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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잘못했거든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 

스스로 ‘옳다’ 확신하는 군주 많아 ... 나라 전체가 위기 맞기도 

전통사회에서 지식인들의 필독서였던 사서(四書, 논어·맹자·중용·대학)는 지금도 동아시아의 소중한 고전이자 인문 교양서다. 그러나 원문인 한문인데다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다 보니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이 시리즈는 사서의 내용과 구절이 구체적인 현실, 특히 정치 현장에서 어떻게 읽혔는지를 다룬다. 왕과 신하들이 국가 비전을 논의하고 정책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참된 리더의 자격을 되새기고 올바른 삶의 원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서가 어떤 방향성을 제시했는지 실록을 토대로 살펴본다. 이를 통해 사서가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고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길 기대한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잘못했거든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過則勿憚改)’. [논어]의 ‘학이(學而)’편과 ‘자한(子罕)’편에 반복해서 나오는 구절로, [맹자]의 ‘공손추(公孫丑)’ 하편에도 ‘잘못이 있으면 곧 고쳐야 한다(過則改之)’는 유사한 대목이 나온다. 여기에 대해 주자(朱子)는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용감하지 못하면 악(惡)이 나날이 자라나게 되니 잘못을 했거든 신속하게 고쳐야 하며 허물을 바로잡는 것을 두려워하고 어렵게 여겨서 구차히 편안해서는 안 된다’고 주석을 달았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잘못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허물을 가지고 있고 과오를 범한다. 군자(君子)와 같은 훌륭한 인간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잘못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아니라 그 이후의 태도다. 허물이 있더라도 반성을 하고 문제점을 개선해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나아가 잘못을 나의 부족한 점을 채우고 인격을 수양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잘못을 고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일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공자가 제자인 안회를 가리켜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不貳過)”고 극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인간은 스스로에게 관대하게 마련이다. 허물을 알면서도 두렵거나 어렵다는 이유로, 고치지 않아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다 보면 인간은 결코 진보하지 못한다. 허물을 그대로 두니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없고, 원인을 바로잡지 못하니 계속 같은 잘못이 반복되는 것이다. 심지어 잘못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합리화, 혹은 왜곡하는 경우까지 나오는데 이는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잘못을 덧칠하기 위해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게 만든다.

이 도덕적 규범은 실록에서 왕의 정치적 책무로 등장한다. “대개 사람은 비록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허물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잘못을 하고 나서 능히 고친 뒤에야 진정한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탕왕(湯王, 중국 고대의 성군)은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았으며, 공자도 ‘잘못했거든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성종실록 15년 2월 6일).

구차히 편안해서는 안 된다

백성과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는 왕은 완벽해야 한다. 적어도 완벽에 가까워야 공동체와 구성원들을 위한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도 인간인 이상 허물이 없을 수 없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따라서 그로 인한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잘잘못을 항상 성찰하고, 잘못을 알았을 때 신속히 수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문제는 왕처럼 최고의 자리에 오른 리더들은 자기확신과 확증편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고 통치에 자신감이 붙게 되면 자만해서 자신이 무조건 옳고 신하들의 의견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왕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그릇된 판단을 고집하다가 공동체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조선 중종 때 시강관(侍講官)이었던 김희열(金希說)은 경연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잘못했거든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거니와 대저 사람이 요임금·순임금과 같은 성인이 아니라면 그 누구라하여 잘못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잘못이야 고치면 없어지는 것이니 괜찮으나 잘못에 대해 말해주는 것을 듣기 싫어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가진 큰 병통입니다. 더욱이 임금은 잘못을 지적해 주는 것을 듣기 좋아하고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아래에서 숨김없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임금도 잘못이 없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임금께 (간언을) 듣기 좋아하는 정성이 없고 조금이라도 꺼려하는 바가 있다면 누가 천둥과 같은 위엄을 거스르면서 진언하려 하겠습니까?”(중종실록 24년 1월 20일).

홍문관 부제학 구수담(具壽聃)도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 바 있다. ‘간언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간언을 따르는 것은 어렵고, 잘못을 알기는 어렵지 않으나 잘못을 고치는 것은 어려운 법입니다. 간언을 듣기만 하고 따르지 않으면 이는 곧 간언을 물리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으면 이는 곧 잘못을 더하는 것이 됩니다.”(중종실록 38년 12월 1일). 스스로 허물을 깨닫고 개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잘못을 지적해주는 신하들의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여 무엇이 잘못됐는지 확인하고 단점을 보완하라는 것이다. 만일 왕이 간언에 불쾌해 하고 간언을 올린 사람에게 불이익을 준다면 신하들은 임금의 눈치를 보고 비위만 맞추게 된다.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디어나 의견들도 사장되어 버릴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태도는 의례적인 것에서 끝나면 소용이 없다. 리더의 진정성이 뒤따라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왕도 사람인 이상 속으로는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수긍하고, 간언이 못마땅하면서도 듣는 척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잘못했거든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 ‘기꺼운 마음으로 간언을 받아들여라’는 책무 때문에 속마음과는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정조(正祖)도 그런 태도를 보였던 적이 있었는데, 재상 채제공(蔡濟恭)은 “지금 전하께서는 신들의 말이 좋다며 전하의 잘못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시니, 실상 신들의 말을 옳지 않게 여기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잘못인 줄 알면서 고치지 않고 좋은 말인 줄 알면서 따르지 않는 것’이니, 불행히도 ‘이런 사람에 대해선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옛 사람의 훈계에 해당됩니다”(정조실록 18년 4월 28일)라고 지적했다.

진심으로 간언 받아 들여야

[논어]의 ‘자장(子張)’편에 보면 ‘군자의 잘못은 해에 일식(日蝕)이 있고 달에 월식(月蝕)이 있는 것과 같아서 허물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보고, 허물을 고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본다’고 했다. 군자는 소인과 달리 잘못을 덮거나 왜곡하지 않고 스스로 명백히 밝힌다. 그리고 그것을 주저 없이 고치고 용감하게 바로잡기 때문에 어둠에 가렸다 빛을 되찾은 해와 달을 우러르 듯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이다. 잘못을 하고 반성하며 이를 바로잡는 과정 속에서 ‘나란 존재’가 완성돼가기 때문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276호 (201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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