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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포엠] 묵독 

 

이기리

▎꿀벌을 닮은 호리꽃등에가 개망초 꽃에 앉아 꿀을 빨고 있다. / 사진:박종근 비주얼실장
말없이 꿀물을 타는 손
흰 커튼이 바람에 휘날리면
부엌에 찾아오는 고요

식탁에 널브러진 그릇들 치우지 않고
턱을 괴고 그을린 벽지를 바라보다가
손으로도 액자로도
마음으로도 꿈으로도
가려보다가

오래전에 결혼해 지금껏 잘 살아왔으니
고통보다는 축복에 가깝다며
아플 땐 이만한 게 없다며

그 앞에 조심히 내려놓는 것
한 모금만 마시고 잠이 들어도 좋을

봄을 지나 여름으로
이야기를 지나 막다른 바다로

흐릿한 풀잎 위에서 나란히 달리기
연인들의 돗자리는 투명한 연못을 다 가릴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긴 휴일을 펼쳤고

개망초 위에 앉았다 가는 호리꽃등에
무늬만 남은 말을 등에 새긴다

202407호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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