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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0년 <이코노미스트>로 되짚은 한국 경제 30년 ① 2004~2008년 - 경제·사회 전반에 양극화 심화 

수출·대기업 의존도 심화 … 금융위기 무난히 넘겨 


▎2006년 한국은 세계 11번째로 연간 수출 3000억 달러를 달성했다.



2000년대 중반, 한국 경제는 수출 호황과 내수 부진이라는 양극화 현상이 보다 뚜렷해지고 고착된 시기였다. 2004년 1년치 이코노미스트에는 ‘소비시장 침체’를 우려하는 기사가 끊임없이 나온다. 실제로, 2004년 민간 소비는 1970년대 이후 처음으로 2년 연속 감소했다. 이와 달리 수출액은 2500억 달러를 돌파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고유가와 중국의 긴축, 주요국 금리인상 등 대외 악재에다가,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까지 터지면서 경제 심리는 얼어붙었다. 본지는 불안감 커지는 금융시장, 얼어붙은 기업 마인드, 악화된 소비 심리, 대외신인도 하락 우려, 뒷걸음 치는 일자리 창출을 ‘탄핵경제 5대 악재’로 꼽았다.

뜨거운 성장과 분배 논란

2004년 4월에는 고속철도 KTX가 개통했다. 당시 KTX가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오히려 수도권으로 사람이 몰리는 빨대효과 부작용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가 팽팽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두 가지 현상이 함께 나타난 것으로 분석된다. KTX 이용객은 2004년 1990만명에서 지난해 5680만명으로 증가했다. 청년실업과 조기 퇴직, 장기 불황, 저금리가 고착되면서 ‘불황기 창업’ ‘초저가 마케팅’ ‘저금리 시대 재테크’ 관련 특집이 많아졌다. 2004년 6월에는 GS그룹이 LG그룹과의 57년 동거를 마치고 분가했다.

참여정부 3년차인 2005년에는 성장과 분배 논란이 더 뜨거워졌다. 좌·우파 이념 논쟁도 경제 영역 전반으로 퍼졌다. 출자총액제도와 종합부동산세,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를 두고 위헌 소송이 벌어졌다.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힘을 얻었던 노동계는 기아차·항운 노조 비리와 비정규직 특별법을 둘러싼 내부 갈등으로 분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노동계 내부에서도 현장·투쟁 중심의 노동 운동에 대한 논란이 뜨거웠다. 이 와중에도 주가는 계속 올랐고, 부동산 시장은 정부가 막으면 막을수록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기어이 정부는 양도세와 보유세 강화, 부동산 실거래가 의무화, 거래세 인하, 재건축·재개발 부담금 부과 등을 골자로 한 5·4, 8·31 부동산 대책을 연이어 내놨다.

하지만 고삐가 풀린 부동산 시장은 오히려 폭등세로 돌아섰다. 당시 부동산 전문가들은 ‘과도한 시장 개입’ ‘규제 정책으로 시장왜곡’ ‘근본적 접근보다 대중적 접근’ ‘내용 없는 대책 남발’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2005년 말 이코노미스트는 특집으로 ‘에너지 전쟁, 신 오일 로드를 따라서’를 내보냈다. 두바이·아제르바이잔·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4개국 현지 르포를 통해 자원 외교의 중요성을 알린 기사는 재계에 화제가 됐다.

833호(2006년 4월)에서는 ‘What’s wrong korea’ 특집이 실렸다. 오피니언 리더 100명과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상대로 한국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물은 기획이었다. 당시 한국의 10대 문제점은 노사 갈등, 저출산·고령화, 경쟁력 낮은 교육, 정치적 리더십 부재, 반기업·반부자 정서, 기업 활동 규제, 성장 동력의 소진, 집단 이기주의, 고용 불안, 분단 체제 순이었다. 지금과는 순위에 차이가 있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이다. 지금 조사한다면 안전 불감증과 ‘관피아(관료+마피아)’ 문제가 추가될 수 있을 것 같다.

부동산 시장 마지막 ‘광기’

참여정부 내내 화두였던 ‘양극화’와 관련해선 835호에서 집중분석했다. 결론은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소득은 덜 불평하지만 금융·부동산 등 자산 불평등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양극화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양극화돼 있다’ 점을 강조했다. 한 쪽에선 양극화를 지나치게 강조해 갈등을 조장하고, 다른 쪽에서 양극화 현상을 과소 평가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한편, 2006년 4월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비자금 문제로 구속됐다.

2006년 중순엔 집행임원제도, 이중대표소송제, 주총 전자투표 등의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으로 뜨거웠다. 개정안은 논란 끝에 미뤄졌고 MB정부를 거치고 나서 일부 개정됐다. 2006년 말 커버스토리 ‘은평구 아리랑’은 뉴타운 정책의 맹점을 짚은 기사였다. 뉴타운 재개발로 원주민 90%가 쫓겨나고, 세입자나 무허가 주택 거주자는 갈 곳을 잃는 뉴타운 개발이 도대체 왜 필요한지 묻는 현장 르포였다. 하지만, 총선·지방선거에서 뉴타운은 단골 공약이 됐고, 현재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천정부지로 오르던 아파트 값은 2007년 들어서면서 빠지기 시작했다. 2006년 말 발표한 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가 결정적이었다. 다시 버블 논쟁은 뜨거웠다. 전문가들 의견은 갈렸다. 하지만, 본지는 882호(2007년 4월) ‘집값 거품 꺼지는 날’ 특집에서 ‘급격한 버블 붕괴가 올 수 있고, 빚내서 막찬 탄 사람들은 타격이 클 것’이라는 데 무게를 실었다.

2007년 4월에는 지리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됐다. 그 해 6월 본지가 단독 입수해 보도한 ‘경부운하 정부 비밀보고서’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대선 6개월을 앞두고 유력대선주자였던 이명박 후보의 공약인 경부운하 프로젝트에 대해 정부는 타당성이 없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었다. 한편, 무능한 정부라는 비판을 끊임없이 들었지만, 참여정부 4~5년 차에 한국 경제 성장률은 각각 5.2%(2006년), 5.5%(2007년)를 기록했다. 사상 처음으로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달성했다. 또한 2007년 10월에 주가지수가 2000포인트를 돌파했다.

기업들도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다. 하지만 음울한 소식이 들려왔다. 리먼브라더스가 파산을 신청(2008년 9월)하기 1년 전인 2007년 8월(902호), 본지는 ‘세계 경제 침몰하나 - 미국발 금융위기’ 특집을 실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됐을 때다. 이때까지 우리 정부는 매우 낙관적이었다. ‘한국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파산으로 세계 경제는 꽁꽁 얼어붙었다.
경제 대통령을 자임하며 취임한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취임 때부터 쇠고기 파동과 세계 금융시장 불안으로 힘겨운 출발을 했다. 900원대를 유지하던 원·달러 환율은 2월 말부터 폭등해 3월 중순까지 100원 가까이 올랐다. 정부는 이를 방치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수출 기업을 위해 고환율 정책을 유도했다는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은 “외환시장에서 투기세력보다 더 나쁜 세력은 지식을 악용해 선량한 시장 참여자를 오도하고 그걸 통해 돈을 버는 사기꾼들”이라며 국내 은행들에 직격탄을 날려 환율 논쟁을 일으켰다.

2008년에도 떠들썩했던 ‘관피아’ 논란

923호(2008년 1월) ‘관료왕국 벽을 깨라’, 934호(2008년 4월) ‘MB정부, 낙하산의 추억’은 관료주의와 공기업 낙하산 폐해와 그 대안을 제시한 기획이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고 요즘도 낙하산과 관피아(관료+마피아) 문제가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2008년 중반으로 가면서, 글로벌 금융위기는 전 세계로 퍼졌다. 같은 해 9월 미국 정부는 모기지업체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을 국유화했다. 리먼브라더스는 파산을 신청했다. 10월엔 국내 주식시장이 한 달 새 33% 빠지고, 11월엔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까지 오르면서 외환위기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1238호 (201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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