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산·학·연의 결정체 ‘실리콘 색스니(실리콘밸리+작센주 영어명)’ 

유럽의 실리콘밸리 가다-독일 드레스덴 

백승아 월간중앙 기자
막스플랑크·프라운호퍼 등 세계적 연구기관 포진 … 기초·응용과학 고른 연구가 경쟁력 열쇠



5월 23일 오전에 찾은 독일 남동부 드레스덴의 ‘나노센터(Nano Center)’. 이른 시간이었지만 자유로운 차림에 배낭을 매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드레스덴 공항에서 5분 거리인 이곳은 도심 북쪽에 있다.

나노센터는 마이크로 전자·나노 기술을 응용해 제품을 개발·생산하는 벤처기업에 사무실과 편의시설을 제공하는 일종의 ‘창업 인큐베이터’다. 현재 20개 기업이 입주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중에 동양 인도 눈에 띈다. 언뜻 보기에도 국적과 인종이 다양해 보인다.

지난해부터 나노센터에서 일하는 한태영 이사도 그중 한 명이다. 지난해 6월 나노다이아몬드를 활용한 의료기기 개발업체 ‘누가랩(Nuga-Lab)’을 창업한 그는 현재 8명의 동료와 제품 연구에 한창이다.

한국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독일 유학길에 오른 그는 드레스덴 공과대학에서 전자공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 이후 2009년부터 독일 최대 응용과학기술연구소인 프라운호퍼 비파괴평가연구소(IZFP)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이 경험을 기반으로 지난해 창업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연구원이라고 소개한다. 명함도 두 개를 가지고 다닌다. 누가랩에 소속된 직원이기 전에 비파괴평가연구소 연구원이란 신분을 자랑스레 내세운다. 그의 동업자인 유겐 슈라이버 대표도 마찬가지다. 누가랩의 일원이 되기 직전까지 비파괴평가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한 그는 은퇴한 지금도 CEO이기 이전에 연구원으로서 비파괴평가연구소와 협력한다.


공공연구기관 부소장 출신이 이제 막 걸음을 뗀 벤처기업에서 일하고, 민간 기업의 직원이 공공연구기관에 동시에 속한 구조가 기자에겐 다소 낯설어 보인다. 하지만 드레스덴에서는 익숙한 광경이다. 이곳에서는 연구소와 기업 간의 협력은 물론 연구원의 분야별 이동까지 자유롭다.

328.31㎢(993만평) 규모로 대전 면적의 3분의 2 정도인 드레스덴에는 공공연구기관·기업·교육기관이 전략적으로 모여있다. 미나폴리스(MiNaPolis)라 불리는 북쪽 지역에는 나노센터와 응용과학기술을 연구하는 프라운호퍼연구소가 들어섰다.

매트폴리스(MatPolis)라 불리는 동쪽 지역에는 신소재 분야의 연구소와 기업이, 남쪽 지역에는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막스플랑크연구소와 재학생 3만5000명 규모의 독일 최대 기술대학 드레스덴 공과대가 있다. 프라운호퍼연구소·막스플랑크연구소 등 드레스덴에 들어선 공공연구기관은 모두 19곳이다. 지멘스·인피니온 등 도시 곳곳에 자리한 기업도 1200개에 달한다.

“대기업보다 연구원 신분 자랑스럽다”

나노센터가 있는 북쪽에는 두 곳의 프라운호퍼연구소가 있다. 나노센터를 중심으로 비파괴연구소와 광학마이크로시스템연구소(IPMS)가 차례로 들어서 연구단지를 이뤘다. 각 건물은 복도를 따라 하나로 연결된다. 드레스덴 시내 11곳에 퍼진 프라운호퍼연구소는 응용과학기술을 연구하는 세계적인 연구기관이다. 작센주와 드레스덴시로부터 연구비의 3분의 1을 지원 받는다. 나머지 비용은 일종의 계약연구를 통해 기업에서 후원 받는다.

나노센터에 입주한 기업은 물론 드레스덴에 들어선 인피니온·지멘스 등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이 모두 이들의 연구 파트너다. 프라운호퍼가 해마다 기업과 협력해 벌어들이는 수익은 3억5000만 유로(4990억원)에 이른다. 기업들과 탄탄한 파트너십 없이는 벌기 어려운 금액이다. 슈라이버 누가랩 대표는 “프라운호퍼의 경쟁력은 학문을 위한 연구에서 그치지 않고 이를 비즈니스로 연결시키려는 철학에서 비롯된다”며 “기업과 효율적인 업무 파트너십을 맺어 능동적으로 연구에 참여하고, 아이디어를 창출한다”고 말했다.

도심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자리한 막스플랑크연구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물리·화학 등 순수과학 분야의 연구가 중심인 이곳에는 실험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5월 24일 오전 찾은 막스플랑크 복잡계물리연구소에서는 마침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곳에서는 해외 석학과 연구원이 모이는 학술대회와 세미나가 자주 열린다.

라이 도 복잡계물리연구소 연구원은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는 인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연구에 임한다”며 “해외 석학을 초빙해 지식 교류의 장을 열고, 미래의 연구 비전을 공유하는 것도 이곳의 큰 과제 중 하나”라고 말했다.

해외 네 곳을 포함해 80개 연구소를 둔 막스플랑크연구소는 작센주와 드레스덴시로부터 연구비 100%를 지원받는 공공연구기관이다. 드레스덴에는 복잡계물리소를 포함해, 화학과 생명과학 등 3곳의 연구소가 있다. 1992년 설립된 복잡계물리소는 물리학 연구의 산실이다. 연구원 170명 중 절반이 해외 출신이다.

이곳의 연구원들은 인류의 미래를 위한 기초과학 연구에 몰두한다. 프라운호퍼와 비교하면 기업과 직접 교류는 적은 편이다. 대신 연구원 간 협업이 활발하다. 가령 복잡계물리소 소속 연구원이 화학연구소와 함께 팀을 이뤄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식이다.




드레스덴 연 평균 경제성장률 6.8% 유지

라이 도 연구원은 “최근 들어 이런 양상은 더욱 강화되는 추세”라고 전했다. 다른 연구소와의 교류도 활발하다. 막스플랑크 복잡계물리소에서 일한 외르크 오피즈 연구원은 2007년 프라운호퍼 비파괴평가연구소(IFZP)로 자리를 옮겼다. 외르크 연구원은 “기초과학이든 응용과학이든 분야별 벽이 없는 게 드레스덴의 경쟁력”이라면서 “유연한 연구환경이 좋은 연구성과를 낼 수 있는 기반”이라고 설명했다.

연구환경도 자랑거리다. 라이 도 연구원은 막스플랑크연구소가 세계 최고 연구소로 자리매김한 건 창조적인 연구환경 덕이라고 말한다. 실제 이곳의 연구원들은 논문 등 양적·외형적 실적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거나 여러 분야가 접목된 연구를 수행할 경우 몇 년이 걸리든 지원 받을 수 있다. 연구원이 오로지 연구에 매달릴 수 있는 창조적인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물론 무턱대고 방치하진 않는다. 오히려 평가 절차가 더 까다롭다. 해당 기관과 연구를 수행하지 않은 석학 연구자들이 평가위원회를 꾸려 연구원들의 연구 과정과 성과를 해마다 평가한다. 연구소장 선임 절차도 마찬가지다. 심사 대상 인물 중심으로 평가위원회를 별도로 만들고 전문가와 일반인이 공개 검증할 수 있는 공청회를 연다.

과학도시 드레스덴의 경쟁력은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고른 연구에서 나온다. 막스플랑크연구소를 중심으로 기초과학 연구가 활성화하자 해외 곳곳에서 연구원이 몰렸다. 이들의 이주로 지역 살림살이가 나아졌다. 무엇보다 과학기술이 비즈니스 창출로 이어지자 도시의 경제력이 탄탄해졌다. 드레스덴시의 연구 인력은 1만5000명이다. 연구 인력을 포함한 교수·과학자 등 전문인력 비율은 전체 인구(50만명)의 20%에 이른다. 그 결과 드레스덴은 정보기술(IT) 부문 유럽 1위, 기계부품과 나노 재료 부문 독일 1위의 강자로 올라섰다.

드레스덴이 과학도시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드레스덴은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 여파와 통독 후 경제위기 등으로 장기 침체에 빠졌다. 하지만 1992년 막스플랑크 복잡계연구소가 설립되고, 연구기관이 하나 둘 자리잡자 도시 분위기가 역동적으로 변했다.

2000년 이후 드레스덴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6.8%에 달한다. 2001년 이후 인구 1인당 구매력도 연평균 7% 이상으로 증가했다. 그 덕에 드레스덴은 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뜻에서 ‘실리콘 색스니(Silicon Saxony: 실리콘 밸리와 작센주의 영어명 색스니의 합성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 과정에서 드레스덴시와 작센주, 연방정부의 역할이 컸다. 디르크 힐버트 경제부시장은 “연방정부와 작센주, 드레스덴시 정부가 협력해 기업의 투자를 지원했다”고 말했다. 이곳에 투자하려는 회사들이 2~3주 안에 관련 절차를 마칠 수 있도록 돕고, 작센주 정부는 기업과 연구기관의 설립을 위한 자금을 지원했다. 작센주 정부는 1991년 이후 23억 유로(약 3조4000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세제 혜택으로 기업 투자를 유인했다.


외국인 연구인재 제발로 찾아와

그 결과 1994년 지멘스가 테크노파크를 조성하며 이곳에 반도체 생산·연구시설을 세웠다. 이어 인피니온·모토롤라·AMD 등 첨단 반도체 회사가 차례로 들어섰다.

드레스덴에는 1200개가 넘는 첨단 과학기술 기업이 있다. 드레스덴시는 과학 분야 인재 양성에도 힘을 쏟는다. 청소년 과학체험 프로그램인 ‘주니어 닥터’가 대표적이다.

2006년 드레스덴이 독일과학진흥기부자협회가 선정한 과학 도시로 뽑히며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과학 꿈나무 양성을 위해 마련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드레스덴 공과대학을 비롯해 카를구스타프대 병원 등 25개 이공계 대학과 연구소에서 매년 과학자 30명이 참여한다. 공교육 과정에 과학교육의 비중을 늘린 것은 물론이다. 드레스덴의 학생들은 학교 수업에서 나노공학을 비롯한 전문 분야의 지식을 어려서부터 습득한다.

드레스덴 공과대학도 몇 년 사이 독일에서 알아주는 공과대학으로 급성장했다. 여기엔 공공연구기관과 활발한 연구 협력이 큰 역할을 했다. 드레스덴 공대 박사 과정 학생들은 라이프니치연구소·막스플랑크연구소 등에 고용돼 연구를 수행한다. 학부생은 다양한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2009년부터 라이프니치 연구소에서 재료공학 분야를 연구하는 유학생 김진영씨는 “드레스덴 공대에는 연구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가 있다”며 “연구원이 드레스덴 공대에 교수로 속한 경우도 많은데 이 역시 학생들의 연구 참여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디르크 힐버트 경제부시장은 “드레스덴 공대생들은 졸업 전부터 연구소와 관계를 맺고 연구 활동을 이어간다”며 “졸업 후에는 그 분야에 자연스럽게 흡수된다”고 말했다.

드레스덴 공대의 디플롬(Diplom) 학제도 드레스덴의 경쟁력을 높이는 요인 중 하나다. 대부분의 독일 대학이 미국식 학제시스템을 도입한 것과 달리 드레스덴 공대는 학사와 석사과정이 통합된 옛 독일 대학의 방식을 고수한다. 캠퍼스에서 만난 도시공학 전공생 요헨은 “베를린 출신이지만 좀 더 깊이 공부할 수 있는 이곳의 학제 시스템이 좋아 드레스덴 공대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공공연구기관·기업·교육기관 간 선순환 구조가 정착되자 해외연구원은 물론 유학생이 줄을 이었다. 현재 드레스덴에 거주하는 외국인 비율은 4.5%다. 국적은 100여 개국으로 다양하다. 옛 서독 도시에 비하면 적은 비율이다. 그러나 다른 도시에 단순 이민자가 많은 것과 달리 이곳에는 연구원·과학자 등 전문 인력의 비율이 높다.

드레스덴시는 외국인 연구원을 위한 정주 여건 조성에 더욱 힘을 쏟을 계획이다. 디르크 힐버트 경제부시장은 “연구기관과 기업, 학교마다 ‘웰컴오피스’를 세워 거주·교육 등 문제를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원스톱 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이라면서 “산업·연구기관·대학의 조화가 일궈낸 과학도시의 국제화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막스플랑크연구소: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를 기려 1948년 설립한 기초과학연구소로 독일 전역에 76개, 해외에 4개(미국·이탈리아·네덜란드·브라질) 총 80개가 있다. 분야별로 ‘화학물리학기술분과’ ‘생물학의학분과’ ‘인문사회과학분과’에 소속되며 최상위 기구인 막스플랑크연구협회의 지휘를 받는다. 32명의 노벨과학수상자를 배출했다.

프라운호퍼연구소: 독일의 막스플랑크와 함께 독일 과학기술 개발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연구소로 주로 응용기술을 연구한다. 18세기 독일의 유명한 물리학자 요제프 폰 프라운호퍼를 기려 만들었다. 독일 전역 56곳이 컨소시엄 형태로 운영된다. 1만3000여명의 직원이 독일 전역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디플롬(Diplom): 독일 대학의 기본 학제로 학·석사 통합과정이다. 디플롬(Diplom) 과정의 수학 연도는 연방 주마다 다르며, 최소 8학기 이상으로 구성된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1196호 (2013.07.15)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