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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제조업 뭐가 다른가 | 표준 만드는 ‘룰 세터’] 최고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는다 

불경기에도 R&D에 꾸준히 투자 ... 기술력+실용성+내구성에 디자인 강화까지 


▎독일의 룰 세터들은 새 사업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매년 막대한 비용을 신약 연구에 쓰는 머크(왼쪽)와 세계 최초로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적용한 밀레의 세제 자동투입 세탁기.
글로벌 시장 전반에 어떤 ‘규칙’이 있다고 본다면 기업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규칙을 정해 선도하는 ‘룰 세터(Rule-Setter)’와 이들이 정한 규칙을 그대로 따라가는 ‘룰 옵저버(Rule-Observer)’다. 예컨대 스마트폰 분야에서 애플과 삼성전자가 룰 세터라면 중국의 화웨이와 샤오미는 아직은 룰 옵저버 단계에 머물고 있다. 주로 선진국 기업이 룰 세터로서 시장을 주도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독일 기업이 많다. 이른바 잘나간다는 독일 기업이 현실에 안주하지도 않고, 불경기라고 기술 개발을 망설이지도 않는다. 꾸준한 기술 개발로 기존 시장을 지키고, 새 시장을 개척하는 룰 세터 역할을 하고 있다.

독일 제조업은 유럽 전체 제조업 부가가치의 30%가량을 차지할 만큼 강세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경제 성장을 이뤘지만, 최근 경기 침체 여파로 경쟁력이 주춤한 한국이 롤 모델로 삼을만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2014년 펴낸 한 보고서에서 독일 제조업이 룰 세터로서 경쟁력을 갖춘 비결을 5가지로 압축했다. 이에 따르면 독일 제조 업체들은 ▶경기와 무관하게 꾸준히 연구·개발(R&D)에 투자하고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바탕으로 높은 노동 생산성을 유지하며 ▶기술 인재 양성에 매진할뿐더러 ▶가족기업을 중심으로 장기적인 성과를 추구하고 ▶전통적으로 강했던 분야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시장을 창조한다.

머크·밀레·브라운, 새 시장 적극 개척


독일의 대표적인 룰 세터 기업으로 머크(Merck)가 있다. 1668년에 출범해 올해로 창립 347주년을 맞은 세계 최고(最古) 의약·화학 전문 기업이다. 해당 분야 최장수 기업답게 지난해 전 세계에서 기록한 그룹 전체 매출이 약 15조원에 달했다. 머크의 성공과 장수 비결은 전경련의 5가지 분석 내용과 일치한다. 우선 R&D에만 연간 그룹 전체 매출의 15% 내외 비용을 의약과 화학 두 부문으로 나눠 투자할 만큼 기술 개발에 적극적이다. 최근 1%대 경제성장률에 머물고 있는 독일의 열악해진 경제 사정에도 아랑곳 않고 새 기술 개발로 시장을 넓히고 있다.

머크의 과감한 투자는 지난해 미국의 실험실장비 전문 기업인 시그마알드리치(Sigma-Aldrich) 인수를 완료하면서 절정을 이뤘다. 머크는 시그마알드리치 인수에만 현금 170억 달러(약 19조원)를 투자했다. 연간 그룹 전체 매출 규모마저 훌쩍 뛰어넘는 머크 역사상 최대 규모 투자다. 의약 분야에서 시그마알드리치가 보유한 30만 개의 제품과 수천 개의 특허를 확보해 신약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다. 머크는 전문 의약품과 다발성경화증, 종양, 난임, 내분비 분야 등에서 생물학적 제제를 포함한 다양한 의약품을 150개 국가에 제공하고 있다. 그럼에도 기존에 강했던 분야에서 또 다른 룰을 세팅하기 위해 분주하다. 이에 대해 미하엘 그룬트 한국머크 대표는 “R&D 역량을 갖춘 기업이 있다면 언제든 신약 개발을 위해 (해당 기업과) 전략적 제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머크의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과감한 투자가 가능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머크의 또 다른 특징은 창업주였던 고 프리드리히 야콥 머크의 후손들이 대대로 소유권을 가진 가족기업이라는 점이다. 현재 13대째로 가문의 후계자가 지주사를, 전문경영인이 각 계열사를 경영하는 체제다. 소유와 경영을 사실상 분리하되, 머크 가문 사람들은 지주사를 통해 전문경영인들과 수시로 교류하면서 경영 방향을 조율한다. 통상 임기 동안 단기 수익을 내는 데만 집중하는 전문경영인의 한계를 오너십으로 극복하면서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한국의 재벌과 다른 점도 있다. 머크 가문 사람들은 회사에 마음대로 입사하지 못한다. 먼저 다른 회사에 취업해 고위직으로 승진하는 등 능력을 인정 받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머크에서 일할 수 있다. 입사 때도 머크 가문 출신이 아닌 사람보다 더 엄격한 평가를 받는다. 이에 반해 임직원들은 함부로 정리해고하지 않는다. 안정적 노사관계를 바탕으로 노동 생산성을 높이는 데 주력한다. 이 때문에 머크는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지배구조를 구축한 기업 중 하나로 꼽힌다.

독일에는 머크처럼 장기적인 성과를 추구하는 가족기업이 유난히 많다. 1899년 설립된 프리미엄 가전 전문 기업 밀레(Miele)도 공동창업주의 두 가문이 117년간 소유하며 4대째 이어오고 있다. 기술과 경영 두 분야를 각각 도맡은 이들 가문은 단 한 차례도 경영권을 놓고 다툰 적이 없다. 지난해 방한한 밀레의 마르쿠스 밀레 공동회장은 “두 가문의 후손이라도 자동으로 경영권을 물려받지 못한다”며 “능력을 입증해야 경영에 참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세계 자동차 시장을 장악한 독일의 BMW도 가족기업이다. 자본집약적인 자동차산업 특성상 장기적 관점에서 한 발 앞선 의사결정으로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는데 유리하다는 분석이다. 독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도 이들이 룰 세터로 약진하는 데 도움을 준다. 독일 정부는 가족기업의 상속자들이 상속 후 일정 기간 고용 유지 조건만 이행하면 상속세를 따로 부과하지 않는다.

세계 1~3위 다투는 히든챔피언 1600 곳

독일의 룰 세터들은 기존에 세계 시장에서 검증된 기술력과 기능성, 실용성, 내구성에다 최근 들어 디자인이라는 날카로운 무기까지 더하고 있다. ‘독일산은 튼튼하지만 어딘가 투박하다’는 세간의 선입관을 털어내는 데 나선 것이다. 한국에서도 면도기로 유명한 소형 가전 전문 기업 브라운(Braun)은 일찌감치 독일식 기술력(German Engineering)과 디자인을 핵심가치로 삼아 세계 소비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곳이다. 브라운은 195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대량생산 제품이 쏟아지자 대량생산된 느낌이 덜 들도록 차별화한 디자인을 적용하는 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디자인 전담 부서가 제품 개발 단계에서부터 활발히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꾼 것이다. 승부수는 주효했다. 1957년 이후 생산한 제품이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등 100개가 넘는 디자인상을 수상하면서 심미성을 인정받고 있다.

물론 독일에서는 머크와 밀레, BMW, 브라운처럼 이름난 대기업만 룰 세터로 활약하는 것이 아니다. 부엌칼과 스피커, 정밀 광학렌즈, 시계 등 많은 세부 분야별로 세계를 선도하는 강력한 중소·중견기업인 ‘히든챔피언(Hidden Champion)’이 지금이 순간에도 규칙을 정하고 있다. 독일에는 세계 시장에서 해당분야 1~3위를 달리는 이들 히든챔피언만 1600여 곳이 있다. 대기업 하나가 휘청거리면 나라 경제 전체가 휘청거린다는 한국으로선 부러운 이야기다.

- 이창균 기자 lee.changkyun@joins.com

1318호 (2016.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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