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통 설영흥 부회장 돌연 사퇴 … 쑨정차이 충칭시 서기도 적극 돕지 않아

▎설영흥 현대차 부회장(앞줄 왼쪽)과 황치판(앞줄 오른쪽) 충칭시장은 3월 27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뒷줄 중앙 왼쪽)과 쑨정차이 충칭시 서기(뒷줄 중앙 오른쪽)가 지켜보는 가운데 전략 합작 기본 협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현대차의 충칭 4공장 허가가 지연되는 가운데 4월 11일 설영흥 부회장이 돌연 물러났다.

“충칭(重慶)시와 중국 중앙정부가 힘겨루기를 하는 고래등 싸움에 새우(현대자동차) 등이 터지는 형국이다(현대차 기획실 고위 관계자).” 최근 현대차의 중국 충칭 4공장 허가 지연을 둘러싸고 벌어진 중국 내 묘한 형국을 빗댄 말이다. 현대차는 지난해부터 중국 내륙 요지인 충칭시에 연산 40만대 규모의 승용차 공장 건설을 추진해왔다.

지금까지 중국 시장 공략은 베이징이 거점이었다. 2002년 10월 베이징시 순이(順義)구에 베이징자동차와 50대50 합자사인 베이징현대차를 설립하고 공장 3개를 잇따라 지으면서 연산 105만대까지 규모를 키워왔다. 현대차는 그동안 연안 대도시를 중심으로 판매를 확대하다 2012년 중국 내륙 공략을 위한 4공장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낙점은 충칭시였다. 충칭은 중국 남서부의 중앙 직할시로 해안가 대도시와 내륙을 동서로 연결하는 요충지다.

중국 생산 300만대 달성의 전초기지 건설 흔들

3월 27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중국에서 쑨정차이(孫政才) 충칭시 서기를 만나 4공장 건설 협의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중국 중앙정부는 공장 설립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중국에서 외국 업체가 자동차 공장을 지으려면 중앙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현대·기아차는 중국에서 놀라워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해왔다.

중국 진출 11년 만인 지난해 연간 100만대 판매를 돌파했다. 워낙 성장 속도가 빨라 ‘스피드 현대’라는 말이 중국 경영계에서 나올 정도였다. 진출한 지 30년 넘은 미국에서 연간 100만대 판매는 아직도 달성하지 못했다. 현재 현대·기아차는 중국 시장에서 10%대 점유율을 기록하며 폴크스바겐·제너럴모터스(GM)와 더불어 3강으로 꼽힌다.

현대·기아차는 중국에서 알토란 같은 이익을 수확한다. 2009년 이후 매년 1조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냈다. 해외 주요 시장 가운데 영업이익률이 가장 높다. 더구나 현대모비스 등 계열사에 떨어지는 ‘낙전’까지 더하면 중국에서만 연간 2조원대 이익을 내는 것으로 증권가에서는 보고 있다.

이런 황금 시장에 요즘 빨간 경고등이 켜졌다. 판매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중국 사업에 가장 중요한 정·관계 인맥을 의미하는 ‘꽌시(關係)’에 문제가 생겼다는 추측이 나오면서다. 특히 충칭 4공장 허가가 지연되면서 여러 소문도 나돈다. 소문의 종착역은 4월 11일 현대·기아차 중국사업총괄 설영흥(薛榮興·69) 부회장의 돌연 사퇴다.

중국 자동차 시장은 1990년대 중반부터 베이징과 상하이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2010년 이후 내륙 경제발전이 가속화하면서 승용차 시장이 급격히 확대되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2009년에는 미국을 넘어 세계 최대의 자동차 시장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2000만대를 훌쩍 넘은 2198만대가 팔렸다. 2016년에는 3000만대를 넘어서고 승용차 수요만 2000만대를 돌파할 전망이다.

정몽구 회장 의중 잘 읽는 최측근

설 전 부회장이 타는 에쿠스 리무진 번호판은 ‘8888’이다. 중국에서 ‘8’자가 길한 숫자라 이 번호판을 단다. 중국에선 ‘8’의 발음이 돈을 벌게 해주고 지속적으로 발전한다는 ‘파차이(發財)’의 발음과 같기 때문이다. 화교 출신인 그는 2004년 이후 11년째 현대차 부회장직을 맡아 왔다. 현대차그룹 내 최장수 부회장이었다. 중국 내 고위 인사와 친분을 쌓은 중국통으로 2000년대 초 현대·기아차가 중국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총괄해왔다.

이런 배경에는 정몽구(76) 현대차그룹 회장과 50년 넘은 인연이 작용했다. 설 전 부회장의 선친은 서울 명동에서 ‘국빈’이라는 중국요리점을 경영하며 무역업을 했다. 화교협회장을 맡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하면서 꽌시를 어릴 때부터 몸에 배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정 회장과 설 전 부회장의 인연은 정 회장이 경복고를 다닐 때 이 식당에 들르면서 시작됐다. 7살 어린 그가 당시 정 회장의 심부름을 해주면서 자연스럽게 ‘형님-동생’ 사이가 됐다는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1994년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에 중국 사업 고문으로 합류했다. 당시 정 회장이 현대정공 사장이었다. 1998년 정 회장이 현대차를 맡으면서 다음해 그는 현대차 중국 담당 고문으로 영입된다. 이후 중국 사업에서 빼어난 성과를 올리면서 ‘중국 사업=설영흥’이라는 공식이 나왔다. 중국 공장 인허가를 지휘하면서 2000년 국내 업계 최초로 중국에서 자동차를 생산하는 허가증을 얻어냈다.

이런 오랜 인연으로 그는 정 회장의 의중을 가장 잘 읽는 측근으로 꼽힌다. 현대차 중국 담당 전직 임원은 “설 전 부회장은 정 회장과 특이한 인연으로 월급쟁이 CEO와는 격이 달랐다”며 “현대차 고위 임원들이 두려워하는 재경이나 인사 부서의 눈치를 안 보는 유일한 경영진이었다”고 말한다.

설 전 부회장은 대만 국립성보공대 회계학과, 동국대 경영대학원에서 무역을 전공했다. 오랜 기간 중국 사업을 진두지휘 한 그가 돌연 퇴진하자 현대차그룹의 중국 사업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에 대해 현대차 측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오른쪽 둘째)이 2009년 11월 현대차 중국공장 생산라인을 둘러보는 모습. 설영흥 당시 중국사업 담당 부회장이 정 회장 옆에 있다.

정몽구 회장과 인연 50년 넘은 수 천 억대 자산가

현대차 관계자는 “10여년 간 중국 사업을 하면서 시스템이 정착됐다”며 “중국 정·관계와의 네트워크도 탄탄해 업무 공백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설 전 부회장이 공식적으로 현대차를 떠났지만 막후 영향력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현대차 중국법인에는 그의 오른팔·왼팔 격인 화교 출신 담도굉 부사장과 왕수복 전무가 각각 건재하다. 그의 장남 설호지씨도 현대차 중국법인 임원(이사)이다.

설 전 부회장은 현대차그룹의 전·현직 고위층 가운데 손꼽히는 재력가로도 유명하다. 화교 가에서는 그의 재산이 수 천 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 현대·기아차가 해외 공장에 수출하는 부품을 포장하는 전문업체를 운영해왔다. 이 회사 매출만 현재 수 천 억원에 달한다. 또 중국에서도 자동차 전후방 사업에 왕성한 투자를 했다. 2006년에는 현대차 중국 엔진공장을 자신의 고향인 산둥(山東)에 유치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현대·기아차 사업은 그만의 아성이었다. 2000년대 중반의 일화다. 정 회장의 외아들인 당시 정의선 기아차 부사장의 허가를 받고 설 전 부회장의 중국 사업 감사를 했던 임원이 거꾸로 옷을 벗는 일까지 생겼다. 이후 그룹 내 그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졌다. 정 회장이 직접 나서기 전에는 아무도 제지할 수 없어 ‘언터처블’로 불릴 정도였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인사는 설 부회장이 용퇴 의사를 밝힌 데 따른 것으로 10년 간 중국 사업을 진행하면서 전문 인력을 충분히 보강해 중국 4공장을 비롯한 모든 사업은 계속 진행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대차는 2012년부터 중국 4공장을 계획했다. 10년 후 연간 3000만대 시장으로 커질 중국에서 일찌감치 300만대 생산체제를 갖춰 시장점유율 10%를 차지하겠다는 원대한 목표였다. 이에 따라 중국 내륙 진출이 최우선 과제로 선정됐다. 4공장 후보지로 충칭이 부상했다. 인근 쓰촨성을 비롯, 중서부 지역에 판매를 넓힐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충칭은 일본 자동차 업체가 일찍 진출하면서 부품부터 물류까지 전후방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것도 매력이었다. 여기에 설 전 부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쑨정차이가 충칭 당 서기를 맡고 있었다.

쑨정차이는 농학박사 출신으로 1990년대 후반 현대차 중국 공장이 위치한 베이징시 순이구의 구청장을 지냈다. 2002년에는 순이구 서기로 승진했다. 쑨 서기가 순이구에서 일한 10년은 현대차 중국 성공의 디딤돌이 됐다. 베이징현대차 전직 임원은 “쑨 서기는 당시 설 부회장을 비롯한 화교 인맥과 활발하게 교류했다”고 말했다. 설 전 부회장은 지난해 3월 오랜 연분을 쌓은 쑨 서기를 만나 충칭 4공장을 요청했고 쑨 서기는 흔쾌히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 해 5월 베이징현대차 쉬허이 회장이 쑨 서기를 면담하면서 충칭으로 가는 현대차를 껄끄럽게 생각한 베이징 정부와 관계도 원만해졌다. 급물살을 타던 충칭 4공장의 마지막 방점은 정 회장의 방중과 중국 중앙정부의 허가였다. 정 회장이 중국을 방문해 베이징에서 공산당 상무위원을 면담하고 충칭시와 양해각서(MOU)를 맺는 수순만 남은 것이다.

문제는 이때부터다. 공산당 상무위원과 면담 일정이 이런저런 이유로 취소되면서 충칭 프로젝트는 표류했다. 중국에서 외국 기업의 자동차공장 건설은 중앙 공산당 국무원에서 승인을 거쳐야 한다. 이런 승인사항은 리커창 국무원 총리가 직접 챙긴다. 충칭 4공장 허가에 중앙정부가 제동을 건 셈이다. 현대차는 상황이 다급했다.

현대차는 지난해 베이징 3공장 완공 후에도 중국에서 물량이 모자랐다. 더구나 GM·폴크스바겐 같은 경쟁자들이 앞다퉈 중국에 공장 증설에 나섰다. 중국 최대의 경쟁사인 폴크스바겐은 140억 유로(약 20조원)를 들여 2016년까지 4개 공장을 늘려 연 420만대로 생산규모를 키운다. GM도 110억 달러(약 11조원)를 투자, 2015년까지 380만대 생산 체제를 확보하기 공장 4개를 추가로 건설한다.

정몽구 회장 중국 출장길에서 빈 손으로 돌아와 전문가들은 중국 중앙정부가 현대차의 충칭시 4공장 허가에 대해 미온적인 이유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중국 자동차 시장의 공급과잉을 염려하는 점이다. 황사와 미세먼지 등 대기오염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거세진 상황에서 합자 자동차 공장 허가를 서둘러 내줄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다.

둘째는 중국 토종 자동차 업체 육성이다. 2000년대 초 현대차를 비롯, 외국 자동차 업체와 합자허가를 내줄 때와 상황이 달라졌다는 인식이다. 당시만 해도 합자를 통해 기술흡수가 중요한 선결 과제였다. 10년 이상 시간이 흐르면서 합자를 통한 기술 흡수는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국내 중국 전문가들은 중앙정부가 소극적일 때 지방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면 문제가 해결된 경우가 많다고 설명한다. 충칭 4공장에 대한 허가 지연은 쑨 서기가 국무원을 상대로 활발한 로비에 나서지 않았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더 큰 정치적 그림을 그리는 쑨 서기가 더 이상 중앙정부에 현대차와 결탁했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만들지 않겠다는 추측이다. 현재 쑨 서기는 공산당 서열 30위권 이내다.

최성기 베이징현대차 사장 “잘 마무리 될 것”

정 회장은 올해 3월 중국을 찾았다. 상무위원과의 만남은커녕 합자공장의 첫 단추인 양해각서(MOU)조차 맺지 못했다. 대신 쑨 서기와 만나 “충칭시는 현대차를 최대한 지원하고, 현대차는 충칭공장 건설을 추진한다”는 법적인 효력이 전무한 합의만 했다. 이후 중국 언론에서는 현대차 충칭 4공장 대신 베이징 부근 허베이성이 새로운 후보로 떠오른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베이징이 허베이 노후 공장의 매연으로 몸살을 앓으면서 이런 공장을 폐쇄하고 보다 친환경적인 현대차 공장으로 대체한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허베이의 위치다. 이미 3개의 공장을 운영중인 베이징과 가까워 현대차의 내륙 진출이라는 명분과 실리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설 전 부회장 후임으로 현대·기아차 중국사업 총괄 담당을 맡은 최성기(64) 베이징현대차 사장은 주로 중국 정·관계 인사를 상대하는 대관 업무를 수행하며 꽌시를 쌓아왔다. 최 사장은 4월 20일 충칭 4공장 건설에 대해 “곧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베이징 신국제전람중심에서 개막한 ‘2014베이징 모터쇼’ 개막식에서다.

그는 “충칭 4공장 건설에 대해 현재 중국 정부와 협의를 잘 진행하고 있다”며 “정부의 최종 승인을 받는 과정이 복잡하지만 잘 마무리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 정부와 꽌시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중국 정부가 쉽사리 예측하기 힘든 측면이 있어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