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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파워 피플(99) 애나 윈터 미국 보그지 편집장] 최신 트렌드 주도하는 ‘패션의 여제’ 

패선지 편집에 혁명적 변화 ... 젊은 디자이너 발굴해 충성도 높은 인맥 유지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애나 윈터 미국 보그지 편집장. /사진:중앙포토
2006년 흥행에 성공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에는 화려한 패션 세계를 주름 잡는 무지막지한 독재자가 등장한다. 메릴 스트립이 맡은 미란다 프리스틀리라는 인물이다. 미국 뉴욕의 영향력 있는 패션 잡지인 ‘런어웨이’의 편집장인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과 상상력으로 패션이라는 화려한 세계에서 권력의 정점을 즐긴다. 이 영화는 앤 해서웨이가 맡은 앤드리아(앤디) 삭스라는 이름의 신입 비서의 눈을 통해 미란다를 그린다. 미란다는 패션 디자이너 사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리며 군림한다. 말 한 마디에 패션 디자이너의 운명이 왔다 갔다 한다. 디자이너와 작품에 대한 그의 판단은 곧 업계의 지침이 되고 전체 패션 세계의 교과서가 된다. 패션의 흐름에 대한 감각과 디자이너를 판단하는 예리한 눈이 있기 때문이다.

미란다라는 캐릭터는 실제 인물에서 따온 것이다. 미국의 영향력 있는 패션 잡지 ‘보그’의 편집장인 애나 윈터(66)의 비서를 지낸 로런 와이스버거(38)가 26세 때인 2003년 펴낸 동명 소설이 영화의 바탕이다. 영화 속 미란다는 현실 속 윈터인 것이다. 윈터는 ‘패션의 여제’로 통한다. 영국 출신으로 1988년부터 미국의 영향력 있는 패션잡지 보그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영화에 등장했듯이 냉담하면서도 끝없이 뭔가를 요구하고 지시하는 스타일 때문에 현실 속에서 ‘누클리어 윈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발음이 똑같은 ‘핵겨울(Nuclear winter)’에서 따온 것이다. 핵전쟁으로 생긴 방사성 재가 하늘을 가리는 바람에 햇빛이 제대로 지상에 닿지 않아 대규모 환경변화가 발생하고 빙하기가 발생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격이 집요하고 거칠다는 뜻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실제 인물

그렇다면 이런 인물이 어떻게 패션 업계에서 그렇게 엄청난 영향력을 유지하며 오랜 기간 세계적인 패션잡지의 편집장을 지낼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윈터의 성격이 아닌 재능에서 찾아야 한다. 윈터는 패션을 보는 정확한 눈으로 유명하다. 유행의 흐름을 꿰뚫고 있어 그가 “올 가을에 대대적으로 유행한다”고 하면 유행한다. 이런 예지력으로 그는 패션 트렌드를 주도해왔다. 트렌트를 잘 예측하고 이끄는 그의 능력은 패션계에서 그를 추종하는 군단, 그리고 그의 권위와 어우러져 사실상 패션 흐름을 주도해왔다. 예측 능력도 뛰어나지만 그가 유행한다고 하면 이를 따르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다, 의당 그럴 것으로 믿고 시장에서 알아서 대량 방출하기 때문에 유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측면도 있다는 이야기다. 아울러 그는 항상 젊은 디자이너를 발굴해 미래를 준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발굴해 명성을 얻은 젊은 디자이너는 윈터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할 수밖에 없다. 미래를 주도할 젊은이 발굴에 매진하다 보니 새로운 흐름을 누구보다 잘 간파한다는 측면도 있다. 그러다 보니 패션계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것을 넘어 막강한 인맥으로 인해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다.

보그는 콘데 나스트 퍼블리케이션즈가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19개국에서 발행하는 세계적인 월간 패션잡지이다. 매달 125만부 정도가 출간된다. 1892년 미국에서 창간됐으며 1916년 영국을 시작으로 스페인·이탈리아·프랑스판을 내고 있다. 1996년부터는 한국판도 나오고 있다. 패션산업은 물론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영향력이 상당하다. 수준 높은 사진과 과감한 디자인으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윈터는 타고난 편집자로 통한다. 194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 찰스도 영국 대중지 이브닝 스탠더드의 편집자였다. 어머니 엘리노어 베이커는 미국 하버드대 법대 교수의 딸이었다. 윈터의 부모는 1979년 이혼했는데, 아버지는 잡지 편집자인 오드리 슬로터라는 여성과 재혼했다. 윈터의 남동생 패트릭은 영국 중도좌파 신문 가디언의 정치부장을 지냈다. 어려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살고 있던 외할머니 안나(윈터의 이름은 외할머니에서 땄다)가 보내준 소녀잡지를 보며 패션 감각에 눈을 떴다. 1960년대에 런던에서 성장하면서 폭넓은 패션 문화를 경험했다. 그의 아버지는 젊은 세대에 대한 기사를 쓸 때면 딸을 상대로 취재를 했다.

딸의 패션 재능을 지켜본 아버지는 윈터가 학생이던 15세 때 비바 부티크라는 런던의 영향력 있는 패션 업체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듬해 윈터는 이 가게를 떠나 해로즈 백화점에서 견습 과정에 참여했다. 이 즈음 오즈라는 패션 잡지에서 처음으로 제작에 참가하는 경험을 했다. 1970년 영국 하퍼스바자가 퀸이라는 잡지와 합병해 하퍼스&윈이 탄생하면서 윈터는 이곳에서 편집자 보조로서 패션 저널리즘을 시작했다. 그러다 당시 모델 일을 하던 친구의 도움으로 패션 사진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됐다. 당시 패션 트렌드를 주도하던 유명한 사진기자들을 소개받으면서다. 이후 창의적인 사진을 잡지에 올리기로 유명한 편집자로서 명성을 얻게 됐다. 하지만, 동료들과의 불화로 회사를 나오게 된다.

이를 기회로 1975년 뉴욕으로 떠났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남자친구 존 브래드 쇼와 함께였다. 부푼 꿈을 안고 도착한 뉴욕에서는 뉴욕판 하퍼스바자의 차장을 맡았다. 하지만, 사진이 지나치게 혁신적이라는 이유로 9개월 만에 쫓겨났다. 당시 패션 출판계에서 지나치게 튀는 그를 인정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몇 달 뒤 남자친구 브래드 쇼의 도움으로 비바라는 잡지의 첫 패션 편집자가 된다. 이 잡지는 펜트하우스 발행인인 밥 구치 오네의 당시 부인이던 캐시 키튼이 창간한 성인 여성 잡지였다. 윈터는 당시 인적 네트워크가 별로 없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못 얻을 뻔했다. 이때의 경험이 윈터가 평생 인적 네트워크에 그렇게 신경을 쓰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 자리를 맡으면서 처음으로 보조 편집자를 고용할 수 있었다. 이는 평생 그를 따라다닌 ‘어렵고 시키는 일이 많은’ 직장 상사의 이미지를 만든 시작이었다.

디자인 중심의 보는 잡지로


▎한 패션쇼에 참석한 애나 윈터. / 사진:중앙포토
1978년 구치오네는 산하의 적자 잡지를 모두 정리했다. 비바도 문을 닫았다. 윈터는 당분간 쉬면서 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면서 남자친구 브래드 쇼와 헤어지고 프랑스인 미셸 에스트 방과 사귀기 시작했다. 2년간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사랑을 불태웠던 윈터는 1980년 새로 일을 시작했다. 사비라는 이름의 여성 잡지에서 패션 에디터를 맡았다. 이 잡지는 자기가 번 돈으로 스스로 옷을 골라 입는 세련된 전문직 여성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윈터가 나중에 보그에서 일하면서 주요 독자층으로 잡은 대상과 일치한다.

이듬해 그는 뉴욕지의 패션 에디터를 맡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오래 전에 시도했다가 인정을 받지 못한 과감한 패션 사진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모델의 움직임과 패션 아이템의 이미지가 어우러지는 윈터식 사진은 독자들로부터 환영 받았다. 그는 유명인 모델을 표지에 쓰는 전략도 펼치기 시작했다. 유명인과 패션은 시너지 효과를 얻어 잡지 판매부수가 올라갔다. 다른 잡지가 이를 도입하기 훨씬 전부터 윈터는 이 전략으로 성공을 거뒀다. 나중에는 표지 모델과 인터뷰를 동시에 구사하는 전략으로 독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런 편집자를 업계에서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보그를 보유한 출판사 콘데 나스트는 1983년 파격적인 조건으로 윈터를 모셔갔다. 치열한 투쟁 끝에 윈터는 급료를 두 배로 올리고 이 잡지의 첫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얻었다. 처음에는 무엇을 하는지 명확한 규정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보그를 대대적으로 바꿔나갔다. 우선, 콘텐트 중심의 읽는 매체를 사진과 디자인 중심의 보는 잡지로 변화시켰다. 패션의 흐름을 기사가 아니고 사진으로 독자들이 스스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화제의 인물을 표지로 앞세우며 독자의 눈길을 끄는 데 집중했다. 아울러 유명한 인물, 재미난 기사, 눈길을 끄는 사진의 핵심으로 잡지의 구성 방식에 대대적인 변혁을 가했다. 문제는 일을 추진하면서 독단적으로 기획하고 결정하는 일이 지나치게 잦았다는 점이다. 이런 방식은 기존 직원들과의 불화를 불렀다. 이듬해 그는 런던에서부터 알던 소아 정신과의사 데이비드와 결혼했다.

1985년 그는 처음으로 편집장을 맡았다. 영국 보그 편집장을 맡은 그는 직원의 상당수를 교체하는 한편 이전의 어떤 편집장보다 잡지 편집에 더욱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가 누클리어 윈터라는 별명을 얻은 건 이 당시다. 윈터는 전통의 덫에 걸려 독자들의 외면을 밭던 영국 보그를 완전히 새로운 잡지로 변화시켰다. 그는 잡지의 주요 대상을 자신과 비슷한 연령과 성향의 여성에 맞췄다. 윈터는 “새로운 타입의 여성이 여기에 있다. 비즈니스와 돈에 관심이 많으며 어디든지 가서 쇼핑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직장 여성 말이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시간을 들여 쇼핑할 틈이 없는 여성이다.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어디에서 사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유행과 소비를 주도하는 패션 소비 주도층이라는 개념을 패션 잡지에 도입했다.

1987년 뉴욕으로 돌아온 윈터는 ‘하우스&가든’ 잡지의 편집장을 맡았다. 당시 이 잡지는 경쟁지인 ‘아키텍처 다이제스트’보다 판매부수가 훨씬 뒤처져 있었다. 편집장에 부임한 윈터는 첫 날부터 대변혁을 시작했다. 직원들을 교체하고 잡지의 외관을 완전히 바꿨다. 첫 주에 취소한 사진과 기사 비용만 200만 달러에 이를 정도였다. 잡지 모델은 모두 유명 인사로 교체했고 사진은 감각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1988년 윈터는 대망의 미국 보그 편집장을 맡았다. 보그를 맡은 그는 더욱 대규모의 변화를 시도했다. 이전까지 이 잡지는 라이프 스타일에 초점을 맞추고 패션은 비교적 등한히 했다. 윈터는 이를 되돌렸다. 우선 직원들을 대대적으로 물갈이 한 뒤 잡지의 얼굴인 표지부터 바꿨다. 과거에는 잘 알려진 인물의 얼굴 중심의 사진을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하지만 윈터는 몸이 더 많이 나오는 사진을 야외에서 촬영하는 방식으로 표지의 개념을 바꿨다. 하나의 값비싼 의상보다 여러 가지의 비싸거나 비싸지 않은 패션 아이템의 조화를 통해 하나의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얻는 방식을 선호했다. 윈터가 처음으로 제작한 미국 보그지 1988년 11월호는 이런 방식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세계적인 패션 사진작가 피터 인드버그가 찍은 19세 모델 미카엘라 버쿠는 50달러짜리 색이 바랜 청바지에 1만 달러짜리 크리스티앙 라크루아의 보석 달린 재킷을 입었다. 보그 표지모델이 바지를 입은 최초의 사례였다. 엄청나게 두꺼운 화장과 비싼 보석에 비싼 의류로만 치장하던 보그 모델의 천편일률적인 방식부터 혁명적인 변화를 가한 것이다.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순위 28위

윈터가 편집장을 맡으면서 미국 보그는 패션으로 초점을 옮겼다. 새로운 패션의 흐름을 주도했다. 광고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윈터는 젊은 패션 디자이너의 활약상을 폭넓게 소개했다. 미국 보그는 패션계의 실리콘밸리 전문지처럼 위상을 높였다. 젊은층과 새로운 패션 업계 주류를 다루면서 항상 신선한 아이템으로 잡지를 채웠다. 신세대는 윈터와 보그의 편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이 성장하면 보그와 윈터의 팬이 되는 것은 물론 아낌없이 광고를 해줬다. 윈터가 지금까지 편집장 자리와 영향력을 지키고 있는 비결이다. 2015 포브스 선정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순위에서 28위를 차지했다. 패션 업계에서는 유일하다.

-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1296호 (2015.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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