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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스스로 지은 재앙은 피할 수 없다 

황후시해·을사늑약에도 분노하지 않아 … 조선 스스로 위기 자초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전통사회에서 지식인들의 필독서였던 사서(四書, 논어·맹자·중용·대학)는 지금도 동아시아의 소중한 고전이자 인문 교양서다. 그러나 원문이 한문인데다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다 보니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이 시리즈는 사서의 내용과 구절이 구체적인 현실, 특히 정치 현장에서 어떻게 읽혔는지를 다룬다. 왕과 신하들이 국가 비전을 논의하고 참된 리더의 자격을 되새기고 올바른 삶의 원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서가 어떤 방향성을 제시했는지 실록을 토대로 살펴본다. 사서가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고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길 기대한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온 나라에 짙은 어둠이 드리워 있던 1905년 정월. 고종은 지방에 은거하고 있던 면암 최익현(崔益鉉·1833~1906)을 불러들였다. 타협하지 않는 꼬장꼬장한 성품으로 고종과는 불편한 관계였지만, 스러져가는 국운을 붙잡기 위해 유림의 존경을 받고 있던 그의 의견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어전에 들어선 최익현은 황제에 대한 예를 마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는 지난 무술년(1898)에 올린 상소에서 모두 밝혔으나 폐하께선 받아들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번에 올라온 것도 감히 신의 의견이 채택되길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또한 어찌 감히 고향으로 무사히 살아 돌아가길 바라겠습니까? 지금 이 나라는 위태로운 형세가 목전에 닥쳐 있으니, 폐하께서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 주시겠다면 신의 생각을 모두 숨김없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최익현 ‘근본적 책임은 고종에게’

고종이 허락하자 최익현이 물었다. “지금이 태평한 시대가 아니라 난세임을 폐하께선 알고 계십니까?” 고종은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최익현은 비통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폐하께서 지금이 난세라는 것을 알고 계신다면, 어지럽게 된 원인도 알고 계십니까? 오늘날 민회(民會, 일진회 등을 가리킴)가 정부를 공격하니 이는 극도의 패역이며, 또한 강한 이웃나라(일본)를 끼고서 횡포를 자행하니 그 죄는 처단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민심이 흩어진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늘의 명을 섬겨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 폐하의 정성이 극진하지 못해서가 아닙니까? 관리들이 폐하의 덕을 받들어 나가지 못해 그런 것은 아닙니까?…(중략)…저 백성들이 자기의 살점을 씹으면서까지 외국 사람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은 물론 미련한 일이지만, 근원을 따져보면 관리들이 탐오하고 학대하여 민심을 잃어 그들이 본성을 잃고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최익현은 바로 고종에게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면서 국가를 정비하고 백성들을 위무하기 위한 5가지 시무책을 제시한다.

하지만 최익현도 이미 조선이 머지않아 망국이 될 것이라는 예감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의 침략 야욕을 저지하기에 조선은 너무나 미약했기 때문이다. “500년 동안이나 내려온 종묘사직과 삼천리강토가 장차 일본에 의해 망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다음에야 남이 업신여기는 법이니 어찌 그 죄를 전적으로 저들에게만 돌리겠습니까? 을미년의 큰 참변(을미사변)이 있은 이후부터 우리의 군신 상하 모두가 좀 더 분발하였더라면 오늘날 나라의 형편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중략)…이제는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니 아무리 훌륭한 계책이 있은들 어디에 시행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지금에라도 깨닫고 대책을 조금씩 취해나가면서 다시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고종42.1.7). 나라의 쇠망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이 되었다 하더라도, 앉아서 멸망을 기다릴 수는 없다. 늦었지만 지금에라도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바침으로써 일말의 가능성을 찾아 천명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최익현은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자존감의 회복을 강조했다. 그가 보기에 나라의 존망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되어 버린 데는 우리 자신의 잘못이 컸다. 황제와 신하, 백성들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노력하기는커녕, 군주는 무능했고 신하들은 부패하여 권력을 탐하거나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그러다 보니 민심도 흩어져 하나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지난 을미년(1895)에, 일본에 의해 나라의 왕후가 무참히 시해되는 참변을 겪었음에도 조선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복수를 다짐하는 것은 고사하고 나태함에 빠졌으며, 힘을 모으기는커녕 서로를 헐뜯기에 바빴다. 일제에 치가 떨리지만 결국 자업자득, 스스로를 멸시하고 스스로를 공격한 우리의 죄라는 것이다. 최익현이 ‘사람이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뒤에야 남이 업신여기는 법이다’는 맹자의 말을 인용한 것은 그래서이다.

이 대목은 본래 〈맹자〉 ‘이루(離婁)’상편에 나온다. ‘사람이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뒤에 남이 업신여기며, 집안은 반드시 스스로 훼손한 뒤에 남이 훼손하며,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공격한 뒤에 남이 공격하는 법이다. ‘태갑(太甲)’에 이르기를 ‘하늘이 주는 재앙은 그래도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지은 재앙은 피할 수 없다’하였으니 이것을 말한 것이다. 사람이 멸시를 받고 가정이 훼손되며 나라가 무너지는 것은 외부적 이유가 아닌 내부적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지도자가 올바른 정치를 펼치지 못하고 지도층이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으며 구성원들이 자기 비하와 체념에 빠진다면 이런 나라는 이내 다른 나라의 먹잇감이 된다. 나라의 역량이 결집될 리 없고, 나라를 지키고자 헌신할 구성원도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최익현은 절박한 우려와 걱정을 담아 이제부터라도 온 조선이 각성하여 망국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길 바랐다. 조선이 스스로를 멸시하는 풍조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 굳건한 나라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0개월 후 조선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마저 박탈당했다. 최익현은 이에 항거해 거병했다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대마도에 연금되었고, 단식 끝에 순국했다. 고종도 헤이그 밀사로 인한 일제의 압력을 받아 퇴위한다.

비극의 역사 되풀이 말아야

얼마 후 개화사상가 유길준(1856~1914)은 관직에 나와 달라는 순종의 요청을 사양하며 앞선 맹자의 말을 다시 거론했다. “맹자의 말에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를 공격한 다음에야 남이 공격하고,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를 업신여긴 다음에야 남이 업신여기는 법이다’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자체로 우리의 조국을 지킬 힘이 있고, 자체로 우리의 외교와 내부 정치를 할 지혜와 능력이 있었다면 저 나라가 어찌 감히 이렇게 했겠습니까. 최근에 걸친 두 가지 조약(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을 말함. 이로 인해 외교권이 박탈되고 고종이 퇴위했으며 인사 행정권을 빼앗겼고 군대가 강제 해산되었다)은 결국 우리 스스로 취한 것입니다.”(순종즉위.10.23).

똑같이 맹자를 인용했지만 거기에 작은 불씨나마 희망을 담았던 최익현의 말이 2년 후 유길준에 이르러선 체념과 절망의 말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비극은 그저 역사 속의 이야기일 뿐일까? 혹시 지금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04호 (2015.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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