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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나를 위한 학문에 힘써야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는 한계 드러나 … 숙종·영조의 오만함·겉치레 비난 받아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내가 들으니, 옛날에 배우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했는데, 지금에 배우는 사람들은 ‘남을 위한 학문’을 한다고 한다.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면 성현(聖賢)에 이를 수 있지만, 남을 위한 학문을 하면 겨우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나 취하고 녹이나 얻는 것을 꾀할 뿐이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고봉집).

우리는 왜 공부를 할까?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는 목적 그 자체로서의 공부와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공부가 있다.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성찰과 수양을 통해 스스로를 완성해 가는 공부가 전자라면, 진학이나 취업, 시험 합격 등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은 후자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둘 중 어느 것이 더 좋은 공부일까? 물론 기본이 되는 공부는 전자지만, 후자라고 해서 꼭 열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후자의 공부가 필요한 경우도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이와 같은 공부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목표를 달성하고자 공부를 하다 보니 공부 또한 그 목표의 테두리 안에서 빠져 나오기 어렵다. 목표와 다르거나 혹은 목표를 넘어서는 공부는 시간낭비라는 이유로 치부되기도 한다.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공부할 동인이 사라져버리는 문제점도 있다. 더욱이 공부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자신의 내면이 아닌 외부에 존재할 때, 그것은 외적인 성취, 즉 사회적 성공과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높은 지위로 올라가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다. 공부가 이것을 목표로 삼고 또 이를 위한 수단의 역할을 하게 되면 공부를 하는 사람 또한 그것만을 중시하게 된다.

스스로를 위한 공부여야 한계가 없어

서두에서 인용한 고봉 기대승의 말은 바로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자신의 성장에 목표를 두고 학문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한계를 만드는 일이 없기 때문에 높은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이목에 맞춰 공부를 하는 사람은 그들이 부러워하는 수준과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수준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그저 외형적인 명예나 이익을 얻는 데 그칠 뿐이다. 공부의 목표가 딱 거기까지이고 그것이 곧 그 사람의 한계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기대승은 이에 대해 각각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 ‘위기지학’이란 자신을 위해 학문을 하는 것이고, ‘위인지학’이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자 학문을 하는 것이다. 자아의 완성을 추구하고 자신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이 ‘위기지학’이라면 사회적 명예와 성공을 추구하며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부합하고자 공부하는 것이 ‘위인지학’이다. 이는 유학의 학문론에서 쓰이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논어] ‘헌문(憲問)’편의 ‘옛날 학자들은 자신을 위해 공부했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자 공부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는 구절에서 유래되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참된 이유를 생각할 때, 어떤 공부가 좋은 공부인지는 자명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위기지학’의 정신은 개개인을 넘어 리더가 명심해야 할 규범이기도 하다. 숙종 때의 학자 김창협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살피건대, 전하께서 경연에 임하여 강독하실 때 질문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옛 성현께서 ‘의심이 나는 점이 있으면 반드시 물어서 밝혀야 한다’고 하셨으니, 대개 학문에는 의심이 가는 바가 없을 수 없고, 의심이 나면 반드시 질문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혹 전하께서는 자신의 학문이 고명하다 생각하시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여기 시는 것입니까? 중용에 이르기를 순 임금은 큰 지혜를 가지고 있었지만 ‘묻기를 좋아하고 말을 살피길 좋아하였다’ 하였고, 증자는 안연을 일컬어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사람에게 물었고, 박학다식하면서도 배움이 얕고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물었다’ 하였으니, 순 임금과 안자와 같은 성현도 이와 같았거늘, 어찌 전하께서는 자신의 학문을 믿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으십니까?”(숙종9.7.17).

김창협은 숙종이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학문을 과시하고 싶어서라고 봤다. 의심이 생기는 점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여줌으로써, 임금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김창협은 이러한 숙종의 오만함을 강하게 비판했다. 공부란 끝이 없는 것이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 ‘순 임금과 같은 위대한 성현도 질문하고 경청하며 자신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갔는데 하물며 한참 부족한 숙종이 어찌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배움을 소홀히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이어 김창협은 숙종으로 하여금 ‘위기지학’에 힘쓸 것을 간곡히 진언했다. “만약 전하께서 의심할 것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진실로 의심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심을 두는 경지에 조차 이르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전하께서 이와 같이 한다면 매일 경연에 나아가 공부를 하신들 전하의 학문은 진보하지 못합니다…(중략)…공자가 말하기를, ‘옛날 학자는 자신을 위하여 학문을 하고, 지금 학자는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자 학문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후세의 학문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저 다른 사람의 이목만 신경 쓸 뿐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는 학자들의 잘못일 뿐만 아니라 군주들이 올바른 모범을 보이지 않아서 입니다.”(숙종9.7.17).

영조 때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수찬 남태량은 “공자가 말하길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하여 공부하고 지금 학자는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자 학문을 한다’고 했는데, 전하께서 내리신 비망기를 살펴보니, 경전을 많이 인용하셨고 뜻은 성대한 듯하나, 총명을 내세움이 지나치고 말이 많아 오히려 위엄이 떨어집니다. 정치의 득실은 실체가 없고 문자 사이에서만 맴돌며,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되지 않습니다. 혹 전하께서는 남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 크셨던 것은 아닙니까?”(영조10.2.19)라고 했다.
영조의 글이 내용은 없고 겉치레만 가득한데 이것이 혹 신하들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무리하게 자신을 과시했기 때문은 아닌지 묻고 있는 것이다.

리더라도 끊임없이 질문해야

무릇 리더는 스스로를 엄격하게 조절해야 하고 자신을 보다 완벽하게 만들 수 있도록 혼신을 다해야 한다. 조직의 번영과 구성원들의 안위를 책임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리더는 채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그 자리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구성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리더가 되는 것도 아니다. 리더로서의 자신을 완성시켜 줄 ‘위기지학’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만약 리더가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은 소홀히 하면서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에만 치중한다면, 설령 공부를 한다고 해도 좋은 성과를 낼 수는 없을 것이다. 남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공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만으로는 절대 깊은 뿌리를 내릴 수가 없다. 이런 리더는 얼마 가지 못해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05호 (201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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