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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실리콘밸리, 그 길을 묻다 

유럽의 간판 과학비즈니스벨트를 가다 

독일·프랑스·덴마크·스웨덴 20세기 초부터 조성 한국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기획단은 2년째 난항

▎스웨덴 스코네 지방에 펼쳐진 메디콘밸리 전경. 이곳에는 각종 연구기관과 벤처기업이 몰려있다.



정부와 대전시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의 핵심 시설인 기초과학연구원(IBS) 부지 선정에 7월 3일 합의했다. 기획단 출범 2년 만이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추진하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조성 사업은 새 정부의 창조경제 비전과 맞물려 신성장동력 사업으로 각광 받았다.

그러나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갈등, 기반시설 부족 등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며 난항을 거듭했다. 유럽에서는 20세기 초부터 과학비즈니스벨트를 구축해 기초과학은 물론 산업 발전에 큰 보탬이 됐다. 반세기 넘게 기술 연구 → 사업화 → 재투자에 이르는 선순환 구조를 확립한 독일·프랑스·덴마크·스웨덴의 과학벨트 모델에서 ‘한국판 실리콘밸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아 봤다.


#1. 매그너스 오렐 대표가 영상의학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익시니(EXINI)’를 세운 건 1999년이었다. 그러나 회사를 설립한 지 12년째 되도록 한 푼도 벌지 못했다. 프로그램 개발에서 상용화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러나 첫 수익을 낸 2011년까지 이 회사는 망하지 않았다. 덴마크·스웨덴 생명과학비즈니스벨트인 메디콘밸리에서 창업한 덕분이다.

메디콘밸리 운영을 맡은 메디콘밸리 얼라이언스(MVA)는 이 지역에서 성공한 글로벌 제약회사와 의료기술 관련 업체가 낸 연회비로 10년간 지지부진한 벤처기업 익시니를 꾸준히 지원했다. MVA는 동시에 익시니의 기술이 필요한 해외 파트너를 물색했다.

그 결과 이 회사는 지난해 일본 후지필름과 프로그램 공급 계약을 했다. 이를 계기로 1년에 2000유로(약 300만원)에 불과하던 매출이 10배 이상으로 늘었다. 창업보육센터에서 ‘만년 열등생’이던 익시니는 회사 창립 14주년을 맞은 올해 5월, 안정화 단계에 접어든 중소기업이 입주하는 비즈니스센터로 사무실을 옮겼다.

#2. 독일 드레스덴 공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유학 길에 오른 독일인 외르크 오피즈. 연구원을 꿈꾼 그는 영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고향인 드레스덴으로 돌아왔다. 물리학을 비롯한 순수과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막스플랑크 복잡계물리연구소(MPK-PKS)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주변에 있는 또 다른 연구소 프라운호퍼 비파괴평가연구소(IZFP)와 공동연구 기회를 얻었다. 과학기술이 학문에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인 비즈니스로 이어지는 응용과학 분야 연구에 매력을 느낀 그는 1년 후 IZFP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산·학·연 연계는 물론 연구소 간 교류가 이렇게 활발한 과학클러스터는 없을 것”이라며 “젊은 인재에게 드레스덴은 ‘기회의 천국’과 같다”고 말했다.

덴마크와 독일의 과학비즈니스벨트에서 만난 기업인과 연구원의 모습이다. 생명과학과 순수·응용과학 분야에서 각각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곳이다. 과학비즈니스벨트가 벤처기업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고, 연구소와 기업 간 협력으로 해마다 발전을 거듭한다. 이런 모범 사례 때문일까.

미래창조과학부가 추진하는 국제과학비지니스벨트도 ‘창조경제의 전진기지’ ‘창업 인큐베이터’라는 수식어가 붙였다. 기존 대학과 정보 출연연구소에선 불가능한 대규모 기초과학 연구로 기술을 사업화하는 게 과학비즈니스벨트의 목적이다.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은 5월 서울에서 열린 ‘과학비즈니스벨트 포럼’에서 “기초과학연구원·벤처기업 클러스터를 조성해 기초과학 성과를 사업화하는 창조적 생태계를 구축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직은 말만 무성하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기획단이 출범한 지 2년이 지났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의 근간인 기초과학연구원(IBS)부터 셋방살이 신세다. 올해 공사를 시작해 늦어도 2016년에는 입주할 계획이었지만 예산 문제로 이마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김정홍 산업연구원 지역발전연구위원은 “과학비즈니스벨트 조성이 경제적 효과로 이어지려면 기반 시설부터 갖춰야 하는데 초기 사업 진행부터 지지부진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미래창조과학부와 대전시가 논란인 IBS 위치를 대전 엑스포과학공원으로 정하고, 정부가 2500억원을 지원하기로 7월 3일 합의했다. 이로써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구축 사업이 다시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정부는 IBS와 인근의 KAIST, 정부 출연연구기관, 기업 연구소 등과 연계해 대덕연구개발특구를 창조경제 클러스터로 키울 계획이다.

부지 입지와 비용 문제는 일단락됐지만 국내 실정에 적합한 과학비즈니스벨트 모델 마련도 시급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해마다 논문 수나 특허건수를 따지만 국내 과학기술은 선진국에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며 “다른 나라 과학비즈니스벨트의 하드웨어만 보고 따라 할 게 아니라 우리의 과학적 토대와 실정에 맞는 소프트웨어를 갖추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나라마다 비즈니스 환경이 다르듯 과학비즈니스벨트의 형성 과정과 운영 방식도 다르다. 생명과학 연구에 특화된 덴마크·스웨덴 메디콘밸리는 글로벌 제약회사를 중심으로 벤처기업 창업이 여느 곳보다 활발하다. 프랑스 소피아 앙티폴리스는 여러 지방 자치단체가 협력해 중앙정부의 간섭 없이 독립적으로 운영한다.

독일 드레스덴은 노벨상 32명을 배출한 막스플랑크 연구소와 지방 대학이 중심이 돼 해외 인재를 끌어들인다. 유럽의 대표 과학비즈니스벨트는 저마다 특색을 내세워 발전을 거듭한다.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한국의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가 ‘유럽판 실리콘밸리’에서 배울 점이다.

1196호 (201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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