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0일 중국 서부개발 요지인 충칭시의 한 호텔. SK(주) C&C와 대만 홍하이그룹 계열사인 맥스너바의 주요 임원들이 손을 잡았다. 두 회사는 이날 충칭에 자리한 홍하이 공장의 프린터 생산라인을 스마트팩토리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의 전자기기 위탁제조업체(Contract Manufacturing Service, CMS)인 홍하이그룹의 충칭 공장에 SK(주) C&C의 스마트팩토리 플랫폼을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스마트팩토리란 사물인터넷(IoT)·빅데이터·클라우드 등 최신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해 생산 공정을 실시간으로 제어하고 생산성·효율성을 높인 공장을 일컫는다.두 회사는 올해 5월까지 프린터 생산라인 한 곳을 스마트팩토리로 바꾼다. 이후 충칭 공장의 24개 생산라인 전체를 스마트팩토리로 전환한다. 또 인도·베트남 등 글로벌 생산기지로 떠오른 신흥 국가에서도 스마트팩토리 사업을 공동 추진하기로 했다. 중국 정부가 중국판 ‘인더스트리 4.0(1·2·3차 산업혁명에 필적할 만한 네 번째 제조혁신 흐름)’인 ‘중국제조2025 전략’을 강하게 밀고 있는 만큼 성장 잠재력이 큰 중국의 스마트팩토리 시장에서도 함께 뛰기로 했다.
홍하이 공장에 SK 스마트팩토리 플랫폼 도입이 계획대로 된다면 SK(주) C&C는 IT서비스업 위주의 사업 체질을 개선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을 전망이다. 홍하이그룹은 중국의 10여 개 공장을 비롯해, 브라질·멕시코·인도·말레이시아·유럽 등지에 수십 개의 제조 공장을 두고 있다. 고용 인원만 150만 명에 달한다. 연매출은 1325억 달러(약 158조6700억원)로 애플·삼성에 이은 세계 3위다.스마트팩토리 프로젝트의 시작은 1년 7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4년 6월 구속 수감 중이던 SK그룹 최태원 회장이 자신의 SK C&C 지분 4.9%를 홍하이그룹에 매각했다. ‘삼성’과 ‘한국’을 싫어하는 반한파로 알려진 홍하이그룹 창업자 궈타이밍(66) 회장이 SK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SK C&C의 지분을 5% 가까이 매입했다는 데 이목이 집중됐다. 지난해 8월 SK(주)가 SK C&C와 합병하면서 통합 SK(주) C&C에서 홍하이그룹의 지분은 약 3.41%로 조정됐다. 지분 매각 당시 옥중에 있던 최 회장은 “중국 시장에서 홍하이와의 파트너십을 활용한 사업 기회를 찾으라”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두 회사의 협업은 스마트팩토리로 구체화됐다. 지난해 5월 팍스콘과 SK C&C는 7:3 비율로 720억원을 투자한 합작 벤처인 FSK홀딩스를 홍콩에 설립했다.홍하이와 SK의 제휴에는 궈타이밍 회장과 최태원 회장의 ‘꽌시’(關系)가 밑바탕이 됐다. 최 회장과 궈 회장은 2012년쯤 삼보컴퓨터 창업주인 이용태 회장 아들인 이홍선 TG앤컴퍼니 회장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당시 궈 회장은 애플 제품의 90% 이상을 생산하는 ‘애플 파트너’로서 삼성 이외의 부품 공급사 정보를 찾고 있었다고 한다. 애플은 삼성으로부터 메모리칩·디스플레이 등 핵심 부품을 공급받는 고객이지만, 삼성을 상대로 특허 소송을 제기한 이후 다른 부품 공급사를 물색하고 있었다. 마침 최 회장은 하이닉스 인수(2011년 11월) 후 대대적인 투자를 결정하고 메모리반도체 시장에 승부수를 걸던 때였다.이 때 이홍선 회장이 궈 회장과 최 회장 사이에 다리를 놨다. 이홍선 회장은 이용태 삼보컴퓨터 창업주의 차남이다. 삼보컴퓨터는 1990년대 대만의 OEM(주문자 상표부착) 업체였던 팍스콘에 PC 생산을 맡기며 팍스콘과 관계를 이어왔다. 익명을 요구한 벤처 업계 관계자는 “두 오너가 만나고 두어 달 후 최 회장이 법정 구속(2013년 1월)됐는데 이 소식을 들은 궈 회장이 ‘그런 큰 수사를 받고 있는 줄 몰랐다’며 몹시 안타까워했다”고 말했다.이듬해 6월 최 회장이 홍하이에 지분을 매각할 즈음 궈타이밍 회장은 직접 의정부 구치소를 찾아 최 회장을 면회했다. 최 회장도 지난해 8월 특별사면 후 나선 첫 해외 출장길에 대만에 들러 궈타이밍 회장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세 사람의 인연은 지난해 국내에 중저가폰 돌풍을 일으킨 루나(LUNA)폰으로도 이어졌다. 루나는 이홍선 회장이 이끄는 TG앤컴퍼니가 기획, 팍스콘이 생산, SK텔레콤이 마케팅과 판매를 맡았다. 루나는 6개월 간 15만 대가 팔리며 국내 중저가폰 시장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홍하이와 SK(주) C&C의 협력은 앞으로 더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홍하이그룹은 최근 SK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SK텔레콤의 중국 내 헬스케어 사업에도 관심을 나타냈다. SK텔레콤은 2014년 7월 중국 심천에 분당서울대병원, 현지 의료법인과 손잡고 SK 헬스케어 R&D센터와 심천메디컬센터(건강검진)를 열며 중국 헬스케어 시장에 진출했다. 최근 홍하이는 이동통신과 헬스케어를 결합한 서비스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홍하이엔 SK의 이통 기반 융합 사업 노하우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 SK그룹 관계자는 “아직 헬스케어 사업 관련해 홍하이와의 제휴가 결정된 건 없다”고 말했다.홍하이와 SK의 제휴는 큰 틀에서 보면 홍하이의 사업 다각화 전략의 일환이다. 홍하이는 최근 수년 간 핵심 파트너사인 애플에 대한 매출 의존도를 낮추려고 애쓰고 있다. 샤오미 등으로 파트너 기업을 다원화하고, 포화상태에 이른 스마트폰 이외의 먹거리도 찾고 있다. 통신·헬스케어·스마트팩토리 등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융합에 관심이 많다.
홍하이, 강력한 브랜드의 전자기업으로 변신 시도이름없는 ‘숨은 손’ 전략도 바뀌는 분위기다. 홍하이는 2012년 뉴욕타임스가 중국 팍스콘 공장의 열악한 근무환경 문제를 보도하면서 세계의 하청공장 기업이 가진 한계를 절감했다. 이후 차기 생산기지를 인건비가 비싸지는 중국 대신 인도로 정하는 한편 ‘브랜드 쇼핑’에 나섰다. 강력한 브랜드를 가진 전자기업으로 변신을 시도하는 것이다. 일본 샤프(Sharp)가 그 첫 사례다. 궈타이밍 회장은 2월 초 일본 TV산업의 아이콘 샤프 인수에 6590억엔(약 6조7300억원)을 베팅했다. 그는 샤프 인수 경쟁자였던 일본 민관투자펀드인 산업혁신기구(INCJ)를 제치기 위해 2월 5일엔 오사카로 날아가 샤프 본사 경영진을 직접 만났다. 이미 세계 3위 LCD 패널 업체 이노룩스를 갖고 있으면서도 샤프의 ‘브랜드 파워’를 사는 데 7조원을 건 것이다. 국내 전자 업계 관계자는 “샤프의 브랜드와 팍스콘의 제조업 역량이 합쳐지면 글로벌 전자 업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수련 기자 park.suryon@joongang.co.kr