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사재출연 이행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2.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은 사재출연을 통해 웅진씽크빅을 지키고 2세 경영 발판을 마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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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그룹 사태가 최악의 고비는 넘긴 모양새다. 단기 유동성 위기로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 됐던 동부제철의 구조조정 방향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대신 자율협약(채권단 공동관리)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신용보증기금 등 산은과 입장 차이가 컸던 채권단이 한 걸음 물러서면서 자율협약 추진에 동의했다. 신보는 자율협약이 끝나는 대로 신규 자금 지원 때와 같은 순위로 동부제철 관련 여신의 변제권을 보장 받는 데 합의했다.자율협약은 워크아웃처럼 사실상 경영권을 넘기는 방식의 구조조정이 아니다. 그러나 총수인 김준기 회장 일가가 경영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금융당국과 채권단의 압박 수위가 높아지면서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채권단은 김 회장이 사재를 출연할 것과 김 회장의 장남인 김남호(동부제철 부장)씨가 보유한 동부화재 지분 14.06%를 담보로 제공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채권단이 총수 일가의 동부화재 지분을 담보로 잡으려는 이유는 동부화재가 그룹 내에서 탄탄한 수익구조를 갖춘 알짜 금융 계열사라 확실한 담보가 되기 때문이다.김준기 회장은 1000억원의 사재를 출연할 계획이지만 이행 방안을 놓고 고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동부그룹은 지난해 말 발표한 자구안에서 김 회장의 사재출연 계획을 명기하면서 책임 경영을 약속했다. 김 회장은 출연한 사재를 동부제철 유상증자에 써서 재무건전성 개선에 일조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최근 동부 제철 대신 동부인베스트먼트에 출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 채권단과 의견이 엇갈렸다.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김 회장은 또 다시 생각을 바꿔 동부제철에 출연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경영권 방어 목적의 성격이 짙다. 채권단 요구 그대로 본인의 사재를 출연하는 대신, 채권단이 추가로 요구한 장남 남호씨의 동부화재 지분은 내놓지 않으려는 전략이다.총수 일가는 동부그룹을 통해 “비금융 계열사에만 국한된 구조조정인데 금융 계열사 지분을 담보로 맡기기는 어렵고, 남호씨가 경영상 책임을 질 직접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총수 일가가 보유한 동부화재 지분은 총 31.3%인데 김 회장 지분은 채권단이 이미 담보로 잡고 있어 남호씨 지분까지 담보로 들어가면 자칫 총수 일가가 동부화재에 대한 지배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급한 불 껐지만 총수 일가 책임론 제기우리나라 역대 기업 구조조정에서 오너의 사재출연은 거의 일관된 형태로 나타났다. 저마다 내세운 명분은 책임경영이었다. ‘기업인으로서 경영에 실패한 도의적 책임을 다하고 투자자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사재출연은 동부그룹 총수 일가가 고려하는 것처럼 경영권 방어 목적에서 비롯됐다.올 2월 법정관리에서 졸업한 웅진그룹 윤석금 회장 일가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웅진그룹은 지주사인 웅진홀딩스가 2012년 10월 기업회생절차를 밟은 이후 웅진코웨이 등 알짜 계열사를 팔며 빚 갚기에 나섰다. 여기에 윤 회장 일가는 지난해 초 600억원 규모의 사재출연을 결정했다. 채권단이 웅진그룹의 모태이자 훗날 그룹 재건의 축으로 삼으려 했던 계열사인 웅진씽크빅을 매각하려 하자 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사재출연을 대가로 채권단에 향후 회사 지분을 다시 사들일 수 있는 우선매수청구권을 요구했다. 채권단은 윤 회장의 뜻을 받아들였고 윤 회장의 승부수는 적중했다. 채권단은 윤 회장이 웅진홀딩스와 웅진씽크빅 지분을 매입, 보유할 수 있도록 우선매수청구권을 부여했다.윤 회장으로서는 경영권을 방어하면서 재기할 수 있도록 차후를 대비한 셈이다. 웅진그룹은 2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혹독한 구조조정 끝에 기존 14개 계열사 중 6개가 팔렸지만 웅진씽크빅과 북센, 웅진OPMS 등 그룹의 모태가 되는 교육·출판업종은 살아남았다.그리고 올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윤 회장의 장남인 윤형덕(웅진씽크빅 신사업추진실장)씨가 웅진씽크빅 사내이사로 선임되면서 사실상 2세 경영의 막이 올랐다. 차남인 윤새봄씨도 웅진홀딩스 사내이사에 선임돼 형제가 윤 회장 뒤를 이어 그룹을 이끌 계획이다. 경영권을 지키면서 재기를 노릴 수 있게 된 것이다.재계 한 관계자는 “고령에다 책임론이 불거진 윤 회장 본인이 다시 바로 경영 일선에 복귀하기에는 부담이 따랐을 것”이라며 “자연스레 2세 경영 수순을 밟으면서 책임론에서도 비껴갔으니 결과적으로는 윤 회장이 사재출연을 통해 목표로 했던 모든 걸 이룬 셈이 됐다”고 말했다.이런 사재출연의 경영학은 구조조정 같은 비상상황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코노미스트가 1240호에서 보도한 ‘뒷말 무성한 윤영환 대웅제약 회장 주식 기부’ 기사 또한 오너들에게 사재출연이 효과적인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윤영환 대웅제약 회장은 보유했던 대웅 지분을 본인이 설립한 공익재단(석천대웅재단)에 기부한다고 밝히며 자화자찬 일색의 보도자료를 냈다. 표면상 취지는 좋지만 법적으로 증여세를 피할 수 있는 4.95%란 수치의 지분 규모는 ‘기부를 가장한 상속, 아들 윤재승 대웅제약 부회장의 경영권을 탄탄히 하려는 일종의 꼼수’라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기업들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가장 애가 타는 당사자들인 채권단 역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적극적으로 이를 이용하기도 한다. 총수 일가를 압박해 사재출연을 이끌어내 구조조정에 활용하거나, 사재출연을 총수가 채권단과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을 때 빠른 의사결정을 하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해당 기업에는 암묵적으로 경영권 방어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대신 실리를 챙기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사재출연이 채권단으로선 오너 압박에 즉효인 카드, 오너들로서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의 의미인 것”이라고 덧붙였다.조건도, 아낌도 없는 외국 기업인 사재출연다른 나라에서는 어떨까. 미국의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1994년 자선재단을 설립한 이후 올해까지 총 40조원 가까이를 기부했다.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역시 ‘투자의 귀재’라는 별칭과 함께 ‘기부의 귀재’로 불릴 만큼 2006년부터 많은 돈을 기부에 쓰고 있다. 아시아 최대 갑부인 리카싱 허치슨 왐포아 회장은 1980년 설립한 리카싱 자선재단을 통해 지금까지 수천억원의 사재를 학교 등에 기부했다.모두 일회성이 아니었고, 비상상황에서 경영권 방어를 목적으로 꺼내든 카드도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 기업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나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도 수천억원이 넘는 사재를 사회 환원에 썼지만 각각 삼성 특검, 비자금 재판이라는 비상상황 직후에 꺼내든 카드였다는 점에서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