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5000억원 현금으로 지불하는 파격적 조건기타 회장이 인수한 FT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경제 신문이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과 더불어 서구에서 발행하는 영어 경제지의 대명사로 통한다. 정확하고 전문성 높은 경제보도로 정평이 났다. 이에 따라 영향력도 세계적이다. 영국 런던에서 1888년 창간돼 1957년 교육·출판·미디어 그룹인 피어슨에 인수됐다. 미국판·아시아판·중동판 등을 발행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현지 인쇄를 한다. 전체 구독자의 3분의 2를 영국 이외 지역에 두고 있는 글로벌 미디어다. 2014년 매출액은 약 6045억원, 영업이익은 약 434억원이다.주목할 점은 FT가 1995년 인터넷 신문을 창간하는 등 미디어 업계의 디지털화의 선두주자로 두각을 나타냈다는 점이다. 요즘 한국 미디어에서 유행하는 ‘디지털 퍼스트’ 전략의 선구자다. 종이 신문과 인터넷 신문을 합친 독자 수는 72만 9000명에 이르는데 전체 수입의 35% 이상을 디지털 부문에서 얻고 있다. 경영 전략 자체를 온라인 독자 중심으로 구사해왔다. 딥뷰라는 이름의 디지털 광고 타깃 프로그램을 개발해 디지털 매출 성장을 이끌고 있다. 딥뷰를 이용하면 단순 광고 노출량은 물론 광고가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수용자들이 광고에 어떻게 반응하는지까지 측정할 수 있어 디지털 비즈니스에 필수적이다. 효과 측정이 모호한 클릭 수 대신 온라인 독자가 머문 시간과 반응의 정도를 알아볼 수 있는 혁명적인 프로그램이다.이런 FT를 인수한 닛케이는 일본 최대의 경제지다. 정확하고 객관적이며 흥분하지 않는 기사와 논평으로 정평이 높다. 경제와 산업정책에 대한 영향력이 크다. 일본ABC협회의 올해 1월~6월 자료에 따르면 닛케이는 조간 약 277만부, 석간 약 139만부를 발행한다. 일본에서 경제나 산업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신문을 정독하게 마련이다. 특히 비중 있는 기업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닛케이를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게 당연한 일로 통한다. 기업체 간부들이 가장 선호하는 신문이기도 하다. 구독자 중 대학 졸업 이상자의 비율이 일본 일간지 중에서 가장 높다. 오피니언 리더들이 보는 신문으로 통한다. 도쿄증권거래소 1부 상장기업 225개 종목을 대상으로 산출하는 닛케이평균주가(NIKKEI 225)는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다. 닛케이 산업신문과 닛케이 MJ(옛 닛케이 유통신문) 등도 발행하며, 2010년 유료 인터넷신문(전자판)을 창간해 디지털화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14년 12월 현재 자본금은 25억엔(약 235억원)이며, 매출액은 1704억엔(약 1조6000억원)이다.FT의 인수 가격은 애초 10억 달러 정도로 평가됐다. 이에 따라 인수가격이 지나치게 높은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아마존 창업주 제프 베저스가 워싱턴포스트(WP)를 손에 넣을 때 쓴 2억5000만 달러의 5배를 넘는다. 하지만 기타 회장은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디지털화와 글로벌화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파이낸셜타임스 인수는 닛케이에 엄청난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노림수다. 일본이 아무리 경제대국이라지만 일본어로만 발행하는 미디어로서는 글로벌 경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닛케이는 일본 신문 중 가장 글로벌화에 주력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는다. 전 세계 33개 지역에 기자와 현지 스태프를 약 160명을 파견하고 있다. 일본 신문사 중 최대 규모다. 그만큼 국제화에 주력해왔지만 기타 회장은 아직도 목이 마른 것이다.아울러 기타 회장은 디지털화라는 도도한 추세를 따라잡으려면 디지털에 강한 FT를 인수하는 것이 시너지 효과를 얻는 지름길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재 종이신문이 성장의 한계에 이른 미디어 상황과도 맞물린다. 조간 기준으로 2014년도 하반기 일본 조간의 총 발행부수는 3970만 부로 13년 새 15%가 줄었다. 심지어 닛케이도 같은 기간 11%가 감소했다. 내수와 종이신문을 모두 극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존립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이런 결단을 한 기타 회장을 자세히 살펴보자. 그는 1946년 나라현 출신이다. 현립 나라고교를 마치고 게이오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졸업한 다음 달인 1971년 4월 닛케이에 입사했다. 대부분의 일본인처럼 첫 직장을 평생직장으로 삼았다. 좋게 말하면 한 우물만 판 셈이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지나치게 일본식으로 살아왔다. 한 회사만 다녀 다양한 경험이 부족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도 기자로서 다양한 경험을 했으니 경험 부족을 이야기하기는 곤란하다.
언론사 경영인으로 발군의 능력 발휘언론인으로서 기타 기자의 경력은 그리 화려하지 못하다. 금융이나 산업, 유통 등 경제 신문 핵심 부서의 부서장 경력이 보이지 않는다. 입사 뒤 나가노 지사 등에 근무하다 1988년 미주편집 총국에서 일했다. 1993년 도쿄본사 시장속보부 부장, 1995년 정리부(한국의 편집부에 해당) 부장 겸 지면심사위원회위원 등을 거쳐 1997년 편집국 부국장에 올랐다. 2001년 편집국 총무(행정국장에 해당)를 마지막으로 신문 제작 일선을 떠났다. 기자의 꽃이라는 편집국장을 지내지 못한 것은 물론 굵직한 보직도 맡지 못한 채 언론인 경력을 마친 셈이다.하지만 언론사 경영인으로서는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2002년 출판국장을 거친 뒤 2003년 이사에 올라 오사카 본사 부대표를 맡았다. 그 뒤 2005년 사장사무실 주임(사장실장에 해당)을 거쳐 그룹 경영실, 법무실을 두루 거쳤다. 신문사 경영의 핵심 보직을 두루 경험한 셈이다. 실적이 좋았는지 그해 상무이사에 올랐으며 이듬해 전무이사가 됐다. 2007년에는 경영기획, 홍보, 리스크 관리, 기업의 합법적 경영(윤리경영실에 해당) 등을 맡았다. 닛케이 경영의 심장부를 맡은 셈이다. 2008년 3월에 사장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실적을 올리면서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기 때문으로 평가된다.그는 닛케이의 디지털화에 시동을 건 인물로 통한다. 경영기획을 맡고 있던 2007년 1월 닛케이에 전자미디어국을 세워 니혼게이자이신문의 본격적인 디지털화를 시작했다. 회사 홍보와 CI작업도 담당하고 있던 그는 그해 니혼게이자이 신문의 영문 상호를 보다 간략하게 바꾸는 용단을 내렸다. 영문으로 그대로 적었던 ‘Nihon Keizai Shimbun, Inc.’라는 영문 상호를 ‘Nikkei Inc.’로 고친 것이다. 영문으로 적을 바에야 영어권 사람들이 암호처럼 느껴지는 긴 일본 이름보다 이해하기 쉽게 이를 줄인 이름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그해 10월에는 일본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요미우리 신문 본사 및 아사히 신문과 인터넷 분야의 공동사업과 판매사업 등 업무제휴를 맺는 한편 재해 발생시 신문 발행을 서로 지원하는 데 합의했다. 메이저 신문끼리 인터넷 협력과 리스크 관리 협조를 이끌어낸 것이다. 경영기획을 넘어 리스크 관리 분야에서도 업적을 낸 셈이다.2008년 사장에 오른 그는 일본 전국지로선 처음으로 오키나와에서 현지 인쇄를 시작했다. 현지 신문사인 류큐신문사에 인쇄를 위탁하는 방식이었다. 이로써 닛케이는 진정한 일본의 전국지로 올라섰다. 2009년에는 도쿄본사를 치요타구에 있는 재개발사업지역에 신축한 지상 31층 지하 3층의 닛케이빌딩으로 옮겼다. 두 달이 걸린 이사 작업을 마치고 닛케이의 치요다 시대를 열었다.
메모용 애플리케이션 에버노트에도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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