순(金在淳)은 “점잖은 분”이라 평했고, 구파의 고흥문(高興門)은 “조용한 성품의 당인(黨人)”이라 평했다.

또 야당 대변인으로 윤보선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김수한(金守漢)은 기골이 크고 위풍당당한 그를 “영국 신사”라고 평했다. 점잖고 품위 있는 ‘영국 신사’의 이미지는 윤보선의 입지에 플러스 요소로 작용했다.

윤보선과 대통령 자리


▎윤보선(오른쪽 두 번째) 자택에서 가진 야 중진 4자회담.
‘영국 신사’ 윤보선은 평소에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안국동에서 윤보선과 앞뒤 집에 살던 내무차관 김영구(金永求)는 “상공장관 시절에 그를 만나본 미국인들은 ‘He is a sleeping man(잠자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업무를 전혀 모르면서 자리만 지킨다는 의미였다”고 털어놓은 일이 있다. 기자 출신으로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김준하(金準河)는 “윤보선씨는 특출하게 눈에 띄는 정치가는 아니었다”고 회고했고, 윤보선의 부인 공덕귀(孔德貴)는 남편은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언변이 없었다”고 증언했다.(공덕귀 <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 1994)

그런 그가 민주당 구파의 리더로 급부상하게 된 것은 우선 구파를 이끌던 신익희(申翼熙)와 조병옥 등 거물급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 데 그 일차적 원인이 있었다. 구파의 지도자급으로 남게 된 인물은 윤보선과 김도연(金度演)이었는데, 그 무렵 윤보선의 당내 위상은 김도연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 윤보선이 지도자로 급부상한 배경에 대해 조병옥의 핵심 참모였던 고흥문은 조병옥 밑에서 민주당 조직을 사실상 운영해온 유진산(柳珍山)이 조병옥 사후 윤보선을 등에 업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작지만 김도연은 자기 계파를 갖고 있어 차기 당수를 노리던 유진산으로서는 계파 없는 윤보선을 택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고흥문 <못다 이룬 민주의 꿈>, 1990) 여기에 조용하고 신사적이며 중후한 윤보선의 영국 신사 이미지가 한몫했다.

7·29 총선 이후 다수당이 된 민주당의 의석 수는 신파가 78석, 구파가 83석으로 구파 쪽이 5석 더 많았다. 이에 고무된 구파는 신파를 제치고 제2공화국의 대통령과 국무총리 자리를 둘 다 확보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23인 소위원회를 열었다.

“나와 윤보선 씨가 합석한 자리에서 ‘두 분 중에서 어느 한 분이 대통령 후보나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되어도 불평이 없겠는가?’고 다짐하기에 나는 불평 없이 중론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답변하였다.”(김도연 <나의 인생백서>, 1967) 그러나 윤보선의 경우는 내심 실권을 가진 국무총리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점이 부인 공덕귀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간접 투영돼 있다.

“나는 그때 개인적으로는 해위가 총리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누가 더 잘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해위는 야당 지도자로 쌓은 오랜 경험이 있으니 그 경험을 살려 일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총리 후보로 지명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우선 구파 내의 라이벌인 김도연으로 말하면 초대 재무장관을 역임한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국무총리에 어울릴 만한 행정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그를 제치고 국무총리 후보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2대 국무총리와 민선 부통령 등을 역임해 대중적 인기가 있던 신파의 장면(張勉)과 맞붙을 경우 승산이 있다고 보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이에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 쪽을 택했다. 전략적인 선택이었지만 체통을 중시하는 그로서는 서열의 정점인 대통령도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마침 신파 쪽에서도 총리 자리를 가져가기 위해 개성이 강한 김도연보다 명문 출신의 윤보선을 선호해 그에게 표를 몰아줄 생각이었다.

이렇게 해서 윤보선은 1960년 8월 12일, 양원합동회의에서 재석 259석 중 208표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제2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다음날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즉시 거처를 경무대로 옮겼다.

윤보선과 리더십


▎장면 씨로부터 축하인사를 받는 윤보선 대통령(오른쪽).
누군가는 윤보선의 사주팔자를 “권출타인(權出他人) 사불유기(事不由己) 재세수현(在世雖顯) 유질연수(有疾延壽)”, 즉 “권력이 남에게서 나오니 자기 일을 자기가 처리하지 못하나, 세상에 있을 때는 높이 현달하며 병이 있더라도 장수한다”고 풀었다.

생애와 대조해보면 어지간히 맞혔다는 생각도 든다. 제2공화국과 군사정부 양쪽의 대통령을 역임했지만 그는 어느 쪽에서도 실권을 가져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높은 자리다. 많은 사람이 그를 무난한 인물로 보았고 신파도 그를 적임자로 생각했으나 막상 높은 자리에 오른 그는 전혀 다른 모습을 취했다. 위계질서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만사를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양원합동회의에서 재석 259석 중 208표를 얻었다는 것은 민주당 신파가 전략적으로 표를 몰아주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윤보선은 신·구파에서 한 자리씩 나눠 갖기로 한 정치적 합의를 지킬 생각이 별로 없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신파였던 김재순은 “7·29 총선 후 대통령은 구파에서, 총리는 신파에서 나눠 맡기로 했는데 윤보선을 먼저 대통령으로 뽑고 나니 구파의 마음이 달라졌다”고 회고했고, 4·19혁명 후 과도정부를 이끌었던 허정(許政)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나는 윤 대통령에게 물었다. ‘누구를 지명하겠는가?’ 그는 대답을 망설였다. 나는 대통령으로서 파벌을 초월하여 신파의 장면 씨를 총리로 지명하는 것이 정치 도의에 맞는 일이라고 윤 대통령에게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웃으며 말했다. ‘장면 씨는 안 돼. 당내 공기도 그렇고….’ 이 말을 듣고 나는 쏘아붙였다.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모두 구파에서 차지하는 법은 없어. 정치는 타협이 아닌가?’”(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1979)

그러나 대통령 자리를 확보한 윤보선은 끝내 국무총리에 김도연을 지명했다. 그가 총리가 되면 구파의 리더인 자기가 뒤에서 조종해볼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남편이 총리를 하고 싶어 했다는 공덕귀의 회고록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8월 17일 인준표결에 부친 김도연 지명안은 보기 좋게 부결되고 말았다.

의석 수는 구파 쪽이 5표가 더 많았는데도 과반수에서 3표가 모자랐다. 이는 구파가 독식해선 안 된다는 신파의 명분이 먹혀들어갔음을 뜻한다. 구파에 대통령 자리를 내줌으로써 총리 자리를 가져올 명분을 확보한다는 신파의 전략이 성공한 것이었다. 이에 윤보선은 어쩔 수 없이 장면을 지명할 수밖에 없게 됐다.

8월 19일 인준표결에 부쳐진 장면은 과반수에서 4표를 더 얻어 국무총리에 당선됐다. 이렇게 신파로 정권이 넘어가자 구파 동료들은 윤보선이 장면을 먼저 지명했더라면 인준이 부결되고 김도연이 국무총리에 당선될 수도 있었을 게 아니냐며 불평을 토로했다. 리더십에 상처를 입은 윤보선은 실권을 장악한 장면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윤보선과 장면


▎1961년 7월 3일 취임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과 환담을 나누는 윤보선 대통령(위 사진). 1961년 권농일 행사의 하나로 진행된 모내기에 참석한 윤보선 대통령.
윤보선은 장면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라이벌 의식을 보였다. 그에게 정권을 빼앗겼다는 상실감에서 비롯된 현상만도 아니었다. 그 방증의 하나가 아직 국회가 개원되기 전인 8월 6일께 남산의 외교구락부에서 열린 기독교인 국회의원 당선자 축하연에서의 일화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허정은 “윤보선 씨와 장면 씨는 두 시간 동안 나란히 앉아 있으면서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불과 반 년 전 독재정권 타도를 위해 뜻을 같이했던 두 사람이 왜 같은 자리에서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사이가 되었던 것인지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두 사람에겐 비슷한 구석도 많았다. 가령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나 풍족하게 자란 윤보선이 영국 유학을 다녀온 것처럼 인천 해관 간부였던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란 장면 또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처지였다.

두 사람의 관계 진출 계기가 이승만의 발탁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도 같고, 민주당에 들어가 정계로 진출한 계기가 독재에 맞서기 위해서였다는 점도 같다. 다만 나이가 두 살 아래인 장면이 윤보선보다 늘 서열이 높았다는 점이 달랐다.

그러나 국가원수가 된 지금은 의전상이라도 장면보다 서열이 높았다. 그 점을 확인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윤보선은 제1차 장면 내각이 출범한 직후 비서실을 통해 “대통령께서 휴가 겸 민정시찰을 떠나시니 모두 나와 전송하시오”라는 전갈을 보냈다. 이에 장면을 비롯한 각료 전원이 8월 29일 이른 아침 서울역에 나와 윤보선을 기다렸다.

이윽고 ‘관1호’ 차를 타고 느긋하게 도착한 윤보선 부처는 장면 총리 이하 각료의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오전 8시 특별열차편으로 서울역을 떠났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정치권에서는 “내각책임제인데 대통령이 각료들에게 전송 나오라는 지시는 무엇이며, 그렇다고 이를 군말 없이 따른 장 내각은 또 뭐냐”는 말들이 나돌았다. 한마디로 “윤보선은 월권을 했고 장면은 제 밥그릇도 못 챙겼다”는 평이었다.(이용원 <제2공화국과 장면>, 1999)

갈등은 1차 조각 때부터 빚어졌다. 구파는 신파 일색이라고 비난하며 별도의 교섭단체를 등록했고, 이를 기점으로 윤보선은 구파 정치인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모임을 갖고 대책을 강구했다. 그런 가운데 한 번은 허정 과도정부 때 임명된 시장과 도지사를 경질한 일에 대해 구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유감’ 성명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장면 내각이 왜 대통령이 정치에 개입하느냐고 반박하자 윤보선은 국가적인 잘못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말한 것이라고 응수하기도 했다. 이 같은 윤보선에 대해 장면의 공보비서였던 송원영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존재였다. 그는 헌법에 있는 그대로 상징적인 존재로 가만히 있지 않고 행정부·입법부·사법부 위에 군림하려 했다”고 회고했다.

윤보선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961년 1월 12일, 신년치사를 하기 위해 양원합동회의에 참석한 그는 현 시국을 ‘국가적 위기’로 규정하면서 거국내각을 구성하도록 촉구했는데, 이는 장면 내각 자체를 부정한 발언이었다.


▎1960년 경무대에서 윤씨 집안 사람들과 기념촬영한 윤보선(왼쪽에서 세 번째). 맨 왼쪽이 사촌형으로 서울대 총장을 역임한 윤일선.

청와대 회담

장면은 발끈했지만 데모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에 장면은 각의에서 ‘데모규제법’과 ‘반공임시특별법’을 제정하기로 결의했다. 그러자 이를 야당 탄압의 ‘악법’이라면서 혁신계 정당을 중심으로 39여 개 단체가 들고 일어났다. 여기에는 구파(신민당)의 일부와 신파(민주당) 내의 신풍회도 가세했다.

1961년 3월 18일 대대적인 반대시위가 있었고, 이어 3월 22일에는 사회대중당과 통일사회당 등 혁신계가 주도한 횃불 데모가 일어났다. 이날 시청 앞에서 ‘2대 악법 성토대회’를 개최한 혁신계는 ‘장정권 타도’를 외치며 장면의 사택이 있는 명륜동으로 몰려갔다. 횃불을 든 이들은 ‘미군 철수’ ‘김일성 만세’ 등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나도 구호들이 심상치 않아 단신으로 지프차를 타고 혜화동까지 그들의 뒤를 따라가며 현장에서 동태를 살펴보았다. 그 분위기는 몹시 살벌하고 극렬하여 어딘가 색채가 다른 데모라고 단정할 수 있었다.”(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

청와대로 돌아온 윤보선은 조재천 법무장관을 불러 장시간 대책을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즈음 부산에 다녀온 민의원 의장 곽상훈(郭尙勳)이 찾아와 “민심이 심각하니 우리가 한번 모여서 협의를 갖도록 합시다” 하고 제안했다.

이에 윤보선은 3월 23일 장면과 민의원 의장 곽상훈, 참의원 의장 백낙준 그리고 민주당 구파인 신민당 중진(김도연·양일동·유진산·조한백·서범석)을 청와대로 불렀다. 이날 청와대 회담에 참석했던 장면은 이렇게 회고했다.

“이날 논제로 내가 연락받고 온 것은 반공을 위한 국민운동을 전개해보자는 것이었다. 처음엔 화기애애한 가운데 그런 얘기가 교환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화제가 정권문제로 바뀌더니 나중에는 윤 대통령으로부터 ‘혼란한 정국을 유지할 자신이 있느냐?’는 질문까지 받게 되었다. 윤씨의 어조는 은근히 나의 국무총리 사임을 종용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장면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고는>, 1967)

이에 장면은 “내가 그만두면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당장 어디 있겠소?”라고 반박했다.(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

이날 참석자들은 밤 11시30분까지 머물렀지만 결론이 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헤어질 때 회담 내용을 일체 함구하기로 했으나 다음날 백낙준이 공개하는 바람에 각 신문에는 “윤 대통령이 장 총리에게 정권을 내놓으라고 했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그러자 격분한 신파는 “윤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간섭한다면 우리 민주당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윤보선과 장면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고 말았다. 대통령과 총리의 반목은 정치력 약화라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가져와 차후 닥치는 정변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올 것이 왔구나”

“1961년 5월 16일. 침실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곤한 잠 속의 나를 깨웠다. 이재항(李載沆) 비서실장을 보는 순간 나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때 시각은 3시30분을 넘어 4시 가까이 된 것으로 기억된다.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의 전화가 와 있습니다. 대통령 각하께 직접 보고해야 할 일이랍니다.’ 수화기를 드니 장 총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각하, 지금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정부 인사들이 은신하고 있는 중이오니 대통령 각하께서도 신변의 안전을 배려해주십시오.’”(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 1991)

비서실장도 잠시 피신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으나 윤보선은 거절했다. 그가 피신하지 않았던 것은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반란군들과 사리를 따져볼 수도 있겠고 혹 최악의 경우라도 의연히 대처하리라 다짐했다. 포로가 되든 피살이 되든 그리 부끄러울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날 아침 9시쯤 장도영 등이 찾아왔다. 비서의 보고를 받은 그가 응접실로 내려갔더니 거기에는 장도영을 비롯한 3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 현석호 국방장관 그리고 박정희(朴正熙) 소장과 유원식(柳原植) 대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윤보선은 그들을 보자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말했다고 한다.

이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은 “5·16혁명 전에 혁명군의 계획이 윤보선 대통령에게 알려져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3일 최고회의의 유원식 위원에 의해서 밝혀졌다”고 한 신문이 ‘사전내통설’을 폭로한 뒤부터였다.(<동아일보> 1962년 5월 4일) 유원식은 윤보선에게 쿠데타 계획을 알리고 “혁명이 일어나거든 대통령으로서 국민에게 사과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사표를 내면 혁명군이 그대로 유임하도록 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했었으며, 이때 윤 대통령도 이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보도가 나가자 신파 측은 “역시 그랬었구나” 하고 분개했으나 윤보선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러나 몇 년 뒤 한 월간지와 대담기사에서 “3월 위기설이다, 4월 위기설이다 하여 금세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상태 아니었소. 그래서 ‘날 것이 났구먼’ 하는 말이 나온 것이지 다른 뜻은 없었다”고 사전내통설을 부인했다.(<신동아> 1966년 1월호)

그리고 1967년에 출간한 <구국의 가시밭길>에서는 ‘날 것이 났구먼’을 ‘올 것이 왔구나’로, 1991년에 출간한 <외로운 선택의 나날>에서는 ‘온다던 것이 왔구나’로 기록됐다. 그러나 당일 현장에 있었던 국방장관 현석호는 “윤보선 씨는 선뜻 계엄을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이에 조금 앞서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5·16사태를 애국적 거사로 극구 찬양해 마지않았다”고 회고했다.(<월간중앙> 1970년 7월호)

또 당일 청와대에 갔으나 밖에서 대기하던 대령 김재춘(金在春)은 “대통령 거실 안에서 일어난 일을 나는 박 장군에게서 자세히 들었다. ‘윤 대통령도 민주당 신·구파 싸움에 아주 지친 모양이야. 올 것이 왔구려 하면서 군사혁명을 지지하고 계엄령도 추인했어. 우린 이제 성공했어!’”라고 회고했다.(<신동아> 1983년 10월호)

사건을 폭로했던 유원식 또한 윤보선의 해명에 대한 반박문을 <월간중앙>(1970년 8월호)과 <정경문화>(1983년 9월, 10월호)에 발표했다.

사전내통설에 대한 진실은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쿠데타 세력이 펴낸 책은 쿠데타 세력이 윤보선과 “소극적이나마 혁명의 필연성을 인정하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고 기록했다.(국가재건최고회의한국군사혁명사편찬위원회 <한국군사혁명사>, 1963)


▎1. 윤보선 생가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2. 윤보선 안국동 고택.

인조반정

윤보선의 회고록이나 그의 대변인이었던 김준하의 회고록에 따르면 거실에서 대면했을 때 긴장된 분위기를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박정희였다. “대통령 각하, 이렇게 근심을 끼쳐 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희도 처자가 있는 젊은 몸으로서 오직 우리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애국일념에서 목숨을 걸고 이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미 선포된 계엄령을 추인해 달라고 했다. 윤보선은 거부했다. 다시 추인을 요구했지만 역시 거부하자 일행은 일단 모두 물러갔다. 그러나 잠시 후 박정희와 유원식이 다시 돌아와서 “저희는 대통령 각하께 과거에도 충성을 다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앞으로도 그 충성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이 혁명을 인조반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

인조반정(仁祖反正)이란 1623년 서인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한 정변을 가리킨다. 결국 장면을 몰아낸 뒤 윤보선을 옹립하겠다는 뜻인데, 당시 정치부 기자였고 뒤에 정치인이 된 이만섭(李萬燮)은 “윤보선 대통령은 지나가는 말로 들었다지만 어쨌든 혁명은 났거든요”라는 말로 윤보선이 그 말을 귀담아들었을 것임을 시사했다.

쿠데타 세력이 돌아간 다음 청와대를 찾아온 것은 유엔군 사령관 카터 B 매그루더와 주한 미 대리대사 마셜 그린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매그루더였는데, 옆에 있던 그린 대리대사는 이때의 대화 내용을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매그루더는 총구멍에서 시작된 소규모 그룹에 의한 정권 찬탈은 한국의 미래에 재난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고 나서 나(그린)는 매그루더 장군과 내가 오늘 아침 일찍 발표한 (장면정권 지지)성명을 언급했고, 나는 합헌적으로 한국에서 수립된 정부를 지지하며, 매그루더 장군이 말한 것과 같이 총구멍에서 야기된 정부의 어떤 변화도 (4·19혁명에 의해) 거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획득한 한국의 민주적 기관의 생존에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믿는다고 강조했다.”(박태균 <우방과 제국>에서 재이용)

그러나 윤보선의 입장은 달랐다.

“대통령은 자신의 견해가 매그루더 장군과 나의 견해와 다르다고 말했다. 현 정부에 대한 불만과 환멸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국민들은 더 이상 장면 내각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했다.”(박태균) 그러면서 매그루더가 지금 서울시내에 들어온 반란군의 병력은 약 3500명인데, 그 열 배인 3만5000명만 동원하면 진압할 수 있으니 병력 동원령을 내려주기 바란다고 요청하자 국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지면 그 틈을 타 북한이 쳐 내려올 수도 있다는 논리를 들어 이를 거부하고, 사태 해결을 위해서는 거국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날 그린 대리대사는 “각하의 이 결정으로 한국은 지금부터 오랫동안 군부통치하에 놓이겠지요”라는 말을 남긴 채 청와대를 떠났다고 한다.

대통령의 친서

윤보선이 쿠데타 진압을 반대한 것에 대해 한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1961년 5·16쿠데타 당시 진압에 반대했던 것으로 최근 비밀이 해제된 미 국무부 문서에서 밝혀졌다.카터 매그루더 당시 주한 유엔군 사령관이 미 합참의장에게 보낸 비밀 전문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16일 상오 청와대를 방문한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군사계엄 선포에 반대하지만 군사혁명을 무산시키는 어떠한 단호한 조치도 반대한다’고 말했다.윤 대통령은 또 이날 하오에 있은 매그루더 사령관 및 마셜 그린 주한 미 대리대사와의 3시간 가까운 면담에서 장면 정권의 무능력과 부패상 등 급박한 현안과 직결되지 않은 문제를 거론하면서 거국내각 구성을 주장했다고 이 비밀전문에 기록돼 있다.”(<한국일보> 1996년 10월 9일)

이 기사는 당시 대리대사 그린이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 말미에 붙인 <논평>, 곧 “윤보선 대통령은 장면 총리의 사임을 보장하면서 즉각적인 난관을 해소한 뒤에 한국을 이끌어나갈 거국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언질을 쿠데타 세력으로부터 받은 듯하다”(박태균)는 내용과 비슷하다.

윤보선이 주장한 거국내각이란 결국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정권을 의미한다. 거국내각에 대한 언질을 받은 때문이었을까. 그는 언론계 사장단의 자문을 받은 뒤 5월 16일 밤 장도영의 요구를 받아들여 “사태수습을 위해 전 국민이 협조해줄 것과 장면 총리 이하 전 국무위원은 한시바삐 나와 사태를 수습하기 바란다”는 대민방송을 했다.

그리고 5월 17일에는 비서들을 시켜 1군 사령관과 6개 군단장에게 각기 “국군끼리 충돌하지 말라”는 요지의 친서를 보냈다. 당시 대변인 김준하에 의하면 이 역시 장도영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헬리콥터를 타고 원주의 1군 사령관 이한림(李翰林)에게 대통령 친서를 전달하러 갔던 김준하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16일 아침 장도영 장군과 박정희 장군이 청와대를 방문한 일부터 자세하게 청와대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대통령께서 박정희 소장에 대해 자세히 알아오라고 했다’고 말한 사실을 전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이 장군은 ‘그가 우마노호네까 이누노호네까(말뼈다귄가 개뼈다귄가→어디서 굴러먹었는가) 알고나 있습니까?’ 하고 일본어를 섞어가며 불만스럽게 대꾸했다.”(김준하 <대통령과 장군>, 2002)

처음엔 쿠데타를 진압할 계획이었던 이한림은 지침을 기다렸으나 잠적한 장면 총리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대통령의 친서를 받고 마음을 정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날 낮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으로부터 진압 권유가 있었으나 그는 응하지 않았다.

17일 오후 6시. 군사령부 연병장에서 열리는 국기강하식에서 이한림은 예하 전 장병에게 “북한군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 시기에 내란으로 치달을 위기를 조성할 수 없다고 판단돼 부득이 나는 쿠데타 반대에서 묵인하는 입장으로 전환했음을 알립니다”라고 언명했다. 그리고 그는 집무실에 돌아와 부관 박준병(朴準秉) 대위에게 전화로 박정희 장군을 연결하라고 지시했다.

“‘네 쿠데타에 나는 묵인한다.’ ‘고맙다.’ ‘나는 야전군의 일을 할 터이니 그리 알라.너는 서울 쪽을 하고 내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 ‘그래,알았어.’ 이것으로 5·16 쿠데타를 진압할 힘을 가졌던 유일한 세력인 제1야전군도 꺾이고 만 것이었다.”(<이한림 회상록> <동아일보> 1994년 11월 17일)

윤보선의 오산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윤보선과 유진산(오른쪽).
5월 18일, 수녀원에 잠적했던 장면이 모습을 나타내고 사임을 발표했다. 장면은 자기가 사임을 결정하게 된 동기는 윤 대통령의 태도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쿠데타를 지지하는 태도를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17일경에는 알게 되었다. 미 대사관으로부터 윤씨의 태도에 대한 연락을 받았다. 윤씨가 그렇게 나오는 한 자기들은 별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군 쿠데타를 지지할 뿐 아니라 쿠데타 진압을 방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쓰고 있음을 알았다. 대통령이 김모 비서를 1군사령관 이한림에게 보내어 쿠데타 진압을 저지하도록 했다. 국군통수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의 태도가 이러한 것을 알고는 쿠데타가 진압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2공의 민주정권은 역사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장면은 윤보선에게 그 책임을 전가했고, 윤보선은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장면에게 그 책임을 전가했다. 그러나 민주당 구파였던 김영삼(金泳三)은 “만약 그때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분명한 태도를 취했다면 쿠데타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면서 윤보선과 장면 양쪽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김영삼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000)

민주당 신파였던 김대중(金大中) 역시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 성립에 대해 작위적인 책임이 있고, 장면 총리는 부작위의 책임이 있다”면서 윤보선과 장면 양쪽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김대중 <나의 삶, 나의 길>, 1997)

장면의 경우도 위기관리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지만, 윤보선의 경우 “쿠데타는 엄연히 그가 인정한 것이었고 또 지지한 것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는 허울뿐인 내각제 아래에서의 대통령직에 불만이 고조돼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김대중은 덧붙였다.

그린 대리대사가 미 국무부에 보낸 전보에 따르면 박정희는 5월 16일 아침 윤보선을 처음 만났을 때 곧 민정이양을 실시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윤보선은 자신을 정점으로 한 민주당 구파와 쿠데타 세력의 일부를 연합한 새로운 권력형태를 구상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박태균)

이와 관련해 유원식은 “군사혁명이 일어난 다음날 윤보선 대통령은 미국과 홍콩에 가 있는 사람들에게 조속한 귀국을 재촉하는 한편 시내에 있는 정치인들을 불러 의사를 타진했다”는 글을 남겼다.(유원식 <혁명은 어디로 갔나>, 1987)

구파의 고흥문 역시 윤보선이 어떤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해위는 한 달이면 7〜8번씩 나를 청와대로 불러올렸다. 그때마다 해위는 ‘민정이양 시기가 되면 내게 정권이 올 것’이라는 요지의 말을 자주 내뱉곤 했다. ‘그들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목숨 내걸고 쿠데타 일으킨 사람들인데 정권을 내놓다니요. 절대로 그렇게 안 할 겁니다.’ 나는 해위의 오산을 염려했지만 그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다.”(고흥문)

고흥문의 염려처럼 쿠데타 세력은 윤보선에게 끝내 정권을 내주지 않았다. 장면 내각이 사퇴함에 따라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고 내각수반에 장도영을 임명했다. 새로운 각료 명단도 발표했다. 거의가 현역 군인이었다. 그런데 ‘내각수반’이란 직제는 헌법에 있지도 않았다. 결국 2공의 내각책임제 헌법이 공중에 떠버리면서 대통령의 위상이 문제로 대두됐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이 민의원과 참의원 양원합동회의에서 재적 3분의 2 이상의 투표를 얻어 선출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을 선출한 근거가 되는 양원은 모두 해체되지 않았던가?”(김준하)

“그럴 무렵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최고회의가 전일 장면 내각에서 결의한 비상계엄령의 인준안을 청와대로 이송해온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윤보선 씨를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청와대에서는 양론이 일었다. 반송하자는 주장과 결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대통령은 후자를 택했다.”(김준하)

거듭되는 하야 번복


▎1962년 3월 22일 대통령을 사임하고 공덕귀 여사와 함께 안국동 사저로 이사하는 윤보선.
윤보선은 도장을 찍고 나서 하야할 것을 결심하고 최고회의에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는 5월 19일 저녁 방송을 통해 하야성명을 발표했다.

그날 밤 장도영과 박정희가 황급히 찾아와서 하야 번복을 종용했다. 민정이양을 앞당기고 싶었던 윤보선은 이들의 요청을 수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20일 하야 기자회견을 앞두고 외무부 사무차관 김용식(金溶植)이 청와대로 찾아와 “현재 대한민국의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이 사라지면 유엔군의 군사원조를 받는 법적 근거가 소멸되고, 정부 수립 후 54개국과 맺은 조약 등의 외교문서가 모두 무효가 되니 하야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건의했다.(김용식 <희망과 도전>, 1987) 이에 윤보선은 고민 끝에 하야를 번복하게 된다.

그 대신 6월 3일 “군사정부는 이른 시일 내에 민간인에게 정권을 넘겨주기 바란다”는 요지의 기자회견을 가졌다. 초창기에 그의 충언에 호의적이었던 군부는 즉각 반발하며 그 보복조치로 회견 내용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자들(김영상·이만섭·이진희·조용중)을 연행했다. 유언비어 유포죄였지만 이들에 대한 연행은 민정이양을 촉구한 윤보선 자신에 대한 협박이기도 했다.

7월 3일, 장도영이 제거되고 박정희가 전면에 부상했다. 군사정권의 실체가 드러난 8월 초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된 박정희가 청와대로 찾아와 “군정을 1년쯤 더 한 뒤 민정으로 정권을 이양하면 좋을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1년 반쯤 더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는 말을 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8월 12일에 나온 성명을 보니 군정을 2년 연장해 1963년 여름에나 민정이양을 한다고 되어 있었다. 이에 분개한 윤보선은 8월 15일 하야하기로 하고 공보비서에게 성명서를 기초하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새뮤얼 버거 주한미대사가 찾아와 “하야하시면 안 됩니다. 이는 내 개인의 의사가 아니고 미 국무부의 의사입니다”라고 알렸다.

이에 윤보선은 한·미 관계의 중요성을 고려해 하야를 다시 번복하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원래 이긴 자와 손잡는다. 이 무렵 쿠데타의 성공이 확실해지면서 군사정권과 손잡기로 방침을 정한 미국은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이 하야하면 군사정권의 합법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뒤따르기 때문에 윤보선의 하야를 적극 만류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윤보선과 대장 계급장

민정이양에 대한 시기문제로 군사정권과 관계가 몹시 껄끄러워져 있을 때 갑자기 박정희가 청와대로 찾아왔다. 평소와 달리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들어온 그는 청와대 비서들과도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윤보선과 방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대미관계에서 권위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현재 계급을 중장에서 대장으로 승진시키고 그 계급장을 “대통령께서 직접 달아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하고 윤보선에게 요청했다. 이 바람에 옆에 서 있던 청와대 비서들이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먹었다고 한다.

며칠 뒤 청와대에서는 송요찬(宋堯讚) 내각수반을 위시해 최고회의 간부, 최고회의 출입기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급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의장과 김종오(金鍾五) 장군에게 직접 계급장을 달아주던 윤보선이 “두 분은 다 같이 키가 작군요” 하고 주위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농을 했다.

장내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박 의장은 정색을 하고 대꾸했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말소리도 주위 사람이 모두 알아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주위에 있던 군인들은 웃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박 의장은 그의 키가 작은 데 대해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키가 작다’는 말만 들으면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고 한다.(김준하)

이렇게 하여 대장 계급장을 달고 도미한 박정희는 그 해 11월 14일 케네디와 한·미정상회담을 갖고 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는 군사정권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정식으로 얻어냈다는 뜻이다. 윤보선은 “1963년 여름까지 군사정권을 민간인에게 이양하겠다고 천명한 한국 정부의 의도를 환영한다”는 공동성명의 내용을 보고 “괜히 대장 계급장을 달아주는 들러리만 선 셈이었군” 하고 후회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효용가치가 끝난 윤보선은 본격적으로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귀국 후 박정희도 청와대를 형식적으로 예방하기는 했으나 방미 결과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없이 그저 건성으로 왔다 갔다. 체통을 중시하던 그의 분통을 터뜨리게 한 사건은 ‘대통령 특사’ 김종필(金鍾泌)이 자유중국을 방문한다는 신문 기사였다.

“명색이 대통령 특사인데 대통령인 나와는 일언반구 상의하거나 의례상으로 양해를 받은 일도 없이 어떻게 특사가 된단 말인가? 나는 대통령직을 사임할 시기가 임박해오고 있음을 직감했다.”(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

1962년 3월 16일 최고회의는 정치활동정화법을 전격적으로 통과시킨 뒤 이 법안을 청와대로 보냈다. 형식적인 결재를 받기 위함이었다. 윤보선은 박정희를 청와대로 불러 약 3000명의 정치활동을 규제하는 이 법안을 철회하도록 촉구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우리말에서 잘 쓰지 않는 일본식의 ‘목숨을 걸고(命を掛けて)’라는 표현을 두 번씩 사용하면서 “나는 목숨을 걸고 하겠습니다” 하고 딱 부러지게 말한 뒤 청와대를 떠났다고 한다.(김준하)

윤보선은 이를 계기로 하야를 결심했다. 버거 대사의 형식적인 만류가 있었지만 군사정권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 있어서도 그의 효용가치는 끝나 있었다. 1962년 3월 22일 윤보선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청와대를 떠났다.


▎윤보선 대통령(오른쪽)이 5·16 혁명위원들을 접견하고 있다.

윤보선과 5대 대선

1963년 정정법이 해제되고 대통령 선거일정이 제시되자 군정반대의 기치를 내건 민정당(윤보선)을 비롯한 여러 야당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했다. 이에 야권 통합운동이 일어났지만 결과는 분란만 야기하고 말았다.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난립한 야당 후보는 모두 6명이었는데 선거 종반으로 가면서 열세인 허정·송요찬 후보가 사퇴함으로써 판도는 윤보선 대 박정희로 좁혀졌다.

윤보선은 선거 유세에서 ‘사상 논쟁’의 전략을 택했다. 박정희의 좌익 전과를 폭로하는 주장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이를 뒷받침하는 과거의 신문 기사와 책자가 증거자료로 제시되기도 했다. 투표일이 가까워오자 사상 논쟁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朴相熙)의 절친한 친구 황태성(黃泰成)이 밀사로 남파된 사건을 끌어들이면서 더욱 격화되어갔다.

야당에서는 “황태성이 공화당 창당자금을 댔다”는 식의 전단지를 뿌리며 파상공격을 펴나갔고, 당시 야당지로 명성을 날리던 <동아일보>는 호외를 200만 장이나 찍어 서울과 호남에 집중 살포했는데, 거기에는 박정희가 좌익 혐의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는 내용이 잔뜩 실려 있었다.

처음 색깔 공세에 수세적이었던 박정희는 “내가 공산주의자라면 군정치하 2년 때의 서릿발 같은 권세를 갖고 왜 김일성과 야합하지 않았겠는가? 싸우다 힘이 부족하면 빨갱이라는 모략을 하는 것이 바로 야당이다. 과거에 한민당이 이 따위 수법을 썼는데 오늘 야당도 이와 똑같은 수법을 쓰고 있다”고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윤보선이 유리한 듯 보였고, 주한 미대사관이 국무부에 올린 보고서에도 “윤보선은 기대 이상의 선전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의외였다. 색깔공세를 폈던 윤보선은 대도시와 중부지방에서는 이겼으나, 좌익용공으로 몰려 피해를 많이 본 전라도·경상도·제주도에서는 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두고 당시 언론은 ‘남여북야(南與北野)’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색깔공세는 본래 여당 쪽에서 세무사찰→수사→구속 등의 무서움과 전쟁 등의 공포심을 야기시켜 그 반대급부로 표를 얻는 전략인데, 아무 권력도 없는 야당의 매카시즘 전략은 좌익용공의 상처를 안고 있던 유권자에게 오히려 여당 후보가 억울하게 좌익으로 몰린 것 아니냐는 동정심을 유발하는 역효과만 불러왔다.

게다가 박정희는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추진해서 국민을 잘살게 해주겠다는 포지티브 전략을 구사했던 데 반해 윤보선은 상대방의 좌익 전력만을 문제 삼는 네거티브 전략으로 일관했는데, 이것이 득표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개표 결과 윤보선은 15만6000여 표 차로 졌다.

이를 두고 조직력과 자금력에서 열세였던 윤보선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으나 당시 주한 미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에는 “군사정부는 의식적으로 질서 있고 효율적인 투·개표가 보장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면서 ‘정신적 대통령’을 자처한 윤보선은 뒤이은 11월 25일 총선에서도 색깔공세를 폈으나 여당 88석에 민정당 27석으로 역시 좋은 결과는 얻지 못했다.

윤보선과 사쿠라

‘사쿠라(벚꽃)’ 구경은 공짜다. 그처럼 공짜로 극장에 들어가서 구경하다가 연극의 볼 만한 장면에서 활짝 핀 사쿠라처럼 흥이 확 돋게 소리쳐주는 사람을 에도(江戶) 시대에는 ‘사쿠라’라고 했는데, 메이지(明治)시대로 들어오면서는 노점상이나 가게에 손님을 확 꼬이게 만드는 바람잡이를 ‘사쿠라’라고 부르게 됐다.

그리고 뒤에 이 말은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상대방에게 미리 심어놓은 ‘첩자’의 뜻으로도 전용됐는데, 윤보선이 유진산을 지칭한 ‘사쿠라’의 어원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럼 윤보선은 당시 왜 유진산을 ‘사쿠라’라고 불렀던 것일까? 그 시작은 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부터였다.

당시 야권 통합운동의 결과로 결성된 ‘국민의 당’ 대통령 후보로는 윤보선과 허정이 강세였다. 그러나 두 사람에 대한 사전조정이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제비뽑기까지 갔지만 역시 합의를 보지 못해 창당대회에서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당일 사회를 본 유진산이 이필선(李必善) 의원에게 의사진행 발언권을 준 것이 화근이었다.

“투표로 결정하면 당이 깨진다. 후보단일화가 사전조정으로 잘 안 되었으면 사후조정으로 해야 한다”는 요지의 이필선 발언이 나오자 고함과 욕설이 난무하면서 대회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이를 수습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유진산은 윤보선을 만나 허정에게 양보할 것을 권했다.

“이 과정에서 나에게 묘한 말이 들려왔다. 허정 씨가 대통령이 되고 유진산 씨가 국무총리를 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대통령 후보를 양보하라는 말까지 했으니 그가 변절했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지 않을 수 없었다.”(윤보선) 이런 전작이 있었기 때문에 윤보선은 유진산을 좋지 않게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총선 후 3공을 출범시킨 대통령 박정희는 민주당 정권 때 거의 타결 직전까지 진행됐던 한·일 국교정상화를 다시 추진하자 학생들은 이를 굴욕외교라며 격렬한 반정부 시위를 벌여나갔다.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거행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윤보선도 굴욕외교를 중지하라고 외치며 학생들에게 동조했다.

1964년 6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됐고, 이것이 해제된 직후인 7월 30일 공화당은 언론윤리법안과 학원보호법안을 기습적으로 국회에 상정했다. 제1야당 당수인 윤보선은 법안 저지를 위해 ‘단상 점령도 불사하는 강경투쟁’을 주문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그런데 언론윤리법안이 통과되는 과정을 석연치 않게 본 윤보선은 “유진산 씨가 공화당 측의 협상파들과 묵계해 정계 개편을 위한 개헌 약속을 하면서 모종의 뒷거래를 했다”는 심상치 않은 말이 들려왔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유진산은 사실을 추궁하는 윤보선에게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맞섰다. 그러자 옆에 있던 조직국장 정해영(鄭海永)이 원내총무 책상 위로 뛰어오르며 “사쿠라는 유진산이다” 하고 소리쳤다. 이에 20여 명의 원외 당원이 “사쿠라 유진산을 잡아라” 하고 외치며 소란을 피웠다.

윤보선과 진산파동

1964년 8월 5일, 윤보선은 소요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중앙상무위원회를 열고 “당에 해를 끼치고 여당에 동조한 사람은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제명시켜야 하오. 우리 당 안에 소위 사쿠라가 있다는 풍설을 그대로 둔 채 나는 더 이상 당의 대표 자리에 머물 수가 없소”라고 언명했다. 언론윤리법에 반대한 신문들은 “진산이 사쿠라”라는 논지의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유진산의 여당 묵계설에 뚜렷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심증은 있되 물증은 없다”라는 말이 이때 유행하게 되었다. 진산계의 반발이 거세지자 윤보선은 인사에 관한 것은 무기명 투표가 관례임에도 서면결의로 제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유진산의 사과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진산계의 청년당원 30여 명이 그의 집 담장을 넘어 들어와 “서면결의를 철회해 달라”고 요구한 이른바 ‘월장(越牆)사건’이 있었음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64년 10월 8일, 윤보선은 중앙위원회에서 “나와 유진산을 양자택일하라”고 압박하며 제명 표결을 강행했다. 365명의 참석자 중 제명 찬성이 189표, 반대가 171표로 제명이 결정됐다. 유진산은 “당의 결정에 정치적으로 승복한다”며 당을 떠났다. 왜 윤보선은 근거도 분명치 않은 묵계설에 집착해 유진산을 제명한 것일까?

그에 대해 당시 민정당 당무위원이었던 고흥문은 이렇게 분석했다. 첫째, 윤보선은 초기에 유진산의 조직력에 의해 지도자로 부상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5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국민적 인기를 확보한 뒤로는 더 이상 유진산에 업혀 다닐 수만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원내 전략을 짜는 데 윤보선의 강경론은 늘 유진산의 논리에 밀려 좌절되곤 했다.

그래서 차제에 유진산의 날개를 꺾고 지도자로서 입지를 확립하겠다는 복안이었다는 것이다. 둘째, 윤보선은 시국관이 다르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 자신은 3공의 합헌성을 부정하며 하루빨리 3공을 쓰러뜨리자는 강경론을 폈던 데 반해 유진산은 “극한투쟁만이 능사는 아니다. 우리가 헌법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는 이상 합리적인 대여(對與)전략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강경론과 온건론이 갈등의 골을 깊게 했다는 것이다. 셋째, ‘국민의 당’ 파동 당시 허정에게 후보 양보를 종용했던 유진산을 내심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던 윤보선은 당의 새로운 자금줄 역할을 하는 정해영을 중심으로 당권 장악의 구상을 갖게 되었고, 그 단초를 언론법 통과에서 구한 것이었다. 법이 통과된 다음날 정해영이 유진산을 사쿠라로 몰면서 정도 이상의 소란을 피운 것도 다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것이다.(고흥문)

그러나 이 제명 파동은 윤보선과 유진산 양쪽에 정치적 상처를 입혔고 야당의 당내 민주주의 전통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유진산을 둘러싼 사쿠라 논쟁과 제명 파동은 현실을 처리해야 하는 야당 정치의 탄력성을 잃게 한 시발점이 됐다는 점이다.

정치는 타협인데 타협이 ‘타도(제명)의 대상’이 되거나 ‘사쿠라’로 몰리면 정치는 탄력성을 잃고 입지도 그만큼 좁아진다. 여기에서 야당은 ‘선명성’과 ‘강경일변도’로 치닫게 됐고, 여당은 이를 돌파하기 위해 ‘날치기’로 맞서는 비극적 관행을 만들어냈다.(주돈식 <우리도 좋은 대통령을 갖고 싶다>, 2004) 오늘날에도 그 흔적이 짙게 남아 있는 3공식의 대치정국은 이렇듯 ‘진산파동’을 전후로 생성된 것이다.

유진산의 복수

“술수가 많다”는 평을 듣기도 했던 유진산은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민정당이 1967년 대선을 앞두고 재야세력을 결집해 민중당을 창당할 때 윤보선은 유진산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고흥문이 “과거 자유당 하던 사람까지 다 받아들이면서 굳이 진산만 거부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고 물었더니 윤보선은 “진산은 당에서 공식제명한 사람이오.

그러니까 그의 입당문제는 통합 후 당의 공식기구에서 논의해야 할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유진산은 자기 계파를 중심으로 반(反)윤보선 세력을 구축해나갔다. 민중당 구성원 가운데는 박순천을 중심으로 한 옛 민주당 신파가 있었다. 이들은 지난날 5·16을 추인해준 윤보선에 대해 깊은 앙심을 품고 있었다.

제명 조치로 윤보선에 대해 반감을 지닌 유진산은 이들 신파와 연대하면서 박순천을 밀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허정과 김도연을 만나 당수 경쟁을 포기하도록 설득했다. 1965년 6월 14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민중당 창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 선거가 선포되자 유진산이 막후 접촉했던 허정과 김도연이 돌연 당수 경쟁을 포기한다는 선언을 했다. 대회장은 일순 긴장으로 숨이 막히는 듯했다.

투표가 시작됐다. 결과는 윤보선 460표, 박순천 513표였다. 칼을 갈아온 유진산의 한판 복수가 보기 좋게 승리한 것이었다. 민중당 대표에 당선된 박순천은 그 해 7월 20일 박정희와 여·야 영수회담을 갖고 “헌정질서 유지와 여야 간의 극한대립을 지양하도록 노력한다”는 데 합의했다. 동시에 두 영수는 “앞으로 국가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주 만나 협의하기로” 약속했다.

이날의 여·야 영수회담은 그동안 완전히 끊겨 있던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상대를 정치 파트너로 보지 않고 타도대상으로 보아온 강경노선의 윤보선은 여·야 영수회담 자체가 싫었고, 박순천의 온건노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결국 민중당을 탈당해 한·일 회담 때 의원직을 사퇴했던 강경파들과 함께 신한당을 창당하기로 한다.

“박정권에 끝까지 대항해 군정을 종식시키고 민정을 회복할 수 있는 야당이 있어야 이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서 그는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걸자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생각한 선명야당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민주정치의 방법에 있어서나 대여전략을 구상하고 실천하는 입장에서 야당으로서의 자세가 확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요컨대 야당으로 가질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

1966년 3월 30일에 열린 신한당 창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에 추대된 윤보선은 제6대 대선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윤보선과 6대 대선

신한당의 때 이른 대통령 후보 지명에 접한 민중당은 대통령 후보감으로 고대 총장을 역임한 유진오(兪鎭午)를 영입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민중당은 신한당에 통합을 제의했다. 윤보선은 민중당을 ‘사쿠라당’이라며 일축했으나 신한당 내의 김도연·장택상·정일형 등이 통합하지 않으면 탈당하겠다고 압박해오고, 백낙준·이범석·허정 등의 재야세력도 압력을 가해오자 통합원칙에 동의한다.

이후 단일화촉진위가 구성됐으나 윤보선이 결말을 빨리 내자면서 야권 대통령 후보감인 자신과 유진오, 백낙준, 이범석 등의 4자 회담을 제안했다. 네 사람 가운데 강세는 윤보선과 유진오였다. 이에 윤보선은 유진오에게 대통령 후보를 양보했다. 계산된 행보였다. 그러자 유진오 또한 윤보선에게 대통령 후보를 양보했다.

여기에서 네 사람은 장시간 토의한 끝에 당선 가능성, 지명도, 대여투쟁성 등을 고려해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유진오를 당수로 하는 데 합의를 보게 됐다. 1967년 2월 7일 신민당 창당식에서 당수가 된 유진오는 “재야 민주 역량을 총결집해 정권교체를 이룩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고, 대통령 후보로 추대된 윤보선은 “조국에 최후 봉사를 할 시기가 왔다”고 천명했다.

이날 박순천은 당 고문에 추대됐는데 이는 사실상 정계 은퇴나 마찬가지였다. 대통령 선거일이 공고되자 6대 대선은 박정희에 대한 윤보선의 설욕전으로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한·일조약의 졸속 처리와 월남파병 등으로 박정희 후보는 야권과 학생 등의 거센 저항에 직면해 있었다. 그렇지만 4년간의 집권으로 일반 유권자에게는 대통령으로서의 친숙한 이미지가 형성돼 있었다.

그는 경제개발의 성과와 비전을 앞세우며 이를 지속하기 위한 지지를 호소했다. 이에 반해 윤보선은 쿠데타 이후에 추진된 100가지 공약의 허구성을 지적하면서 “지난 농사 망친 황소, 올 봄에는 갈아보자”라든가 “박정해서 못살겠다, 윤택하게 살아보자”는 재치 있는 구호로 표심에 다가가고자 했다.

여기에서의 ‘황소’는 공화당을 의미하고, ‘박정해서’의 ‘박’은 박정희를, ‘윤택하게’의 ‘윤’은 윤보선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러나 뚜렷한 선거 쟁점을 부각시키지 못했고, 또 5대 대선에 비해 야당 후보로서 신선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는 점 등은 윤보선에게 불리한 요소로 작용했다. 투표 결과는 역시 윤보선의 패배로 나타났다. 116만여 표의 큰 차였다.

선거 후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고, 이에 신민당 당원들이 안국동 로터리에 집결해 부정선거규탄대회를 열기로 결의했으나 경찰 제지로 대회 자체가 열리지 못했다.

윤보선과 민주투쟁

강산도 10년이면 변한다는 말이 있고,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도 있다. 1960년 내각책임제하의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윤보선은 그 후 실권 있는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 위해 거듭 도전했지만 이 또한 1967년 6대 대선을 끝으로 대통령 자리와 인연이 끝났다.

이후 단일지도체제를 채택한 유진오 총재하의 신민당에 당 고문으로 남지만 공화당이 들고 나온 ‘3선 개헌안’이 변칙통과되면서 1970년 1월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에 유진산이 선출되자 그는 당 잔류를 갈등하기 시작한다. 당수가 된 유진산은 전해 말 김영삼이 대통령 후보지명전에 나서겠다며 제창한 ‘40대 기수론’에 대해 “구상유취(口尙乳臭)”라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입에서 아직 젖 냄새가 난다”는 뜻이다. 그러나 김대중, 이철승(李哲承)이 합류하면서 40대 기수론이 하나의 대세로 굳어가자 윤보선은 신민당을 탈당한다. 명분은 빛 바랜 선명야당에서 함께 일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자신이 제명시킨 유진산이 당수가 된 신민당에서 40대 대통령 후보까지 나온다면 자신의 입지가 없다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1971년 1월 6일, 그는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국민당을 창당한다. 다시 한 번 대통령에 도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세태는 기성 정치인보다 젊고 참신한 후보를 원하는 식으로 변해 있었다. 특히 40대 김대중이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에 지명돼 전국적인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예감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직접 나서지는 않고 의사 출신의 박기출(朴己出)을 대통령 후보로 내보냈는데 결과는 4만4000표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재기 가망은 보이지 않았다. 유신이 선포된 후 윤보선의 국민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이 강제해산됐기 때문이다. 이후 윤보선은 민주화운동에 동참한다.

1973년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한 것을 시발로 1974년에는 민청학련사건에 관계했으며, 1976년에는 재야지도자들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명동사건)’에 참여했고, 1979년에는 YWCA 위장결혼사건에도 관계했다. 이 시기 그의 줄기찬 민주화 투쟁에 대해서는 충분히 평가해야 한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대통령을 지낸 신분으로 동참한 것만 해도 당시의 민주세력에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5공에 들어오면서 입장이 바뀌었다. 그는 국정자문회의 위원으로 대통령 전두환(全斗煥)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1987년 대선에서는 여당 후보 노태우(盧泰愚)를 지지하기도 했다. 3공과 배치된 이 같은 행위에 대해 그가 맞선 것은 체제가 아니라 어떤 특정인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고, 명사정치의 한계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체통을 중시한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3공은 그를 대접해주지 않았고, 5공은 대접해주었다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접근할 수도 있다. 흔히 “좌다 우다, 진보다 보수다” 하고 떠들어대지만 실제론 정권 쪽에 줄을 서면 보수 아니면 진보로 분류되는 것이 더 실상에 가깝다는 식의 시각에서 말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정상의 자리까지 올랐으며, 내려와서는 ‘선명야당’과 ‘극한투쟁’의 유산을 남긴 그는 노환으로 1990년 안국동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누린 해는 만 93년이다. 사별한 첫 부인(여흥 민씨)과 사이에 두 딸, 두 번째 부인(공덕귀)과 사이에 두 아들을 남겼다. 가족장을 지낸 그의 유해는 현재 충남 아산의 선영에 안장돼 있다.◎⃝

201006호 (201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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