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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④] 道가 무너진 세상에 출사 거부 

남명 조식, 단성현감 제의 거절 ... 왕실 능멸한 표현도 서슴지 않아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청컨대 그대여 무거운 저 종을 보시게/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음을/ 만고의 천왕봉은/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지 아니하네(請看千石鐘, 非大叩無聲, 萬古天王峯, 天鳴山不鳴)’-[남명집]. 자부심과 기개가 담긴 이 시의 지은이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1). 퇴계와 더불어 영남을 대표한 대학자다.

조식은 젊었을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원나라의 저명한 학자 허형(許衡)이 ‘뜻은 이윤(伊尹)의 뜻을 가져야 하고 배움은 안자(顔子, 공자의 제자인 안연)의 학문을 배워야 한다. 세상에 나가면 해내는 것이 있어야 하고, 물러나면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라고 한 부분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성인(聖人)이면서 재상을 맡아 나라와 백성을 위해 큰 공을 세운 이윤을 본받아 관직에 출사해선 좋은 정치를 이뤄야 하는 것이고, 만일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향리로 물러나게 되면 안자의 학문을 따라 배우며 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출사(出仕)해도 아무런 하는 일이 없고 은거해도 아무 것도 지켜내지 못한다면, 이는 선비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길 중에서 조식은 초야에 은거하는 처사(處士)의 삶을 선택한다. 모친의 성화에 못 이겨 과거에 응시하기는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조식이 현실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도 성리학의 이상이 실현되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그러나 뜻을 이루기에 세상은 너무나 혼탁했다.

조식은 김해와 합천, 산천 등 경상우도 일대에 계속 거주하며 학문에 힘썼다. ‘성성자(惺惺子)’라고 이름을 붙인 쇠방울을 차고 있으면서,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져 방울 소리가 나게 되면 몸을 가다듬고 마음가짐을 경계했다. 제자들을 양성하며 ‘경의(敬義)는 마치 해와 달과 같아서 하나라도 폐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는데, ‘경’으로서 자신을 수양하고 ‘의로움’으로서 외부의 일과 마주하라는 것이었다.

출사하면 좋은 정치를, 물러나면 학문 수양을

이 과정에서 조식의 명성은 점차 경상우도를 넘어 한양에까지 알려졌다. 당시 조정의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척신들은 이러한 조식에게 매력을 느끼고 명종을 통해 그에게 관직을 내린다. 그의 명성과 인망을 활용해 권력의 정당성을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훌륭한 선비를 중용한다는 칭송도 얻고 말이다. 요즘 인재 영입을 통해 정권이나 정당의 지지도를 높이려는 행태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조식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1575년(명종10) 임금이 그를 단성현감(조식의 명성에 비해 낮은 관직처럼 보이지만, 과거를 보지 않은 그에게 종6품의 벼슬을 내렸다는 건 파격적인 일이었다)에 제수했을 때, 그는 장문의 사직상소를 올리며 관직에 나갈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바로 작금의 세상에는 도가 행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하의 정치는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흔들려 하늘의 뜻도, 민심도 이미 떠나갔습니다. 비유하자면 오래 된 큰 나무의 속을 벌레가 다 갉아먹어서 진액이 말라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당장이라도 닥쳐올 것 같은 형국입니다. 조정에 충의로운 선비와 근면한 어진 신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관리들이 백성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래에서는 시시덕거리며 주색에 빠져있으며, 위에서는 어물쩍거리며 재물만 불리고 있습니다…(중략)…자전(慈殿, 문정왕후를 말함)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에 있는 한 사람의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아직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수많은 천재지변을 어찌 감당해내실 것이며, 억만 갈래로 찢어진 인심을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또한 지금의 이런 상황은 주공과 소공(周公과 召公, 중국 고대의 명재상)과 같은 재주가 있어도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인데 신의 하찮은 재주로 무엇을 어찌하겠습니까. 위태로움을 지탱해내지 못할 것이고 백성을 온전히 보호하지 못할 것이니, 신이 전하의 신하가 되기란 어렵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변변찮은 명성을 팔아 전하께서 주신 관직을 받고 녹을 먹는 것은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명종10.11.19).

조식은 자신에게는 당대의 난국을 해결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자신이 관직을 맡는다면 임금과 나라에 누를 끼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식이 서슬 퍼런 막후 실권자인 대비 문정왕후를 한 사람의 과부에 불과하다고 하고, 임금 역시 홀로 의지할 데 없는 어린아이라 비유한 점이 문제가 된다. 이는 실로 목숨을 건 표현으로, 왕실을 능멸한 죄로 처단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다. 실제로 명종은 이 부분에 대해 크게 진노하여 조식에게 죄를 묻고자 했는데, 심연원과 상진 등 여러 재상들이 극구 만류하여 겨우 무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조식은 출사에 아예 관심이 없었던 것일까? 명종의 조정에는 나가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조식의 사직소를 좀 더 살펴보자. ‘훗날 언젠가 전하께서 학문과 덕을 수양하여 왕도(王道)의 경지에 이르신다면 신은 전하의 수레를 끄는 마부가 되어서라도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신하의 직분을 다할 것이니, 전하를 섬길 날이 어찌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 하여 백성을 새롭게 하시고, 몸을 수양하여 인재를 임용하고 지극한 이치를 굳건히 세우시옵소서. 전하께서 세우는 이치가 옳게 구실하지 못하면 나라도 나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삼가 예찰(睿察)하소서.’(명종10.11.19).

요컨대 조식의 뜻은 출사하지 않고 은거해 있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임금이 올바른 정치를 행한다면 자리의 높고 낮음에 연연하지 않고 조정에 나갈 의사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조정에선 선비로서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세상이라면,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조정에 나선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그저 무의미한 일일 뿐이다.

조식이 시종 날카롭고 신랄한 어조로 명종의 정치를 비판하고 당대의 상황을 우려한 것은, 큰 자극을 통해 명종이 깨우침을 얻길 바라서였을 것이다. 명종이 스스로를 반성하고 조정의 분위기를 일신하여 선정을 베풀고, 자신도 거기에 참여해 기여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기대해서였을 것이다. 그의 사직소는 직임을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직임이 내려지길 원하는 구직상소라 할 수 있다.

지나친 표현으로 반감 부르기도

그런데 그의 사직소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조식의 상소는 당대의 뜻있는 젊은 지성들에게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았지만, 지나치게 날을 세운 탓에 정작 상소를 올린 대상인 명종에게는 반성은커녕 반감을 샀다. 이를 두고 퇴계 이황은 “무릇 상소는 직언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아야 하나, 뜻은 곧으면서 말은 부드럽게 하여야 한다. 그래야 아래로 신하의 예를 잃지 않고 위로 임금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수 있으니, 남명의 상소는 금세에 참으로 얻기 어려운 금언이나, 말이 지나치니 필시 임금께서 보고 노하실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오늘날에도 윗사람에게 충언을 올려야 할 아랫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21호 (201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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