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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정원 힐세리온 대표] 철학 없는 회사는 오래 못 간다 

공학도→우주인 도전→의사→벤처기업가 … “나이 생각 떨치고 벤처의 바다에” 


▎류정원 힐세리온 대표는 “중장년 세대의 역량을 활용해야 지금의 벤처 생태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초음파 진단기를 들고 다닐 순 없을까?’ 이 작은 상상이 출발점이었다. 힐세리온이 개발한 휴대용 초음파 진단기 ‘소논(SONON)’엔 선이 없다. 흔히 병원에서 본 엄청난 크기의 초음파 진단기만 떠오르겠지만 소논의 크기는 25㎝에 불과하다. 무게도 390g.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진단과 동시에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모바일 기기로 영상 정보를 전송할 수 있다. 위급한 상황이거나 병원을 찾기 어려운 환경에 있는 환자를 위해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가격은 기존 초음파 진단기의 10분의 1 수준이다. 업계에서 큰 관심을 받은 건 당연했다. 지난해 말 공식 출시된 이후 올해 약 30억원의 매출을 목표로 달리고 있다. 본격적인 양산 체제를 갖추게 될 올해부터 고속 성장이 예상된다.

초소형 무선 초음파 진단기로 새 바람


“응급실에 일하던 시절, 만삭의 임산부가 실려왔는데 상황이 긴급했어요. 심폐소생술로 겨우 위기를 넘긴 뒤 큰 병원으로 보냈는데 결국 산모와 아이 모두 세상을 떠났어요. 결과는 그대로였을지 모르지만 ‘급한 대로 검사라도 할 수 있는 휴대용 진단기가 있으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죠. 오랜 연구 끝에 나온 결과물이 좋은 반응을 얻어 기쁩니다. 많은 의사가 휴대하게 되면 소논이 ‘제2의 청진기’ 역할을 하게 될 날도 오겠죠. 소논은 복부용인데 팔·다리용과 동물용도 개발 중입니다.”

힐세리온을 이끄는 류정원(41) 대표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서울대 자연과학부에 입학한 그는 대학 시절부터 여러 벤처기업을 돌며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2001년 첫 창업에 나섰다. 고화질 영상장치 관련 시스템을 만드는 회사였는데 대기업과 손잡고 수출에 나설 만큼 사업이 잘 됐다. 그러나 벤처 버블이 꺼지면서 첫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한 기업에서 신호처리기술 전문가로 일했던 그는 2005년 방향을 확 틀어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한 뒤 의사가 됐다. 그 사이엔 한국 최초 우주인 선발대회에 도전장을 내밀어 최종 1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2012년 지금의 힐세리온을 창업해 다시 벤처 업계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다이내믹한 삶이다.

“뭘 많이 한 것 같아도 돌아보면 다 헛발질이었죠(웃음). 의사로 일하면서 애플리케이션 개발을 하기도 하고, 2009년엔 ‘국경 없는 의사회’ 해외 파견에 지원하기도 했죠. 남들이 보기엔 이상해 보일 수 있는 일도 많이 했어요. 그러나 세상에 의미 없는 헛발질은 없어요. 10년 넘게 했던 딴짓 속에서 사업 아이템이 생겼고, 쓸모 없어 보이는 행동이 쌓여서 그걸 구현해 낼 실력이 생긴 것 같아요.”

힐세리온은 그의 두 번째 창업이다. 첫 회사가 문을 닫을 때 여기저기 원망을 많이 했지만 돌아보면 얻은 게 훨씬 많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실패의 원인은 바로 철학의 부재다.

“당시 사업 아이템이 굉장히 훌륭했고, 나름 기술력도 뒷받침 됐어요. 성공 경험을 가진 선배와 동업을 했고, 실력 있는 친구들도 많이 영입했죠. 겉보기엔 안 될 수가 없는 사업인데 결국 문을 닫았죠. 단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는데 그걸 넘기지 못했어요. 더 엄밀히 말하면 그러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 같아요. 다들 용병 같았죠. 이 일이 아니어도 할 일이 있으니 작은 부침에도 뿔뿔이 흩어진 거죠. 그때 깨달았어요. 기술·투자·인력 보다 구성원이 공유할 철학, 즉 기업의 정신을 세우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요.”

힐세리온의 철학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한결 진지해진 눈빛으로 “우리의 미션은 적정기술을 통한 의료 불균형 해소”라고 답했다.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은 개발도상국의 자연적·문화적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지원으론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반성에서 출발한 것인데 해당 국가에 맞는 적절한 기술로 맞춤형 지원을 하는 걸 의미한다. 식수 부족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한 휴대용 정수기나 태양열을 이용한 간단한 조리기구 등이 대표적 사례다.

대화 문턱 낮추고, 부하 아닌 동료로 대해야

“3년 동안 소논을 개발해 지난해 12월 시판을 시작할 때였어요. 당장 팔 제품이 부족한데도 아프리카 쪽 의료 단체에 먼저 기증했어요. 얼마 뒤 현지에서 아픈 아이들을 위해 정말 유용하게 쓰고 있다는 e메일을 받고 모두가 함께 기뻐했죠. 핵심은 의외로 간단해요. ‘기업이 번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에 대한 답을 내리는 거죠. 그리고 그 답을 사장부터 모든 직원이 공유하는 겁니다. 이런 게 있으니 직원들도 힘을 더 내는 것 같아요. 첫 창업 때는 이런 고민을 못했어요. 저 또한 너무 어렸으니까요.”

이런 측면에서 보면 청년 창업보다 중장년 창업이 유리한 점이 있다는 게 류 대표의 지적이다.

“아무래도 연륜과 경험을 무시할 순 없으니까요. 참신함과 혁신 능력에선 젊은 세대가 강점이 있지만 도전정신만으로 사업이 성공할 가능성은 정말 작거든요. 둘러보면 선배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젊은 사업가들이 많습니다. 중장년이 꼭 직접 창업을 해야 하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리더형’ ‘참모형’ ‘실행형’ 등 사람마다 성향이 다른데 모두가 대장이 될 필요는 없죠. 그래서도 안 되고요. 대신 벤처라는 배에 젊은 사람과 함께 타는 겁니다. 제 주변엔 40대 중반이 돼서도 20대 CEO를 모시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이와 달리 ‘내 나이에 뭘’ ‘자존심이 상해서’ 이런 생각 때문에 괜찮은 기회를 차 버리는 분들도 있죠. 개개인이 생각을 달리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부 정책 역시 투자에만 집중하지 말고 이러한 인력 미스매치를 해소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중장년 세대의 역량을 활용해야 현재의 벤처 생태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벤처 천국이라 불리는 실리콘밸리가 지금이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회사 내에서 그의 호칭은 ‘대표님’이 아니다. 가장 막내 직원 조차도 그를 ‘벤’이라 부른다. 당연히 직원들끼리도 직함 대신 영어 이름을 부른다. 회의는 일주일에 단 한 번, 그것도 샌드위치를 먹으며 하는 스탠딩 회의다. 회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다. 팀별로 예산이 정해지면 그걸 어떻게 쓸지도 팀장과 팀원이 자체적으로 결정한다. 아주 중요한 사안이 아니면 결제 서류는 대표에게 올라오지 않는다.

“말로만 수평적 기업문화를 외쳐봐야 아무 것도 안 바뀝니다. 제도와 시스템을 확실히 틀어야 변화가 생기죠. 그러려면 CEO가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많은 걸 내려놓아야 합니다. 벤처기업인데 의사결정 속도가 대기업과 같으면 결코 그들을 이길 수 없죠. 대화의 문턱을 낮추고, 부하가 아닌 동료로 대해 보세요.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고, 직원들도 주인 의식을 가질 겁니다. 그런 회사는 반드시 성공합니다.”

1289호 (201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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