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았어요.”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 시대에 직업을 입에 풀칠하는 수단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직업을 수단으로 삼았더니 3가지 이종 업종에서 최고경영자(CEO)가 된 사람도 있다. 이성재 에셋마스터 회장이 그런 경우다.이성재 회장은 흥국생명에 보험설계사로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보험사 소장, 국장 자리를 차근차근 밟아 외국계 보험사로 스카우트되기도 했다. 프랑스생명(현 알리안츠생명) 본부장으로 승진가도를 달렸지만 갑자기 제조업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제조업을 경험하지 않으면 평생 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통상 회사 소속으로 일하다 다른 일을 시작하려고 하면 두렵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회장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보험설계사로 일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진실하게 사람을 대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믿음이었다.이런 생각은 주효했다. 그는 종이컵 제조사를 차렸다. 일단 종이컵 제조는 시작했지만, 거래처 뚫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사람을 대한다는 속칭 ‘보험 정신’으로 위기를 돌파했다.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4을 지나면서 롯데제과 영등포공장을 본 게 생각났다. 무작정 롯데제과 공장을 찾아 공장 건물 1층 앞에서 담배를 태우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본인이 만든 종이컵을 납품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대책 없이 100일이나 롯데제과 공장에 상주한 덕분에 그는 납품에 성공했다. 롯데제과에서 만들어 롯데리아에서 판매하는 스푼으로 떠먹는 아이스크림 용기가 바로 그 제품이다.종이컵 회사 대표이사로 승승장구했지만 언제 이 업계에서 밀려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 한 편이 있었다. 경쟁이 지나치게 치열했기 때문이다. 영업력보다 기술력이 중요한 곳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한 바이오 업체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주저하지 않고 자리를 옮겼다.역시 낯선 세상이었다. 대부분의 임직원들은 바이오 전문가들이었고, 거래처 상대방은 대학병원 의사들이었다. 도무지 용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서 처음엔 외국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사람을 대한다는 포기하지 않았다.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화를 모두 녹음했다. 다음 날 새벽 6시에 일어나 모든 대화를 필사해 용어를 공부했다. 생면부지 바이오 벤처 기업에서 살아남은 비결이다.잘 나가던 최고경영자였던 그는 2006년 다시 보험업계로 컴백한다. 상무, 사업단장, 에셋마스터유니온 대표 등을 거쳐 그는 에셋마스터 회장으로 취임했다. 더불어 에셋마스터 최대주주 자리에도 올라 이른바 ‘월급쟁이 신화’를 썼다. 독립판매 법인(GA)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한 이후 은퇴하고 싶다는 게 그의 최종 목표다. “보험 업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게 33년 전인데, 이제 제가 GA 업계에선 최연장자 중 한 명이더군요. 보험 판매 업계의 미래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 3~5년 이내에 아름답게 물러나고 싶습니다.”- 문희철 기자 moon.heechul@join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