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정치의 속성상 표심을 잃기 쉬운 증세를 과감하게 시도하긴 어렵다. 담뱃값에 이어 주민세·자동차세도 올리려는 정부가 증세는 아니라고 우기는 배경이다. 이러니 ‘꼼수 증세’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이 참에 정부가 국민에게 증세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사회적 합의를 하는데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빗장 열린 증세 시대의 이모저모를 살펴봤다.
“세금이 무슨 홍길동인가? 세수는 늘었는데 증세는 아니라니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왜 증세를 증세라 못 부르나?” 모 대학 경제학과 교수의 지적이다. ‘증세’ 논란에 불이 붙었다. 정부가 연이어 세금 인상안을 발표하면서다.정부는 9월 11일 담뱃값을 2500원에서 4500원으로 인상할 것 이라고 발표했다. ‘종합 금연대책’으로 포장했지만, 내용은 ‘세수증대 대책’이었다. 비판을 예상해서인지 발표도 ‘어떻게 흡연율을 낮출 것인지’보다 ‘세금이 얼만큼 늘어나는지’ 설명하는 데 중점을 뒀다. 정부의 예상대로라면 담뱃값이 2000원 오를 경우 전체 세수는 2조8300억원가량 는다. 1조600억원 규모의 개별소비세(국세)도 신설된다. 정부는 가격 인상으로 담배 소비가 34% 가량 줄 것으로 전망했지만 예상보다 소비 감소가 덜할 경우 세수는 더 많이 늘어난다.담뱃값 인상은 시작이었다. 안전행정부는 9월 15일 ‘2014년 지방세제 개편방안’을 담은 지방세기본법·지방세법·지방세특례제한법 개정안 등을 입법 예고했다. 주민세와 자동차세 등 지방세를 대폭 인상하는 게 골자다. 이에 따라 현재 1인당 2000원~1만원 선에서 부과되는 주민세는 1만~2만원으로 100%가량 오른다. 자동차세도 2017년까지 100% 인상하기로 했다. 발전용수 및 지하수, 원자력 발전시설 등에 부과하는 지역자원시설세도 인상할 예정이다.
깃털 뽑아 비명 나오는데 증세 아니라는 정부그런데 정부의 태도가 영 마뜩찮다. 논의 절차도 없이 갑작스럽게 담뱃값 인상을 발표하더니 주민세·자동차세 인상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인상하지 못해 조정하는 것’이라는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고 있다. 국민에게 큰 부담을 초래하는 중요한 정책이라는 걸 알면서도 8월 발표한 세법개정안에서는 언급도 않다가 추석 연휴 직후에 전격 발표한 것도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다.증세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입장 정리가 안 됐다. 문창용 기획재정부 세제실장은 담뱃값과 주민세 인상이 증세가 아니냐는 질문에 “증세가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사실상 정부가 증세를 인정한 모양새가 되자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진화에 나섰다. 최 부총리는 9월 16일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정책 방향을 증세로 전환한 것이 아니며 증세는 경제를 위축시킬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담배세 인상에 대해서도 “국민 건강을 위한 것이지 세수 증대 목적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세수가 어느 정도 늘어나는 건 맞지만 정부 정책의 방향의 증세로 돌아선 건 아니라는 뜻으로 읽힌다.
내년 재정수지적자 33조원에 달할 듯프랑스 루이 14세 시절 재무장관인 콜베르는 “거위가 비명을 덜 지르도록 하면서 최대한 많은 깃털을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무리하게 ‘깃털(세금)’을 뽑다간 ‘거위(국민)’가 저항한다는 의미로 쓴 말이다. 최 부총리의 말을 이 비유에 대입시키면 깃털을 뽑고, 비명도 지르는데 증세는 아니라는 주장처럼 들린다.일반 국민 입장에선 쉬 받아들이기 어렵다. 야당도 즉각 반발했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명백한 서민 증세”라며 “서민 주머니에서 세금을 빼낼 것이 아니라 부자 감세를 철회해 곳간을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번 세수 인상의 목적은 주로 지방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담뱃값에 포함된 담배소비세와 지방교육세 등은 지방세다. 주민세와 자동차세 역시 지방세다. 재정 상황이 어려운 지방자치 단체를 고려한 조치로 보인다. 실제로 최근 ‘디폴트 위기설’이 제기될 정도로 많은 지자체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다. 무상급식·기초연금 등 복지 지출은 크게 늘었는데 세수는 제자리 걸음을하고 있어서다.9월 3일 전국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는 공동성명서를 내고 지자체의 과중한 복지비 부담 완화를 위해 중앙정부가 재정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협의회 측은“최근 고령화 및 저출산 대책에 따른 복지정책의 확대로 지자체의 최근 7년간 사회복지비 연 평균 증가율이 11.0%로 지방 예산 증가율 4.7%의 2배 수준”이라며 “기초연금 전액을 국비로 지원하거나 국고 보조율을 90% 이상으로 확대하고, 보육사업 국고 보조율 역시 70%(서울 40%)로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지방에선 돈이 없다고 아우성인데 중앙 정부도 딱히 묘수는 없다.
정부의 곳간도 2008년 이후 계속 적자다. 적자폭도 해마다 늘고 있다. 올해 관리 재정수지(총수입에서 총지출을 뺀 통합재정수지에서 국민연금 등 사회보장성 기금에서 발생한 흑자를 제외한 실질 재정수지) 적자는 약 26조 원이다.
‘표 떨어지는 소리’에 증세 말도 못 꺼내는 정치인우리나라에서도 정권에 따라 세율을 조정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대놓고 ‘증세’라 명명한 적은 없었다. 정치인이 이런 소리를 했다간 ‘표 떨어지는 소리 말라’며 면박을 당하기 일쑤다.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은 증세 문제를 언급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데 침묵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조세부담률 또는 국민부담률을 어느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인지, 간접증세와 직접증세는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 보편증세와 부자증세의 갈등은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등에 대해 국민적 논의와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굳이 세금을 안 올려도 된다면 인상을 안 하는 게 맞다. 그러나 돈 쓸 곳이 많아졌으면 확실하게 더 걷어, 제대로 쓰면 된다.증세 논의에 앞서야 할 것도 바로 이 점이다. 확실하게 걷어야한다.
그러려면 일단 과도한 비과세·감면 혜택부터 축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행정대학원 교수는 “비과세 정상화가 투명한 세금 체계의 첫 걸음”이라며 “증세를 논의하는 마당에 각종 감면 혜택을 줄이는 걸 망설이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과도하게 소액주주 세부담을 완화해
납세자도 일정 부담 감내해야차제에 세금 체계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제고하는 기회로 삼자는 지적도 있다.한국납세자연맹이 2579명의 회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43%는 ‘세금을 빼앗기는 기분으로 낸다’고 답했다. 흔쾌히 낸다고 답한 사람은 7%에 불과했다. ‘세금이 낭비 없이 잘사용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매우 낭비’라고 답변한사람이 85.3%에 달했다. 국민 상당수가 세금 체계에 불만이 있다는 의미다. 김대환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복잡한 세금 체계 때문에 낭비되는 사회적 비용이 매우 크다”며 “난해한 세금제도부터 간단히 고쳐 비효율을 줄이고, 국민에게 세무 행정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게 먼저”라고 지적했다.세금 내는 게 기쁠 리 없지만 납세자들도 생각을 바꿀 때가 됐다. 세금은 경제적 측면에서 부담인 동시에 사회적 연대를 형성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복지 확대가 시대적 과제라면 그 부담 역시 일부분 감내해야 한다. 김우창 교수는 “국민도 막다른 골목에 처한 정부에 출구를 열어줘야 한다”며 “정부는 필요한 재원의 규모를 솔직히 제시하고, 국민이 감당해야 할 부담의 적정수준을 정확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