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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개 지자체 ‘코페티시옹(경쟁+협력)’이 만든 역작 

유럽의 실리콘밸리 가다-프랑스 소피아 앙티폴리스 

글·사진 허정연 이코노미스트 기자
유럽 첫 과학비즈니스벨트 … 뛰어난 자연환경과 주거 여건으로 70개국 인재 모여




프랑스 파리 오를리 공항에서 출발하는 니스 행 비행기에 올랐다. 휴양지로 유명한 니스라 휴가를 즐기러 가는 사람이 대부분일 거라 생각했지만 탑승객들의 짐은 생각보다 단출했다. 여행객보다는 오히려 노트북 가방을 손에 든 신사들이 탑승객의 절반을 차지했다. 미셸 라바론도 그중 한 사람이다. 프랑스 최대 통신회사인 프랑스텔레콤에서 일하는 그는 3년 전 니스 근교의 과학비즈니스벨트인 소피아 앙티폴리스의 연구소로 옮겼다. 입사 후 5년 넘게 파리 본사에서 일했지만 지방 발령을 자청했다.

그는 “(소피아 앙티폴리스는) 파리보다 근무 환경이 좋고, 자녀교육 시설도 잘 돼 있어 본사에서 오고 싶어하는 직원이 많다”며 “비행기로 1시간 반이면 파리에 닿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근무지를 옮긴 후에도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한 달에 두 세 번 파리를 오가지만 여전히 “본사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니스 코트다쥐르 공항에 도착하자 따뜻한 기운이 온 몸을 감쌌다. 프랑스어로 ‘푸른 해안가’라는 뜻의 이 지역은 프랑스 남동부 지중해 연안에 있어 1년 내내 따뜻한 날씨를 자랑한다. 세계적인 휴양지 니스와 영화제로 유명한 칸이 프로방스 알프코트다쥐르 지역(레지옹)의 대표적 명소다.

유럽 최초의 과학비즈니스벨트인 소피아 앙티폴리스가 니스와 칸 사이에 있다. 니스 공항에서 쪽빛 바다를 따라 이어진 A8번 도로를 20분 남짓 달리면 소피아앙티폴리스에 도착한다. 다른 나라의 과학단지가 대부분 특정 도시나 산업 기반을 중심으로 돌아서는 것과 달리 이곳은 5개 지역에 걸쳐 펼쳐져 있다.

초입에 ‘소피아 앙티폴리스’라고 쓰인 작은 간판을 보지 않았더라면 국립공원 입구라고 해도 믿을 만큼 울창한 숲이 한동안 이어졌다. 숲 속 사이사이로 낮은 건물이 숨은 듯 자리했다. 과학단지 조성 당시부터 환경보호를 위해 전체 2314만㎡(약 700만평) 대지의 65%를 그린벨트로 지정해 공원을 비롯한 녹지공간으로 쓰고, 건물 높이도 3층 이상 지을 수 없게 했다. 무심코 있다간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숲 속 꿈의 과학연구단지

소박한 규모와 달리 IBM·인텔·에어프랑스·지멘스·컴팩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숲 속 건물에 들어서 있다. 소피아 앙티폴리스에는 현재 148개 글로벌 기업을 비롯해 1400여 기업과 연구소가 있다. 직원 수만 3만1000여명에 이른다. 프랑스 국립정보기술자동화연구소(INRIA), 유럽 통신표준연구소(ETSI), 독일 만네스만의 차세대 자동차연구소, 샤넬 향수연구소 등 70여 개의 연구소도 눈에 띄었다.

소피아 앙티폴리스 운영을 맡은 소피아 앙티폴리스 재단의 콜린 루엘 홍보담당자는 “입주기업 중 71%가 정보기술(IT) 업종이며 단지 내 전체 직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정보통신 업체에서 일한다”며 “4000여명의 연구원과 5000여명의 학생이 산·학·연 삼각편대를 이뤄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한다”고 설명했다.

단지 내 5개의 골프장과 테니스코트·수영장 시설은 모두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 점심시간이면 이용객들로 북적인다. 차로 15분이면 닿는 니스 해변가에서 일광욕을 즐기다 오는 사람들도 있다. 직장 근무부터 주거와 여가생활은 물론 자녀 교육까지 모든 걸 단지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

이곳에는 3500여 세대, 6000여 명이 거주한다. 이 가운데 70%는 외부에서 들어온 직원과 연구원이다. 2개의 외국인 학교에는 1000여명의 학생이 다닌다. 예전처럼 전폭적인 세제 혜택은 없어졌다. 그러나 이미 잘 갖춘 기반 시설과 뛰어난 자연환경 덕에 70여개국 인재가 몰린다.

소피아 앙티폴리스는 1960년 프랑스 명문대학 중 하나인 파리광산대학(ENSMP)의 피에르 라피트 교수(현 상원의원)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그는 르 몽드지 칼럼에서 프로방스 알프 코트다쥐르 지역에 ‘과학·기술·지혜가 어우러진 미래 도시’를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라피트 의원은 “50년 전 이곳에 과학비즈니스벨트를 설립한다는 건 혁명적인 일이었다”며 “당시 이곳은 과학기관은커녕 제대로 된 기업 하나 없는 황무지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창조적인 활동을 해야 기술적인 혁신이 가능하다고 여겼다”고 설립 계기를 밝혔다. 그러나 설립 초기 별다른 정부지원이 없어 개인적으로 은행 대출을 받아 이 일대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정부와 대학 등을 쫓아다니며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 소피아 앙티폴리스 운영조합(SYMISA)이 구성돼 공적자금을 지원 받았다. 코뮌(프랑스 최소 행정구역) 5개(발본·앙티브·비오·무쟁·발로리스)에 걸친 부지를 개발유보 지역으로 지정 받았다. 1972년 알프마리팀주(州)정부는 중앙정부와 합의해 소피아 앙티폴리스 건설 계획을 국책사업으로 지정하고 기업·연구소·대학 유치전에 나섰다. 그 결과 1974년 프랑스 석유연구소(FRANLAB)가 최초로 입주했다.

기대와 달리 기업 유치는 쉽지 않았다. 그러다 1981년 취임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지방 분권화 정책을 추진하며 반전의 계기를 잡았다. 당시 프랑스는 ‘파리와 (그 외의) 프랑스 사막’이라고 불릴 만큼 수도에 모든 게 집중돼 있었다. 미테랑 전 대통령의 지역 균형발전 정책에 따라 지역개발 결정권을 지자체가 전적으로 갖게 됐다.

소피아 앙티폴리스 건설에 관한 권한도 해당 지자체에 귀속됐다. 1년 뒤 125개 공기업과 정부 연구소가 입주하며 과학비즈니스벨트의 모양새를 갖췄다. 이후 해마다 90~150여 기업이 입주했다. 중앙정부와 지자체, 지역 상공회의소의 과감한 지원이 이어진 덕분이었다.




올 초 삼성전자 입주 완료

지금까지 소피아 앙티폴리스 시설 개발에 투입된 자금은 6억 유로(약 8870억원)에 달한다. 여기에 프랑스가 가진 국가적 이미지와 저렴한 토지 가격, 법인세 면제 등 다양한 혜택도 한 몫 했다. 중앙정부는 R&D 비용에 대해 세금 감면 혜택을 줬고, 소피아 앙티폴리스 투자개발청(SAEM)도 연구비 대출을 낮은 이자로 제공했다. 이런 노력 끝에 1994년 1000번째 기업이 입주했다. 이후 소피아 앙티폴리스는 신기술을 가진 글로벌 기업이 선호하는 비즈니스벨트로 명성을 떨쳤다.

올 초 입주한 기업은 삼성전자다. 장 피에르 마스카렐리 소피아 앙티폴리스 운영조합장은 “삼성전자 모바일 관련 연구팀이 한국 기업으로는 처음 입주를 마쳤다”며 “기존 모바일텔레콤 회사를 사서 들어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삼성이라는 세계적 기업이 이곳의 정보통신 기술을 높이 평가했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고 했다.


대기업만 입주한 건 아니다. 해마다 20여 기업이 소피아 앙티폴리스에서 창업한다. 분야도 IT·생명과학(BT)·에너지 등 다양하다. 마스카렐리 운영조합장은 “40여 년 전 소피아 앙티폴리스가 생긴 이래 고용 인구가 줄어든 적이 없다”며 “불황에도 이곳에선 매년 평균 400~700개의 일자리가 생긴다”고 말했다. 그의 사무실이 있는 비즈니스폴에는 30여개의 스타트업 사무실이 있다. 이 건물도 지난해 7월 벤처기업을 지원할 목적으로 지었다. 입주한 벤처기업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2011년 창업한 벤처기업 우그(Whoog)도 그중 한 곳이다. 게릭포레 우그 대표는 파리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소피아 앙티폴리스에서 창업했다.

포레 대표는 “이곳에서는 노련한 경쟁자(대기업 직원)들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며 “전 세계 유수의 대학을 비롯한 각종 교육기관과의 교류도 활발해 능력을 갖춘 젊은 구직자를 구하기 쉬운 점도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이곳에는 유로콤 공과대학, 스케마 비즈니스스쿨 등 프랑스에서도 높은 수준을 자랑하는 대학이 즐비하다.

특히 모바일 분야에 특화된 유로콤 공과대학생들은 졸업하기도 전에 이곳의 기업에서 스카우트하는 사례가 많다. 스케마 비즈니스스쿨 학생들 역시 졸업 후 대부분 이곳에서 직장을 찾는다. 기업 간 인력 교류도 활발하다. 소피아 앙티폴리스 운영조합은 입주 기업의 인사관리팀(IDRH)을 통합·운영한다. A기업에서 직장을 잃어도 바로 옆 B기업에 재취업할 수 있다.

소피아 앙티폴리스에 입주한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나와 이곳에서 창업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장 베르나르 티츠 텔레콤밸리 사장은 인텔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1년 전 독립해 통신회사를 창업했다. 인텔에서 일할 당시 소피아앙티폴리스 내 타 기업 사람들과 쌓은 인맥과 노하우로 회사를 세운 것이다. 그와 함께 일하는 3명의 직원 모두 이곳 대기업과 연구소에서 일했다. 이처럼 기존 기업과 연구소에서 스핀오프(분사)한 기업이 꾸준히 나와 성장하는 시스템이 정착돼 있다.

티츠 사장은 “이곳에 입주한 기업 직원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컨퍼런스와 각종 문화행사가 거의 매일 열린다”며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 뜻이 맞아 창업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근무 환경이 좋아 다시 이곳에서 일하고 싶어서라도 창업을 시도한다”고 덧붙였다.

이곳에서 출범한 벤처기업을 대기업이 흡수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IT 관련 대기업인 엔비디아(NVIDIA)는 벤처기업인 이세라(ICERA)를 합병했다. 시뮬레이션 기술 회사인 오토디스크(Autodesk)는 리얼비즈(RealBiz)라는 벤처회사를 인수·합병해 몸집을 키웠다. 마스카렐리 운영조합장은 “이런 식으로 합병하는 대기업에서는 소규모 벤처기업에서 일하던 인력과 노하우를 고스란히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소피아 앙티폴리스 입주 기업들이 낸 법인세는 500만 유로(약 900억원)에 달한다. 이 돈은 소피아 앙티폴리스가 소속된 알프마리팀주 정부에서 관리한다.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주도지사(프랑스 내무부 장관이 직접 임명)가 감독하지만 그 외엔 중앙정부가 어떤 권한도 갖지 않는다. 지자체가 독립적으로 법인세를 걷고, 경영을 하다 보니 소피아 앙티폴리스 주변 5개 지역의 권한이 막강하다.

소피아 앙티폴리스 면적의 40% 가량이 속한 발본시(市)의 마크 도니 시장은 인근 24개 코뮌이 모인 소피아 앙티폴리스 인근 도시조합(CASA)의 부조합장이기도 하다. 입주 기업으로부터 걷은 세금은 CASA가 직접 운영한다.

마크 도니 발본시장은 “소피아 앙티폴리스에 나온 부가가치는 발본시와 나머지 23개 코뮌에서 나눠 갖는다”며 “발본이 소피아 앙티폴리스에서 가장 큰 규모의 코뮌이다 보니 사회간접자본과 관련된 혜택을 다른 코뮌보다 더 받는다”고 설명했다. 5개 지역에 속한 24개 코뮌이 소피아 앙티폴리스를 운영에 관여한다. 사공이 많은데 배가 산으로 가지 않을까? 마크 도니 발본시장은 “물론 이견이 없을 수 없다”고 답했다.

지난해 법인세수 900억원

“각 코뮌마다 정치 색깔이 다릅니다. 앙티브나 발본처럼 큰 도시가 있는가 하면 작은 산골 마을도 있습니다. 해변가 도시와 산골마을의 관심사는 다를 수밖에 없죠. 그러나 24개 코뮌이 힘을 모은 건 고용 창출과 경제적 부흥이라는 공통의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의사결정자로서 항상 그 점을 고려하면서 서로 존중해야한다는 걸 강조합니다.”

피에르 라피트 의원도 과학비즈니스벨트 조성 때 가장 중요한 점으로 지역·기업 간 협력을 꼽았다. 그는 “참신한 아이디어, 혁신적인 기술은 결코 혼자서 만들 수 없다”며 “경쟁 못지않게 협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라피트 의원은 “성공적인 과학비즈니스벨트 조성을 위해선 경쟁(competition)과 협력(cooperation)의 합성어인 ‘코페티시옹(copetition)’이 필요하다”이라고 강조했다.

프랑스 행정구역 지역(레지옹)-주(데파르트망)-코뮌 순이다. 레지옹은 자율적인 행정권을 가진 주(州) 통합 지역이다. 프랑스 본토에 22개, 해외에 4개의 레지옹이 있다.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 알프 코트다쥐르(PACA) 레지옹에 있는 데파르트망 중 한 곳이 알프마리팀이다. 알프마리팀의 주도(州都)는 니스다. 소피아 앙티폴리스는 지역적으로 알프마리팀의 5개 코뮌에 걸친 과학비즈니스벨트다. 이곳 운영은 주변 24개 코뮌이 담당한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1196호 (201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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