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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고립 감수하며 국익 챙겨 

명과 여진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로 실리 추구…인조반정의 빌미로 이어져 

김준태



“우리가 중국을 섬겨온 지 200여년이 지났으니 형식적으로는 군신(君臣)의 관계지만, 오고 간 인정과 도리는 부모·자식 간과 같다. 더욱이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중략)… 그런데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황제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그리하여 기미년(1619년), 중국이 오랑캐를 정벌할 때 참전하였으나 장수로 하여금 사태를 관망하여 향배를 결정하라고 은밀히 지시하여 끝내 우리 군사 모두를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함으로써 천하에 추악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중략)… 예의의 나라인 우리를 오랑캐 금수(禽獸)의 나라로 전락시켰으니, 가슴 아픈 일을 어찌 다 이루말할 수 있겠는가.”(광해15.3.14)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면서 인목대비가 내린 교지이다.반정 세력은 광해군이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렸다는 것을 폐위의 주된 명분으로 삼았다. 1618년 윤 4월. 명나라 요동의 주요 지휘관들이 건주여진(建州女眞:후일의 청나라)을 정벌하겠다며 조선의 파병을 거듭 요청했다. 당시 신하들은 파병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중국은 부모의 나라로 멸망할 지경에 이른 조선을 다시 세워준 은혜가 있는데, 지금 외부로부터 수모를 당하여 우리에게 군사를 요청해 왔으니 당연히 달려가 응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광해10.윤4.24)

황제 칙서 조건으로 명분과 시간 얻어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조선의 상황이 파병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파병을 거절한 명분이 부족했기 때문에, 황

제의 칙서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명나라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요구가 없이 지방 정부의 요청만으로 파병하는 것은 절차나 관행상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광해10.윤4.24). 그러자 명의 장수들이 조선의 태도를 힐난하는 공문을 보내왔다. 광해군은 그래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우리나라는 평소 병(兵)과 농(農)을 분리하지 않았으므로(상비군이 없으므로) 하루아침에 병력을 모으기란 불가능하다.”

“조선의 병사들이 약하기 때문에 섣부르게 참전했다가는 오히려 명군에게 피해를 줄 것이다.”(광해10.5.1) “요구하는 인원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전 지역의 병력을 다 빼내 동원해야 한다. 그러면 그 빈틈을 노려 왜구나 여진이 공격해 올 수 있다.”(광해10.5.2) 등의 이유를 거론하며 파병이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황제의 칙서가 내려지면 파병하겠다”는 단서를 덧붙인다.

일단 시간을 벌고자 했던 것이다. 광해군은 조선의 역대 임금 중 누구보다도 군사적 경험이 많은 왕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기간 동안 분조(分朝:선조의 명나라 망명을 대비하여 만든 임시 조정)를 이끌면서 군정(軍政)을 지휘하고 전쟁을 직접 겪었다. 더욱이 평안도와 황해도 등지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북방의 정세에 대해서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이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도 광해군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여 그는 즉위하자마자 북방 경계 강화에 힘을 쏟았다.

“최근 북방에 관한 보고를 살펴보니, 우려할 만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광해1.1.18) “오랑캐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니 방비함에 있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할 것이다. 척후를 보내고, 봉수(烽燧:봉화)를 관리하며, 적들의 간첩에 대비하고, 우리의 간첩을 잘 운영하라. 군의 기강과 규율을 엄격히 해야 한다.”(광해1.10.16) 명나라의 건주여진 정벌 움직임이 벌어졌을 즈음에도 “상황을 상세하고 정확하게 알아야 대응하는 데 차질이 없을 것이다.

명이 정벌하는 일과 오랑캐의 정세 등에 관하여 저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게 탐문한 뒤 보고토록 하라”(광해10.윤4.19)며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통해 광해군은 명의 여진 정벌이 무리라고 보았고, 그러한 전쟁에 조선군을 참전시킬 수 없다고 결심한 것으로 생각된다. 더군다나 조선의 국력이나 군사력은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다.그러나 이러한 파병 회피 노력에도 명나라 황제의 파병요구 칙서가 조선에 도착했다(광해10.19.9). 칙서가 없으니 파병할 수 없다는 광해군의 논리는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광해군은 마지 못해 이듬해인 ‘기미년’ 2월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여명의 조선군을 중국에 파병한다. 하지만 명·조선 연합군은이내 대패해 조선군 상당수가 전사했으며, 강홍립은 남은 조선군을 이끌고 여진에 항복했다(광해11.3.12). 강홍립의 항복이 여진과 싸우기를 꺼려한 광해군이 사전에 밀지를 내려 지시한 것이라는 기록들이 많지만, 많은 조선군이 전사한 것으로 봤을 때 항복을 직접적으로 지시했다기보다는(사전에 항복 명령을 내렸다면 조선군의 피해가 크기 전에 항복했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 여진과의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대처하도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명분·이상론 고집하는 신하들에게 염증 그런데 이후에도 명나라의 파병 요청은 계속됐다. 신하들도 항복한강홍립을 강하게 비난하며 여진을 응징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여진으로부터의 보복 공격 대처방안에 고심하고 있던 광해군은 현실 물정을 모르고 명분과 이상론만 주장하는 신하들에게 염증을 느꼈던 것 같다.

“뜻은 좋다. 경들은 적을 어떻게 보는가? 우리나라의 병력을 가지고 과연 막아낼 수 있다고 여기는가?” “적의 용병(用兵)하는 지혜와 계략이 실로 당해내기 어려우니 앞으로 어떤 환란이 닥칠지 예측할수가 없다. 나라를 위해서는 상하가 합심하여 오로지 부국강병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데, 이는 생각하지 않고 강홍립의 처자를 벌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내 속으로 헛웃음이 나온다.”(광해11.4.8)그러면서 광해군은 향후 외교의 방향을 천명했다.

“대국(명나라)을 섬기기를 더욱 정성껏 함과 동시에 한창 기세가 왕성한 적을 잘 다독여야 한다.” “지금 적이 매우 사납게 날뛰지마는 진실로 솜씨 있게 대응한다면 전조(고려)처럼 충분히 재앙을 막고 국가를 지켜 전쟁의 재난을 입지 않을 것이다.”(광해11.4.9) 금나라와 송나라, 요나라와 송나라 사이에서 실리적인 등거리 외교를 펼쳤던 고려의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에 따라 광해군은 명나라의 2차 파병요청을 거절하고, 여진과의 적대관계 해소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자 ‘대명 사대외교’와 ‘오랑캐배척’을 절대적 가치로 여겼던 신하들이 강하게 반발한다. 광해군이 아무리 재촉해도 여진과 관련된 업무는 태업으로 일관하는 등 그의 외교 정책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것을 가지고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명분으로 삼는다.

광해군도 이러한 현실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 ‘명나라의 은혜를 갚자’는 표어들이 불변의 도그마로 받아 들여지던 시대에서, 명과 여진에 대한 등거리 외교는 조선의 사대부전부를 등 돌리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명의 요구를 전부 들어주고 여진과 대결구도로 가기에는 여건이 따라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것은 조선을 전쟁의 참화로 밀어 넣을 수 있는 위험한 길이었다. 하여 광해군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왕으로서 결단을 내린

것이다.

1152호 (2012.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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