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비영리 재단인 새플링에서 운영하는 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는 ‘널리 퍼져야 할 아이디어’라는 모토로
경제·경영·사회·과학 분야에서 세계적 저명 인사들의 동영상 강의를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TED 웹사이트에 등록된 강의(1900여건)는
대부분 한국어 자막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 시사성 있는 강의를 선별해 소개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설명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DJ나 VJ처럼 LJ(Lecture Jockey)로서 테드 강의를 돌아본다.
▎ⓒted.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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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대인이 비행기 복도 쪽에 앉아 구두를 벗고 편히 쉬고 있었다. 그런데 창가 쪽에 앉은 아랍인 한 명이 주스 한 잔을 가져다 달라는 게 아닌가. 유대인은 불쾌한 마음이 들었지만 굳이 싸울 필요가 없겠다 싶어 마지못해 주스 한 잔을 가지러 갔다. 그 사이에 아랍인은 유대인의 구두 안에 침을 뱉어 놓았다. 아랍인은 유대인이 가져다 준 오렌지 주스를 즐겁게 마셨고, 시간이 흘러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내릴 준비를 하다가 구두 밑창에 흥건히 침이 고인 것을 발견한 유대인은 아랍인에게 한마디 했다. “이스라엘과 아랍이 평화를 유지하려면 아랍인은 유대인의 구두에 침을 뱉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아랍인이 마시는 주스에 소변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앙숙도 이런 앙숙이 없다. 종교·정치·민족·이권 등 민감한 문제는 죄다 얽혀 있다. 하느님도 알라신도 이런 걸 바라지는 않았을 게다. 어느 날 갑자기 이스라엘과 아랍인들이 모두 기억상실증에 걸려 싸워야 할 이유를 잊어 버리지 않는 이상, 화해는 영원히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두 국민들 사이에 용서와 공감의 씨가 아주 조심스럽게 뿌려지고 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출발은 지극히 소소했다.
앙숙 중의 앙숙 ‘유대인 vs 아랍인’
▎‘중동 러브스토리’ 강연 동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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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어느 날,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전쟁이 임박했을 즈음이다. 이스라엘의 평범한 그래픽 디자이너인 로니 에드리(Ronny Edry)는 식료품 가게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가게 주인과 손님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가게 주인이 “곧 이스라엘에 1만개의 미사일이 날아올 거에요”라며 걱정했더니, 손님이 “아니요, 하루에 1만개겠죠”라며 답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에드리의 머리 속에서 1만개의 미사일이 쏟아져 내렸다. 거기에 공포에 질린 아내와 어린 딸의 얼굴이 오버랩됐다. 벌써 이란과 10년째 전쟁 중이다. 그는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더 늦기 전에 뭔가를 해야만 했다.영화에서는 이럴 때 보통 과거 특수부대 때 닦은 실력을 발휘해서 적 기지를 폭파하거나 요인을 암살하는 장면이 뒤따른다. 하지만 집으로 달려간 에드리는 달랐다. 그는 완력을 과시하는 대신 가만히 앉아 포스터 한 장을 그렸다. 거기에 적힌 글귀도 참 도발적(?)이다. ‘이란 사람들, 우리는 당신 나라를 폭격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We ♥ you)’. 그는 어린 딸과 함께 이 포스터를 든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뭔가를 해야겠다는 안타까운 심정은 십분 이해하지만, 고작 포스터라니. 순진하거나 유치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아무도 몰랐다. 에드리의 소심한 이 행동이 얼마나 큰 반향을 불러올지를. 그렇다. 이스라엘과 이란, 두 나라 국민들 사이에서 소통의 촉매제 역할을 넘어, 국제적인 공감과 평화운동으로까지 확산된 ‘이스라엘은 이란을 사랑해(Israel Loves Iran)’ 캠페인은 이렇게 시작됐다.포스터를 올리고 나서 처음에는 아무 변화도 없는 듯했다. 누구나 페이스북 사연은 그저 흘끗 보고 지나쳐 버리기 십상이니까.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한 두 사람씩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댓글을 다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물론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그중 몇 몇은 이란 사람들이었다. 테헤란에 산다는 이란 소녀 한 명은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에드리가 올린 포스터를 보면서 울음바다가 되었다는 사연을 전했다. 이 얘기를 듣고 덩달아 울던 에드리의 아내는 바로 다음날 자기 얼굴이 들어간 포스터를 만들어서 올렸다.그 다음은 예측하는 그대로이다. 에드리는 더 많은 사람이 포스터의 주인공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웃과 친구들, 그리고 학생들에게 가서 사진을 보내주면 포스터로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반응은 엄청났다. 왜냐면 전쟁 앞에서 무기력하고 체념적이었던 일반 사람이 자신들도 페이스북을 통해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사진이 쇄도해서 에드리는 그래픽 디자이너 친구를 모두 동원했고, 자신의 집 거실에 모여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포스터를 만들어 올렸다.이란 사람도 가만있지 않았다. “당신은 제 첫 이스라엘 친구입니다. 우리 두 나라에 멍청한 정치인들이 없었으면 좋겠어요”라는 사연도 올라왔고, 매일 아침 등교 길에 이스라엘 국기를 밟고 들어가도록 교육받은 어떤 이란 소녀는 포스터에 찍힌 이스라엘 국기의 파란색과 별 그림이 너무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란 사람도 포스터를 만들어 올리기 시작했고, 곧 “이란은 이스라엘을 사랑해”라고 적힌 포스터가 쏟아져 나왔다.전쟁을 앞둔 두 민족이 갑자기 서로 사랑한다고 고백한다는 것이 선뜻 와 닿지 않는다. 법적으로 반역죄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건 단순히 해프닝이나 가십거리가 아니라 제대로 된 뉴스감이다. 보통 뉴스에서 중동은 온갖 충격적이고 나쁜 소식으로 도배된다. 그런데 처음으로 중동에 관한 좋은 소식이 뉴스에 나오게 된 것이다. 전 세계인이 중동에 대해 갖고 있던 안 좋은 인상을 단박에 깨뜨릴 정도였다.
시민의 힘이 모여 평화의 디딤돌이 되다
▎로니 에드리가 이란인들을 사랑한다는 글을 캡처해 넣은 자신의 페이스북 표지(사진 왼쪽). 이에 호응해 이란의 한 커플이 이란은 이스라엘인을 사랑한다고 화답하는 포스터를 올렸다. / 사진: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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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친구는 현실에서도 친구로 이어진다. 에드리는 전시회 때문에 독일 뮌헨에 갔다가 캠페인을 지지하는 이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악수를 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음식과 야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런 선입견이나 속셈 없이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서로를 인간으로서 인정하는 것 만으로 충분했다. 얼마 후 많은 이스라엘인과 이란인은 제 3국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고 같이 활짝 웃는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 후 양국간에 평화를 갈구하는 다양한 형태의 광고와 캠페인이 줄을 잇게 된다. 때로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하겠지만, 노력한다면 피할 수 있다. 너무 늦기 전에 뭔가를, 그게 아무리 소소한 것일지라도, 하겠다는 용기만 있다면 말이다.2015년 7월 14일, 이란은 미국·중국·러시아·독일 등 주요 6개국과 최종 시한을 세 차례나 연장하는 진통 끝에 핵 협상을 타결했다. 이란은 1979년 호메이니 혁명 이후 반미 이슬람 신정(神政) 체제를 이어 왔고, 거기다 핵 개발에 따른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를 받아 국민들은 경제·정신적으로 피폐해 있었다. 핵 협상 타결 소식에 이란 시민들이 뛰쳐나와 이란의 국화인 빨간 튤립을 흔들며 “겨울은 끝났다”고 환호한 것은 당연했다.이번 협상 타결이 과연 미국과 서방, 그리고 중동의 몇몇 정치 지도자들의 결단에 의해서만 가능했을까. 정치는 인기를 먹고사는 직업이고, 정치인들은 결국 민심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번 협상 타결은 그 몇 해 전부터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자발적으로 울려 퍼진 수줍은 사랑 고백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 것이 분명하겠다. 이념보다 인간이 먼저다. 화해는 근엄한 회담장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고백에서 출발한다. 로니 에드리는 ‘평화공장(Peace Factory)’이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어서 중동 지역 사람들간의 이해와 소통을 높이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박용삼 - KAIST에서 경영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을 거쳐 현재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신사업 발굴 및 기획, 신기술 투자전략 수립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