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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제조업 뭐가 다른가 | 핵심 기술 장악한 ‘키 컴퍼니’] 갑이 눈치 보는 을 기업 

핵심 기술 확보해 산업 영향력 키워... 독일 키 컴퍼니 1000개 달해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차량 안전벨트는 수많은 목숨을 지켜준 발명품이다. 보기엔 단순한 장치다. 벨트와 연결고리는 누구나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아무나 만들 수 없는 ‘핵심(Key) 부품’이 안전벨트에 숨어 있다. 충격에 반응하는 특수 스프링이다. 이 스프링을 구하려면 독일 기업 케른 리버스로 주문서를 보내야 한다. 이 회사는 독일의 벤츠와 BMW, 미국의 포드·GM, 스웨덴의 볼보, 일본 도요타·닛산, 한국의 현대·기아자동차 같은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에 특수 스프링을 공급한다. 세계 시장점유율은 80%에 달한다. 케른 리버스는 ‘갑의 눈치를 안보는 을’이다. 이 스프링이 없으면 안전밸트를 못 만든다. 안전밸트 공급량이 적어지면 차량 출시 일정도 밀린다. 용수철 기술 하나로 산업 전체를 좌우하는 영향력을 가진 셈이다. 케른 리버스를 ‘키 컴퍼니(Key Company)’로 꼽는 이유다.

키 컴퍼니는 특정 분야의 핵심 기술력을 보유한 강소기업이다. 당연히 원청업체를 상대로 협상력과 수익성을 높일 수 있다. 언제 공급선이 바뀔지 대기업의 눈치를 보고 납품단가 후려치기를 당하는 일반적인 하청업체 입장과 다르다. 이런 키 컴퍼니는 유독 독일에 많다. 독일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은 전 세계 키 컴퍼니의 수를 2000여 개로 추정했다. 이 가운데 절반인 1000여 개가 독일 기업이다. 독일을 ‘키 컴퍼니 왕국’으로 부르는 배경이다.

시장 지배력이 중소기업 생존 좌우

왜 독일에 키 컴퍼니가 많을까. 먼저, 특유의 장인문화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독일에서는 아주 작은 분야에 평생 매달리며 기술력을 확보한 기업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독일 정부는 대학 연구소와 중소기업의 협업을 적극 지원하며 기술력 확보를 도왔다. 글로벌화도 또 하나의 이유다. 키 컴퍼니 대부분은 독일과 이웃 나라에 제품을 공급해온 중소기업이다. 글로벌화로 세계 곳곳에서 주문이 밀려들어 왔다. 시장 성장으로 얻은 자금은 R&D(연구·개발)에 쏟아 붓는다. 그 덕에 대기업이 시장에 진입하기 이전에 진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헤르만 지몬은 “중소기업의 생존에서 시장 지배력이 가장 중요하다”며 “독창적인 기술과 속도만이 이들이 나아갈 길”이라고 설명했다. 의료용 생체모형 세계 1위 기업인 3B 사이언티픽 관계자는 “기업의 정체성은 세계 시장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을 때에만 정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독일 산업용 접착제 제조기업인 델로도 키 컴퍼니의 좋은 사례다. 실험실·연구실에서부터 대량생산 라인 등에 쓰이는 다양한 경화용 접착제를 전문적으로 생산한다. 이 회사는 접착제 생산에서 나아가 프로토타입 생산을 위한 컨설팅에서 서비스 제공에 이르는 토털 솔루션으로 비즈니스 영역을 확대 중이다. 연평균 매출은 약 5000만 유로(약 643억원)로, 매출액의 15%를 연구개발에 투자한다. 직원 수는 300여명에 불과하지만 이들 중 약 40%는 엔지니어링과 연구개발 분야 인력이다. 기술에 집중한 덕분에 매년 신제품을 출시하며 전체 매출의 30%는 최근 3년 이내에 출시된 제품에서 발생한다. 델로의 제품은 자동차·엔지니어링·전자·유리기판·디스플레이·가전을 생산하는 데 필수적이다. 국내에서는 LG와 삼성이 델로의 주요 고객사다. 최근에는 범위를 넓혀 스마트 카드와 RFID 등에 사용되고 있어 그야말로 전 산업계에서 통하는 제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 각광받고 있는데, 여러 업계에서의 다양한 기술 지배력을 바탕으로 디스펜서와 LED 경화 램프로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최근 델로는 고온에 견디면서도 탈착이 쉬운 신제품을 출시해 태양광 시장을 노리고 있다. 델로가 새로 개발한 접착제는 우수한 접착력과 낮은 수증기 침투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키 컴퍼니는 문화 분야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예술·공연 필수품 제조기업으로 게리츠가 있다. 이 회사는 전 세계 유수의 극장에 공연막과 커튼을 납품한다. 60여 년 전 직물 도매상으로 시작해 이젠 무대막·배경막·스크린·음향반사판 등 무대 시설에 필요한 각종 제품을 생산한다. 간단한 배경막부터 커튼을 오르내리게 하는 시스템도 자체 기술로 개발했다. 독일 본사 외에도 오스트리아·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 등 유럽과 미국에 자회사를 두고 있다. 1992년에는 바느질과 PVC(폴리염화비닐) 접합, 금속 작업, 페인트칠을 위한 공장이 프랑스에 세워지기도 했다. 독일 내 직원 수는 160여 명에 불과하다. 한국에도 2012년 게리츠코리아를 설립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국내 유수의 극장 대부분이 게리츠 제품을 쓰고 있다고 보면 된다”며 “국내에도 생산하는 업체가 있긴 하지만 게리츠처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곳은 없으며 독보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국내에서 사용하는 제품은 독일 본사에서 수입해 납품하는 경우도 있고, 충북 음성 공장에서 자체 생산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 중소기업의 좋은 교과서

일반 소비자에겐 생소하지만 3B 사이언티픽은 의료 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키 컴퍼니다. 독일 함부르크에 본사를 둔 이 회사는 1819년 설립한 이후 세계 최고의 인체모형 제작 회사로 발돋움했다. 전 세계 110개국 이상에 수출하고 있으며 인체 모형 세계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병원이나 학교 실험실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골 모형과 심장·뇌 등 각종 인체 장기 및 뼈 모형이 주력 제품이다. 3B 사이언티픽의 모든 제품은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높은 품질력을 내세워 인체모형 분야에선 ‘명품’으로 불린다.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 기술력과 끊임없는 연구개발로 전체 매출의 85%는 독일이 아닌 해외에서 나온다.

3B 사이언티픽은 인체모형 분야에서 유일하게 ISO9001 인증을 보유하고 있다. 3B 사이언티픽의 주요 제품은 의료·교육용에 빠질 수 없는 제품이다. 최근엔 3D 프린터를 활용해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오랜 기간 정확한 인체 정보를 구축한 노하우를 살려 3D 프린터를 통해 다양한 제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3B 사이언티픽 관계자는 “한국에선 병원 등 임상 실험실이나 학교에 주로 납품하는데 병원이나 학교를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우리 제품을 사용 중이다”며 “의료·교육시장의 필수품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유필화 성균관대 경영학과 교수는 “독일의 키 컴퍼니들은 한국 중소기업이 나아가야 할 롤모델”이라며 “독일 중소기업이라는 교과서를 면밀히 살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 조용탁·허정연 기자 cho.youngtag@joins.com

1318호 (2016.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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