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비영리 재단인 새플링에서 운영하는 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는 ‘널리 퍼져야 할 아이디어’라는 모토로
경제·경영·사회·과학 분야에서 세계적 저명 인사들의 동영상 강의를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TED 웹사이트에 등록된 강의(1900여건)는
대부분 한국어 자막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 시사성 있는 강의를 선별해 소개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설명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DJ나 VJ처럼 LJ(Lecture Jockey)로서 테드 강의를 돌아본다.
▎ⓒted.com |
|
‘낭자(娘子)’라는 단어가 있다. 결혼 안 한 처녀를 높여 부르던 말인데, 지금은 일상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의미를 모르는 사람도 꽤 된다. 그런데 이 단어 앞에 다른 단어를 붙이면 전 국민이 즐겨 쓰는 합성어가 된다. 바로 ‘태극낭자’다. 평소에 별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던 여자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한 망태기씩 담아 온다. 이와 달리 남자 선수들은 요란만 엄청 떨다가 심판이 편파적이어서, 현지 기후가 하필 엉망이어서, 상대팀이 집요하게 반칙을 해서 풀 죽은 모습으로 돌아오기 일쑤다. ‘태극도령’이라는 말이 없는 이유다.남자들끼리만 하는 얘기지만 솔직히 한국의 미래는 여자들 손에 달려 있다. 아무리 삐딱하게 보려 해도 학교 때 여자 애들이 공부도 훨씬 더 잘하고, 발표도 또박또박 자신감 넘치게 한다. 직장에서도 여자 동기들이 일도 열심히 하고 농땡이도 안 부린다. 기가 죽은 남자들은 여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설 수 있는 뭔가를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길에서 ‘김여사’가 눈에 띄면 그렇게 좋아하는 거다.
‘태극낭자’는 있지만 ‘태극도령’은 없다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왼쪽)와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 |
|
여성 파워가 갈수록 세지고 있다. 셰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도 그중 한 명이다. 스펙도 엄청나다. 하버드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세계은행과 맥킨지 컨설턴트, 구글 부회장을 거쳐 2008년부터는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재직 중이다. 그녀는 일하는 여성을 소재로 쓴 자신의 책 [린 인(Lean In)]이 출간된 이후 여성의 사회 진출을 지원하는 ‘린인 서클’을 창단하기도 했다(Lean in은 상체를 숙여 적극적으로 임하라는 뜻). 돈도 많다. 2014년 개인 순보유 자산이 10억5000만 달러(약 1조 2000억원)인데 이 많은 돈을 상속 한 푼없이 스스로 벌어 모았다고 한다!그녀는 직장 내 여성의 숫자가 많아지기는 했지만, 최고 위치에 오르는 비율은 여전히 형편없다고 지적한다. 직장 여성들이 고위직까지 가기 전에 중도에 그만두기 때문이다. 테드 무대에선 그녀는 C-스위트(suite)를 목표로 하는 여성들에게 세 가지 충고를 던진다(C-suite는 CEO, CFO 등 직함에 C(Chief)가 들어가는 고위 경영진). 양성평등 구호를 외치며 남녀 대결구도로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직장 여성 개개인이 기억하고 주변 여성 동료들과 딸들에게 들려줘야 할 얘기라서 더 피부에 와 닿는다.미국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을 상대로 한 조사를 보면, 남성은 57%가 첫 연봉에 대해 협상을 한 반면 여성은 그 비율이 7%에 불과하다. 여성은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남성은 자신의 성공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지만, 여성은 동료 덕분이거나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크다고 한다. 이래서는 최고 위치에 오르지 못한다. 여성이 최고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첫째, 테이블에 앉아라(Sit at the table). 여성이 스스로 위축되는 것은 남성 편향적인 사회 인식 탓이 크다(이 대목에서 강의를 듣던 모든 여성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겁난다). 하버드 비지니스 스쿨에서 행해진 연구결과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어떤 사람의 사례를 두 그룹의 학생들에게 들려줬다. 한 그룹에게는 그 사람이 하워드(Howard)라는 남성이라고 소개했고, 다른 그룹에게는 하이디(Heidi)라는 여성이라고 했다. 그런 다음 얘기를 들은 두 그룹의 반응을 조사했는데 일단 두 그룹 모두 하이디와 하워드를 똑같이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학생들은 하워드에 대해서는 상사로 모시고 싶고, 낚시를 같이 가고 싶을 만큼 좋아한 반면, 하이디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네요. 좀 독단적이고 이기적일 것 같아요”라는 답을 했다(실제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사람 이름은 하이디였다). 이러한 편견을 깨려면 여성들 스스로 구석자리가 아니라 당당히 테이블 한가운데 앉아야 한다. 자신이 성공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야 하고 자신만의 성공을 쟁취해야 한다.둘째, 배우자를 진정한 배우자로 만들라(Make your partner a real partner). 아이가 있는 맞벌이 가정의 경우 아내가 남편보다 집안일은 두 배, 애 보기는 세 배를 한다고 한다. 아내는 직업이 두세 개이고, 남편은 단 하나인 셈이다. 이러면 여성들이 직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집안일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므로 합리적으로 분담해야 마땅하다. 남편을 연애의 파트너뿐 아니라 인생의 파트너로 만들어야 한다. 연구에 따르면 집안일을 평등하게 하는 가정일수록 이혼율이 절반이었고, 부부간에 훨씬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한다.셋째, 그만두기 전에는 그만두지 말아라(Don’t leave before you leave). 직장 여성들은 아이를 갖는 것을 생각하는 순간부터 미리 소극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 더 이상 승진에 목메지 않고, 새로운 프로젝트 또한 맡지 않는다. 서서히 뒤로 물러서 기대는 것이다. 샌드버그에게 어떤 여직원이 찾아와 이 문제를 상의했다고 한다. 얼굴을 보니 꽤 젊어 보여서 “이제 아이를 가질 계획인가요?”라고 물었더니 “아니요, 전 결혼도 안 했는걸요”라는 답이 돌아 왔단다. 알아봤더니 이 여직원에게는 아직 남자친구조차 없더란다. 회사에서 발을 뺄수록 점점 일이 따분해지고 재미없게 되는데, 그러면 설사 아이를 낳고 출산휴가가 끝나도 복귀할 마음이 안 들게 된다. 너무 먼 미래까지의 계획을 미리 성급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일을 그만둬야 하는 그날까지 계속 액셀을 밟아야 한다.바야흐로 여초(女超)시대다.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여성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제 양성평등을 넘어 여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올 것만 같다. 하지만 한 꺼풀 벗기고 들여다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2015년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보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유리천장(glass ceiling)’ 지수는 100점 만점에 25.6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8개 회원국 가운데 꼴찌란다. OECD 평균이 60점이라는데 25.6점은 해도 너무했다. 2014년 다국적 투자은행 크레딧스위스(Credit Suisse)가 전 세계 36개국 3000여개 기업의 고위 경영진 2만8000여명을 대상으로 여성임원 비율을 조사해 봤더니 한국이 1.2%로 이 역시 전세계 꼴찌였다.
여초시대에 걸맞은 여성의 사회적 위상 필요
▎‘여성 리더’ 강연 동영상. |
|
여성의 교육 수준이 OECD 국가 중 세계 1위인 점을 고려할 때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현실이다. 샌드버그가 확신하는 것처럼 미래 어느 시점에 세계의 반이, 그리고 기업의 반이 여성에 의해 이끌어진다면 더 좋은 세상이 올지 모른다. 제도적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 특히 고위직 진출을 도와줄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히려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볼멘 소리 할 때가 아니다. 일단 세계 꼴찌부터 면해야 하지 않겠는가.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특히 이 땅의 남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굳어진 여성에 대한 고루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자대배치 받은 신병에게는 “여자친구 있습니까? 누나 예쁩니까?”라고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취업 면접 때 여자 지원자에게 “남자친구 있나요? 결혼은 언제 할 건가요?”라고 묻는 건 시대착오를 넘어 퇴행이다. 운전 중에 앞 차가 이상한 행동을 해도 ‘김여사’라고 단정짓지는 말자. 확률적으로 ‘김영감님’이나 ‘김씨’ 혹은 ‘김군’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니까.
박용삼 - KAIST에서 경영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을 거쳐 현재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신사업 발굴 및 기획, 신기술 투자전략 수립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