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 산업계의 ‘빅 이벤트’를 꼽는다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 가전쇼(CES) 2016’ 만한 게 없다. 올해 역시 ‘스마트폰·가전·사물인터넷(IoT)’ 같은 정통의 영역에만 머물진 않는다. 지난해 ‘드론’ 열풍에 이어 이번엔 ‘스마트 카’를 둘러싼 기술의 향연이 펼쳐졌다. 최근 산업 판도를 바꾸는 ‘융합 비즈니스’의 생생한 현장이다. 새 먹거리를 찾는 굴지 기업의 오너·최고경영자(CEO)들에겐 사업의 촉(觸)을 날카롭게 다듬을 장이다. 그런데 이재용(48)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연말 측근들에게 ‘CES 2016년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알렸다. 불참 이유가 관심을 모았다. 이 부회장은 “신년 사업 전략을 짜는 데 집중하겠다”고 말한 걸로 전해졌다. 재계 1위인 삼성조차 ‘먹거리 고민’이 만만치 않다.재계 2위 현대자동차그룹도 지난해 12월 ‘제네시스 EQ 900’을 내놓으며 1967년 창사 이후 대대적 변신을 꾀하고 있다. ‘프리미엄 차’로 독일·일본차와 승부할 각오다. 하지만 복병은 한 둘이 아니다. 중국의 경기 하강으로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이원희(56) 현대차 사장이 “올해엔 무리한 사업 확장 대신 브랜드 가치를 높이면서 원가 경쟁력을 다지는데 주력하겠”며 ‘내실 경영’을 얘기한 이유다. 하지만 공격 경영의 고삐도 놓을 순 없다는 게 고민이다. 프리미엄 차의 도전도 그렇고 ‘친환경차·스마트카’ 전선(戰線)에서도 머뭇거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만만찮은 미래 먹거리 고민
“내수는 글쎄…” 다시 허리띠 졸라맨다‘안방 시장’도 그다지 따뜻하진 않을 걸로 보인다. 이원준(60) 롯데백화점 대표는 “중산층 이하의 가처분 소득이 줄고, 1인 가구가 계속 늘면서 소비심리 회복도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 봤다. 임헌문(56) KT 사장도 “전반적인 소비 여력 둔화가 이어질 전망”이라며 “경기 방어의 대표 업종인 통신 쪽도 타격이 예상된다”고 우려했다.이처럼 ‘흐린 기상도’는 CEO들의 성장률 전망에도 그대로 배어 있다. CEO 절반이 2016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2.6~2.8%로 예상했다. 민간 경제연구소와 궤를 같이 한다. 정부 전망치(3.1%)보다 낮다. 그만큼 내수 업종의 돌파구 찾기도 쉽지 않을 듯하다. 이원준 대표는 “체험과 여가활용을 중시하는 최근 고객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해 기존 점포를 증축해 집객 시설을 확대하고 복합몰·아울렛 등 신규 출점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롯데만 놓고 보면 지난해 재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경영권 분쟁’을 수습할 숙제가 더 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란 면세점 사업에서도 지난해 11월 서울 송파구 잠실의 월드타워점 ‘허가권’을 반납한 상처가 있다.이런 ‘악천후’ 속에서 기업들이 올해 투자비를 가장 많이 집행할 곳도 기존 사업장으로 나타났다. 절반이 넘는 CEO들이 “이미 진행 중인 사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투자를 주력하겠다”고 답했다. 신성장 동력 발굴과 인수합병·인재개발 같은 투자 항목은 일단 뒤로 미뤄졌다. 권오갑 현대중공업 사장은 “기초 체력을 다지는 게 중요한 시점”이라며 “핵심 역량 위주로 사업을 재편하고 책임경영 체제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조선 업계를 강타한 불황은 세계 1위인 현대중공업조차 비켜가지 못 했다. 올해엔 일단 인건비를 줄이고, 각종 시설투자 축소 등을 통해 올해 5000억원 넘는 비용부터 줄일 계획이다. 사업 면에선 친환경·고효율 선박인 ‘에코십’과 정보기술(IT)을 접목한 ‘스마트십’ 개발로 수익성을 높이려 한다.다만, 이번 CEO 설문에서 투자비 규모의 경우 “지난해 수준을 유지한다(4명)”는 계획에 못지않게 “더 늘리겠다(3명)”는 응답들도 나와 투자 마중물 역할을 할지 주목된다. 특히 7명의 CEO들이 “2017년 이후엔 경기가 회복할 것”으로 예상했다. 올 하반기부터 경기가 살아날 것으로 본 CEO도 2명이었다. 상반기에 ‘인내 경영’으로 잘 버티면서 체력을 기르면 재도약 계기가 온다는 메시지였다.기업 위기와 관련해 가장 심각한 우려의 하나가 바로 ‘인력 구조조정’이다. 특히 지난해 말 두산인프라코어가 20대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추진하다 여론 뭇매를 맞으면서 ‘명퇴’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이번에 10대 그룹의 CEO들은 ‘소속 업종에서 희망퇴직 등이 필요하느냐’는 질문에 “필요성이 낮다”(7명)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이 질문 답변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CEO는 “사업 환경에 따라 유동적이지만, 구조조정 수준의 인력 감축은 없을 것”이라고 봤다. 다른 CEO 역시 “어려운 국내 경제 여건을 감안하고 고통 분담 차원에서 가급적 인력 조정 없이 위기를 극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되레 “신사업 영역에 대한 인적 자원 보완이 꾸준히 필요하다”며 추가 채용 의사를 밝힌 CEO도 있었다.
“가급적 희망퇴직 않겠다”궁극적으로 위기를 넘기 위해선 각 경제 주체들의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문이 나왔다. 정철길 SK이노베이션 부회장은 “절박한 상황을 함께 인식하고, 정·재계가 합심해 파고를 넘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지창훈 대한항공 사장과 이원준 롯데백화점 대표는 경제·내수 활성화 정책을 요청했다. 임문헌 KT 사장은 “소비 저하를 막기 위한 가계부채 우려 해소와 양극화의 사회 문제화 방지 등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도현 LG전자 대표는 “위기에 대해 각 경제 주체(기업·국민·정부)들이 컨센서스(교감)를 갖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리 = 김준술·박태희 기자 jsoo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