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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문 밀레코리아 대표] 삼성·LG의 틈새 공략 

국내 프리미엄 가전시장 안착 … B2B에서 B2C로 


한국은 외산 백색가전의 무덤으로 불린다. 국내에 진출했던 글로벌 백색가전 기업이 하나 같이 물을 먹었다. 삼성과 LG라는 터줏대감의 벽을 못 넘었다. 국내 가전 기업들은 좋은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공급하며 시장을 다졌다. 판매 후 관리(AS)도 확실했다. 밀레는 이런 한국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독일의 명품 가전 기업이다. 2005년 한국에 진출한 이후 매년 꾸준히 성장했다. 최근 언론에서 국내 3대 가전을 이야기할 때, 삼성과 LG, 그리고 밀레를 언급하는 일이 잦아졌다. 밀레코리아를 설립해 이끌어온 안규문 대표는 ‘위치 선정과 집중’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삼성·LG가 주력하지 않는 제품군에 집중했습니다. 항상 시장 변화를 살피며 우리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포지셔닝에 주목한 덕에 살아 남았습니다.”

베스트셀러 아닌 스테디셀러 전략

밀레는 116년의 역사와 앞선 기술력을 자랑하는 독일의 명품 가전 브랜드다. 청소기와 냉장고, 식기세척기 등이 주력 제품군이다. 글로벌 가전시장에서 명품으로 인정받는 브랜드지만, 한국 시장 진출을 놓고 고민했다. 미국과 일본의 글로벌 가전 기업이 잇따라 실패한 시장이어서다. 안 대표는 프리미엄 제품군에 집중했다. 최고급 아파트와 오피스텔이 목표였다. 그는 “대중적인 제품이 아닌 프리미엄 제품을 들여와 삼성·LG와 경쟁을 피하며 살아남을 수 있는 틈새시장을 공략했다”고 설명했다.

밀레코리아는 국내 시장 진출 초기에는 프리미엄 주방 가전을 타워팰리스 등 고급 주상복합아파트 중심으로 공급했다. 시장에서 인지도를 높이며 유통을 강화했다. 인터넷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백화점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원하는 조건을 제시할 때까지 기다리며 백화점 입점을 확대했다. 온라인몰을 활용해 유통망을 넓히며 시장을 공략했다. 안 대표는 서두르지 않았다. 독일 본사를 설득해가며 스테디셀러 전략을 고수했다.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단발성 히트상품을 만들기보다는 유통망과 AS를 강화하며 천천히 성장하는 전략을 고수했다. 제품 종류와 자금력, 유통망이 부족한 현실을 감안하면 반짝 히트상품보다 꾸준히 팔리는 효자제품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는 “품질에 대한 입소문을 타고 브랜드 인지도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며 “지금은 소비자 사이에 품질에 대한 믿음이 형성돼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스테디셀러 전략을 사용한 또 하나의 이유는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다. 밀레는 1901년 세계 최초로 세탁기를 개발한 기업이다. 100년 넘게 깐깐한 기준을 적용하며 제품을 생산했다. 프리미엄 브랜드로 인정받기 위해서다. 밀레 세탁기는 1만 시간 테스트를 통과해야 출시한다. 3일에 한번 세탁기를 돌린다고 가정하면 1년 예상 사용 시간은 약 500 시간이다. 1만 시간 테스트를 통과해야 20년간 사용하는 제품이 나온다. 로봇팔로 세탁기 문짝도 10만번 정도 여닫는 테스트를 진행한다. 심지어 생산을 진행하는 도중에도 개별 부품 및 조립 라인에서 지속적으로 성능 테스트를 진행한다. 제품이 단종되더라도 20년간 부품을 보관한다. 독일에서 가장 신뢰받는 가전 브랜드로 자리 잡은 배경이다.

밀레코리아의 매출은 매년 꾸준히 늘었다. 판매가 늘어날수록 안 대표는 고객 관리에 노력을 기울였다. 판매 후 관리가 어려운 지역엔 아예 팔지 않았다. 매출을 높이는 일보다 브랜드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서다. 현지 수리 기사가 문제를 해결 못하면 본사 기술자가 밤차를 타고 내려가서 일을 마무리했다. 이를 위해 직원 관리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밀레코리아 본사는 물론 백화점 매장 직원까지 모두 정직원이다. 매년 5~6명을 독일 본사로 보내 교육 시킨다. 직원에겐 할인된 가격으로 밀레 제품을 제공한다. 직접 사용해야 제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서다.

안 대표는 밀레코리아를 유연한 조직이라고 소개한다. 기업 규모가 작기에 시장을 읽고 움직이는 속도가 빠르다. 최근 한국에선 주방문화의 고급화 바람으로 빌트인 가전시장이 빠르게 성장 중이다. 빌트인 가전은 세탁기와 냉장고, 에어컨, 전자레인지, 오븐 등을 가정이나 아파트 내부에 미리 장착하는 개념이다. 특히 소비자용 제품(B2C)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밀레코리아는 발 빠르게 이런 트렌드에 적응해 시장을 이끌고 있다. 그는 “사업 초반에는 매출의 70% 이상이 빌트인과 같은 B2B에서 나왔지만 건설경기에 따라 부침이 심해 사업 확장에 한계가 있었다”며 “입소문 마케팅을 이용한 B2C 전략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는 데 주력한 결과 매년 적자 없이 사업을 키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백화점 매장 직원까지 모두 정직원

2015년 밀레코리아 전체 매출 중 B2C가 차지하는 비중은 99%에 달한다. 시장 변화를 보며 능동적으로 대응한 덕이다. 건설 경기가 악화되자 B2B 가전과 가구 업체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중소형 아파트가 강세를 보이자 고급 대형 가전의 판매가 급감했다. 이 와중에도 밀레코리아는 성장을 계속했다. 안 대표는 “2005년 법인을 시작할 당시부터 B2C 채널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며 “건설경기가 악화되며 B2B 시장이 무너지기 이전부터 B2C 거래를 늘린 덕에 큰 타격 없이 살아 남았다”고 말했다.

밀레 독일 본사는 한국 법인의 변신을 인상적으로 받아들였다. 2014년 열린 밀레의 글로벌 컨퍼런스에서 안 대표는 본사의 요청으로 한국 사례를 발표했다. 그룹 경영진은 중국·홍콩·싱가포르 등 아시아 법인의 지점장들에게 한국 사례를 연구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밀레코리아엔 독일 직원이 한 명도 없다. 그만큼 높은 신뢰를 얻고 있다. “아시아권의 다른 법인에는 독일 사람이 몇 명 나와 있습니다. 한국엔 독일 본사 직원을 보내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한국 법인을 100% 믿는다고 답하더군요.”

몇 년 전부턴 삼성전자와 LG전자도 프리미엄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밀레코리아와 시장이 겹치기 시작했다. 안 대표는 오히려 기회라고 말한다. 프리미엄 전략을 사용하는 동안 밀레 제품은 비싸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제는 삼성과 LG에서도 고가의 제품을 내놓다 보니 오히려 밀레 제품 가격에 대한 저항이 줄었다. 새로운 제품도 출시할 계획이다. “한국 가전 기업이 프리미엄 제품을 내놓으며 시장이 성숙·확장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저희도 더욱 다양한 프리미엄 제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소비자 선택의 폭을 넓혀나가며 계속 성장할 겁니다.”

- 조용탁 기자 cho.youngtag@joins.com

1314호 (201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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