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 코흘리개 꼬마와 검은색 교복을 입은 한 무리의 중·고등학생이 줄지어 서 있다. 줄의 앞쪽에 서 있는 꼬마는 웃음을 감출 줄 모르고 중간에 있는 중학생은 흥분한 듯 손에서 끈적끈적한 땀이 흐른다. 줄의 뒤쪽에 있는 고등학생의 눈에서는 조마조마한 마음도 읽힌다.
몇 안 되지만 줄 사이사이엔 중년 남성의 얼굴도 보이고, 지긋한 나이의 어르신도 흐뭇한 얼굴로 서 있다. 같은 줄에 있다는 것 외에 이들의 공통점은 또 있다. 모두 번호표와 공책처럼 생긴 것을 조심스레 들고 있다. 유명 배우의 사인회라도 열린 것일까. 아니다. 이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우표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소중한 우표를 보관할 앨범과 우표를 살 차례가 적힌 표다. 새로운 우표가 발행되면 우체국 앞에는 우표를 사려는 사람들로 항상 긴 줄이 생겼다. 우체국뿐만 아니었다. 백화점 안에 우표상이 있었을 정도로 우표의 인기가 대단했다. 2009년 1월. 서울 중구 회현동 지하상가.
우표상 분위기는 혼잡한 남대문시장 분위기와 달랐다. 주인 혼자 우표를 정리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이곳에는 17개 정도의 우표상이 있다. 정확한 수를 알 수 없는 이유는 대부분 우표상이 우표와 화폐를 함께 취급하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표수집 외면
우표와 화폐 모두 한국조폐공사에서 만들고, 외국에서도 우표와 화폐를 같은 것으로 여긴다. 둘은 ‘유사품목’인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다. 많은 우표상이 우표만 취급해서는 가게를 꾸리기 어렵다고 했다. 화폐를 주 상품으로 다룬다는 우표상도 있었다.
화폐 수집 역시 취미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2007년 신권이 발행되면서 새로운 수집 문화가 생겼다. 단순한 취미를 벗어나 투자 개념으로 화폐를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 인쇄된 화폐는 일련번호에 따라 가치가 수천 배 오르기도 했다. 일련번호가 ‘AA’로 시작하는 한 만원권 지폐는 4000만원에 거래됐다고 한다.
미사용 화폐나 번호가 빠른 화폐는 예전에도 가치가 높았지만, 수천 배까지 가격이 폭등한 경우는 드물었다. 주식, 펀드 투자 열풍이 화폐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열풍은 오래가지 않았다. 최근 금융위기로 주식, 펀드 가격이 폭락하자 화폐 역시 가치가 하락했다. 화폐는 우표보다 액면가가 높고, 거래되는 종류가 적다.
우표 수집가들은 화폐에 투자해 수익을 내기 어렵다며 재테크 수단으로 무용지물은 아니지만 취미로 모으는 게 아니라면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 대기업 회장의 친형은 한국의 독보적인 우표 수집가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그는 ‘우표의 무덤’으로 불릴 정도로 우표를 사 모았다.
투자가치를 일찍부터 깨달은 것이다. 나라로 보면 세계적인 우표의 무덤은 영국 왕실이라 할 수 있다. 영국 왕실은 세계 각국의 우표를 닥치는 대로 사 모은다. 지금도 유럽에서는 우표 수집이 상류층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또 우표 수집상에 도둑이 든 일이 큰 뉴스가 되기도 한다.
한국에서 우표 수집은 점점 나이 많은 사람이 하는 고리타분한 일이 되고 있다. 실제 우표 수집가 중 일부가 오래된 우표의 발행연도와 같은 시기에 태어났을 정도로 우표 수집가의 연령대가 높다. 젊은 우표 수집상은 찾기 어려워졌고 회현동 지하상가 우표상에는 소수의 나이 든 사람만 드나들게 됐다.
인터넷이 대중화하면서 한때 500만 명에 달한 우표 수집 인구가 큰 폭으로 줄었다. 우표 수집은 우표를 직접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며 일상에서 자주 접하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인터넷이 우표를 접할 기회를 사라지게 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우표를 찾는 사람의 발걸음을 끊어지게 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사태다.
우표 수집을 일종의 사치라 여기게 된 것. 이때 우표 발행량은 외환위기 전보다 절반 이상 줄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표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급격히 낮아졌다.
외환위기 이후 찾는 사람 뜸해
우리나라에 우표가 발행되기 시작한 것은 1884년이다. 한국 우편의 아버지로 불리는 홍영식은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와서 우편 제도의 편리함과 우표 발행이 국가 재정에 득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극적으로 우편 제도 시행을 주장한 홍영식을 비롯한 개화파의 노력으로 1884년 우정총국이 설치됐다.
우표는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우표가 근대의 신호탄이 된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아시아 국가들은 우표 발행 100주년, 120주년 기념행사를 앞다퉈 개최한다. 우리나라는 2004년에 우표 발행 120주년을 맞았지만 기념행사는 2002년 월드컵과 함께 치러졌다.
우표의 위상이 많이 축소된 탓이다. 회현동 우표상에서 만난 우표 수집가 장세영(60)씨는 “수집가들은 우표 수집 취미를 줄여 ‘우취’라 부르는데 우취가 언제 자리 잡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60년대 초 거의 모든 학생이 우표 수집을 했다”고 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취미로 할 만한 ‘거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 우표 수집은 즐거움 외에 고상함까지 주는 아이템이었단다. 우표는 문학이었고, 백과사전이었으며, 아름다운 예술품이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보다 우표에서 배운 것이 더 많다”고 말했다고 한다.
전쟁 중에도 웃돈 주고 우표 사
1949년 창립된 대한우표회는 전국적으로 지부를 넓혀갔고, 우표를 수집하는 사람은 몇 백만 명에 달했다. 우표 수집의 중심은 서울이었다. 희귀한 우표를 사고 싶은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그중 몇몇은 직접 우표상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아직도 우표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서울 중구 회현동 지하상가다.
수는 많이 줄었지만 우표 수집가는 여전히 우표 수집에 매력을 느낀다. 수집가의 특징은 집요함과 인내력이다. 우표 수집에 대한 집념은 1950년 한국전쟁 때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52년 발행된 유엔군 6·25 참전 기념우표는 전쟁 중에도 없어서 못 팔았다고 한다. 뒷거래로 웃돈을 주고 살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발행된 순서대로 우표를 모으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외국에서는 주제별 우표 수집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된 우표일수록 가치가 클 것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래된 우표라도 발행량이 많고, 역사적 의미가 없는 우표는 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화폐 중에서는 1962년 발행된 모자(母子)상 도안의 화폐가 가장 인기다. 화폐에 나온 모자의 실제 모델이 따로 있었음에도 대통령 부인과 아들을 모델로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이 화폐는 발행 직후 제3차 화폐 개혁을 시작한 탓에 24일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화폐 수집가들 사이에서 모자상 화폐는 1차 수집 목록이 됐고, 현재 가격은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한국 화폐 역사상 가장 단명했지만 47년이 지난 뒤 가치는 몇 백 배나 뛴 셈이다. 우표와 화폐에는 다사다난했던 한국의 근대사가 들어 있다. 5·16 군사혁명 기념우표는 혁명 한 달 만에 제작돼 혁명의 성공을 대외에 알리는 매개체가 됐다. 또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화폐에서는 대통령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사회의 변화를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다. 변한 것은 우체국 앞 풍경만이 아니다. 흥미로운 근대의 모습도 함께 잃어가고 있다. 우표, 화폐의 수집이 취미에서 투자로 탈바꿈한다 해도 그 속에 숨 쉬는 근대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는다. 회현동 지하상가 우표상의 추억은 그대로다.
요즘 어떤 게 뜨나? 이승만·박정희 우표 인기 상종가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은 대통령 우표도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에는 ‘우표를 발행하고 싶으면 한국을 방문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방한 기념우표가 발행됐다. 발행량도 다른 시절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희소성이 없어서인지 이 시기에 나온 우표들은 액면가보다 값을 더 못 받기도 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부터 취임 기념우표에만 대통령의 얼굴이 찍혔다. 최근에는 독도 우표가 수집가 사이에서 큰 인기다. 값이 10배 이상 뛰었다고 한다. 발행량도 적었을 뿐 아니라 발행 시기에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파문이 일어 화제가 됐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