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여고 자리에 화신 창고가 있었어요. 심지어 은행에서는 그곳에 방을 붙여보자고 했어요. 창고 물건을 사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보자고. 담보 가치가 안 된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박 회장이 노려보면서 버티는데, 내 물건 가치는 내가 안다 그겁니다. 장사도 해보지 않은 은행이 뭘 아느냐 그거요.
결국 대부를 받아내요. 그때가 소화 9년(1934년) 10월 15일입니다. 동경신문과 오사카신문이 ‘조선의 괴걸(怪傑) 박흥식이 1000개 연쇄점으로 상업조선 건설에 시동을 걸었다’고 대서특필했어요. 그런 걸 보면 박 회장이 돈 좀 쓰고 정계로 진출했으면 굉장한 거물이 됐을 거예요. 근데 돈을 안 써, 전혀 안 써요. 지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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